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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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작품을 거꾸로 읽고 있는 중이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를 먼저 알게 되었기에 브릿마리가 전에 살았던 아파트 식구들을 뒤늦게 만났다. 일곱 살 소녀 엘사의 눈을 통해 알게 된 그녀의 이웃들은 무척이나 개성 강한 인물들이다. 관련도 없는 듯하고 친하지도 않아 보이는 각각의 세대가 알고 보니 할머니를 중심으로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동화 속 이야기는 현실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엘사. 특이하지만 그 누구보다 영리한 소녀로 인해 갈등은 화해로 풀어지고, 슬픔은 사랑으로 극복하게 되는 감동 스토리다.

 

“우리 할머니가 미안하다면서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뭐라고 적혀있어요?”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하대요?”

 

어려서 악몽을 꾸던 엘사를 ‘깰락말락나라’로 인도해 평온한 꿈나라로 이끌어준 할머니는 여장부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휴머니스트였다. 암에 걸린 할머니는 엘사에게 편지를 전하는 보물찾기 심부름을 시키고 세상을 떠난다.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 할머니를 잃은 슬픔에 화를 내면서도 엘사는 이웃들에게 할머니의 편지를 차례차례 전한다. 아파트 1층에 사는 미지의 인물 울프하트와 커다란 개 워스가 그녀를 보호하는 친구가 되고, 쓰나미로 가족을 잃은 여자, 택시운전사 알프, 세상에서 가장 착한 부부 레나르트와 마우드, 무슨 증후군을 앓는 아이와 아이의 엄마, 잔소리꾼 브릿마리, 그리고 딸로써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지닌 엘사의 엄마까지, 할머니의 편지는 응어리졌던 마음의 돌을 녹이고 묵은 감정으로 쌓아올린 둑은 봇물처럼 무너져 내린다. 해리 포터와 스파이더맨과 엑스맨을 좋아하는 일곱 살 아이에게 할머니는 그야말로 슈퍼히어로였던 것이다. 이제 여덟 살이 된 엘사가 슈퍼히어로가 될 차례다.

 

“죽음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거야.”

 

맞다. 이별을 경험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상실감과 무력감을 이겨내려면 남겨진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 나아가야 한다. ‘깰락말락나라’는 이야기를 만드는 나라다. 사랑, 꿈, 슬픔, 도전, 음악, 전쟁의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의 나라는 그만 사라지고 그곳에 용서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사사건건 규칙과 원칙을 따지며 잔소리를 끓여 붓던 브릿마리가 엘사의 곁을 지켜주는 순간, 그녀가 왜 다음 편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납득이 간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만큼 고집스럽게 벽을 세우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오히려 가장 상처입기 쉬운 캐릭터가 바로 브릿마리였던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사랑해주길 바란다. 그게 안 되면 존경해주길. 그게 안 되면 두려워해주길. 그게 안 되면 미워하고 경멸해주길.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우리의 영혼은 진공상태를 혐오한다. 무엇에라도 접촉하길 갈망한다.” <닥터 글라스>中

 

그래서 그랬구나. 브릿마리. 이젠 [오베라는 남자]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다음에 등장한다는 하키선수의 이야기도.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책 읽다 죽은 여자 이야기 들어봤어요?”
“나는 종이책이 좋아.”
“아이패드에 온갖 책을 저장할 수 있다니까요?”
“내가 말하는 ‘책’은 그게 아니야. 내가 말하는 ‘책’은 겉싸개가 있고 표지가 있고 페이지가 있고......”
“책은 텍스트잖아요. 아이패드에서 온갖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단 말이에요!”
“책은 들고서 읽는 게 좋아.”
“아이패드를 들고 읽으면 되죠.”
“페이지를 넘기는 게 좋다고.”
“아이패드에서도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요.”

 

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라는 아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처럼 해리포터 시리즈를 수도 없이 읽고 그리핀도르를 좋아하고 불사조기사단이 제일 별로라고 생각하는 아이라서가 아니라, 할머니를 닮아서 특이한 아이. 아는 체 하는 건 아빠를 닮았고 이 사람 저 사람하고 싸우고 다니는 건 할머니를 닮았고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닮은 아이. 그게 섭섭한 것 같은 엄마에게 나머지 전부 다를 엄마한테서 물려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에게 전하련다. 엄마를 닮은 부분이 많아서 너무 행복하다고, 좋은 점을 물려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이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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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 <스트로보> 개정판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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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란 한순간의 기록이지만 그 안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걸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같은 사진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지 않는가. 그 사진을 찍었을 때의 상황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갈 때면 그 날의 공기와 냄새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또 하나 새롭게 다가왔던 사실은 사진에는 카메라로 찍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을 취재하는 보도사진기자라면 셔터를 누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확실히 더 잘 드러나리라. 요즘은 누구나 사진을 찍어 SNS로 공유하는 시대이지만 역시 프로의 사진은 다를 것이다. 순간을 포착하는 순간 찍는 사람의 정신이 깃든다고 생각하면 사진작가의 세계도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 같다. 앞으로는 단순히 기술이나 구도 뿐 아니라 사진에 담긴 감성을 가슴으로 느껴보고자 노력해봐야겠다.

