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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한영교 『두 번째 페미니스트』
저자 서한영교는 카프카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인 “얼어붙은 호수”를 깨부수기 위해서 카프카가 선택한 것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 같은 한 권의 책으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기듯 우리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책이 아니라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책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애인과 함께 “얼어붙은 호수”를 깨부술 수 있는 도끼 같은 책을 한 권 꼭 쓰고 싶다. - 카프카를 인용한 이 문단은 기어코 시인 서한영교의 품에서 『두 번째 페미니스트』가 세상으로 선보여야만 했던 지독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뉜 현실 속에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말 한마디, 고마운 도움의 손길마저 사실은 비장애인의 우월함과 장애인의 특수성이 동시에 담기고 있음을 저자 서한영교는 잘 알고 있고, 또한 우리 역시 잘 알고 있다. 시인이며 이 책의 저자인 서한영교는 그러한 현실을 마다않고 눈이 멀어가는 애인의 곁에서 ‘남성 아내’가 되어간다.
눈이 멀어간다는 것은 어떠한 느낌일까. 과연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이 상황을 글로 풀어보자면, 한편으론 비장애인의 세상에서 장애인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과정이고 –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일종의 새로 태어남과도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애인을 돌봄으로써 때론 아내가 되어야 했고, 때론 엄마가 되어야 했던 서한영교에게 애인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과정들은 일종의 간접 출산과도 같다.
서한영교가 시인이기 때문일까, 또는 그러한 삶을 택했고 그러한 삶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그의 문장은 계산되지 않고, 그의 문장은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문장은 오롯이 그와 일상의 일부로서 표현된다. <애인은 시각장/애인이에요>편을 보면 “어머니, 제가 요즘 만나는 사람은 시각장애인이에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는 장애인이 되어가는 애인의 삶에 속하여, 비장애인이 만든 문명의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엔 장애인을 위한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대체 왜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으로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책을 반쯤 읽을 무렵, 이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자가 이 책을 페미니스트로 표현한 이유를 마침내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아내를 돌봄으로, 아이를 돌봄으로, ‘생명의 질감’을 육체로 직접 느끼게 된 ‘남성 아내’였기에 이 책의 제목에 굳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저자와 그녀는 자발적 협력을 통한 생활사의 분담을 통해 서로의 거릴 좁혀간다. 그러나 그는 책에서 남성으로서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폭력을 온전히 겪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라는 문장 앞에서 늘 머뭇거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누군가에게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다시 선언하며 책임을 다하려는 두 번째 사람으로.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곁에 위치한 두 번째 자리에서 “저도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있으려 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로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읽은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결코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니 남성 고발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 책에는 실존이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현실적으로 그가 접했던 생활사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함으로써 『두 번째 페미니스트』에 인간의 본질을 써냈다. 살아나아가야 하는,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우리들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