 

셔터를 대충 누르지 마라. 그 한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 몰두할 만큼 보람 있는 일 아닌가? p.215

 

심포 유이치의 [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는 사진작가의 추억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이야기로 미스터리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흥미를 더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제5장부터 시작한다는 색다른 구성이다. 50세가 된 지금부터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22세까지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진작가로서 어떤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기를 각 장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기타카와는 어느 정도 성공한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초심을 잃은 상태라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이 의뢰한 영정사진은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된다.-5장 영정(50)- 어시스턴트였던 미인 사진가의 집념을 이해하고-4장 암실(42)- 스승의 모습에 자신을 비춰보며-3장 스트로보(37)- 사진작가로서 인정받게 해준 운명적인 만남들을 기억한다.-2장 한순간(31)- 그리고 미처 꿈을 펼치지 못한 친구의 마음이 담긴 사진을 보며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진을 찍겠다고 다짐한다.-1장 졸업사진(22)-

 

처음에는 그저 문학작품을 읽듯이 주인공 기타카와가 안내하는 추억을 뒤따라가고 있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이건 일상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다싶더라니 역시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일상의 수수께끼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기에, 안타깝다거나 서글픈 이야기들도 담담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사는 건 후회와 실패의 반복이라는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대사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길에는 곳곳에 장애물이 버티고 있게 마련이지만 하나씩 넘으며 나아가야하지 않겠는가. 고단한 삶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으라는 다독임을 받은 느낌이다. 이 여운이 가시기전에 이번에는 제1장부터 되짚어나가며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진다.

 

심포 유이치眞保裕一의 작품은 일본어 원서로 책을 읽는 엄마의 책장에서 자주 보던 터라 궁금하던 작가였다. 소재가 중복되는 일이 없고 취재와 자료를 모으는데 정성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더니 사진에 대해서도 충분한 조사를 거친 듯 작품에 등장하는 사진들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원제인 스트로보ストロボ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과거에 업무상 포토그래퍼와 일을 하던 때가 자주 있던 편이라 스트로보나 노출계, 반사판, 카메라 셔터 소리, 분주히 움직이는 스튜디오의 분위기 등등 그리운 추억이 함께 떠올라서 더 감상이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최종후보에 올랐던 나오키상을 왜 놓쳤을까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제123회 나오키상 수상작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GO] 였다. 강력한 상대를 만났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국내에도 더 많이 알려졌으면 싶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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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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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미스터리 작품은 영미문학과는 다른 묘미가 있다. 서늘한 이미지가 주는 긴장감은 더욱 떨리는 느낌이 들고, 한적한 풍경에서 오는 서정적인 분위기가 쓸쓸한 파문을 일으킨다. 올겨울은 따뜻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 남았던 진홍가슴새는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노르웨이의 국민작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이자 오슬로 3부작중 첫 번째 작품인 [레드브레스트]는 바야흐로 새천년이 시작되려는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봄이 오기까지의 현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의 과거를 빠르게 넘나드는 전개 속에, 노르웨이의 슬픈 역사를 담았다.

 

현재, 시한부 진단을 받은 한 노인이 있다. 인생의 커다란 숙제를 안고 있는 듯, 남은 시간 동안 할 일을 계획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중인데, 그가 지닌 과거의 비밀과 진실은 무엇인지 최종목표는 어디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중심축이다. 해리 홀레는 어떤 일로 인해 국가정보국에 몸담게 되고 무기 밀매 사건을 추적하던 중 운명의 여인 라켈을 만난다. 한편 노르웨이에는 신나치단체가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과거, 레닌그라드 전장에는 SS대원으로 복무중인 노르웨이 청년들이 있었다. 연일 총탄이 퍼붓는 혹한의 나날들, 전우애도 싹트지만 신경쇠약에 걸릴 수밖에 없는 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각각 흩어지게 되는데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병원으로 이송된 한 병사는 그곳의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다. 본명보다는 우리아라 불리기를 원했던 인물. 과연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전장에서 부하들을 아끼고 나라를 사랑했던 우리아란 인물은 성경에서 의리와 신뢰, 충직의 대명사다.

밧세바가 다윗 왕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임신하자 다윗은 그 흔적을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소환해 그의 집으로 보내어 밧세바와 동침시킴으로써 자기 죄를 숨기려 했다. 충직한 군인이었던 우리아가 전쟁 중인 동료들을 생각하며 이를 거절하자 다윗은 요압에게 특명을 내려 우리아를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에 내보내어 그를 죽게 했다. 우리아가 전사하자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

 

해리 홀레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모두를 심판하려는 자가 등장했다. 진홍가슴새를 닮은 남자 우리아는 갈구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는지. 전쟁을 치르고 나면 온갖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역사에도, 사회에도, 문화에도, 인간에게도. 특히 전투를 직접 겪은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 앞에 어떤 행위는 죄가 되고 어떤 사람은 영웅이 되고, 어떤 사람은 매국노라는 딱지가 씌워져 버린다.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바뀌었더라면 그들의 운명 또한 달라졌으리라. 스스로 원한 싸움도 아니었건만. , 아이러니하면서도 서글픈 현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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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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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어느 주택가, 낡은 빌라가 한 채 있다. ‘고구레빌라(木暮莊)’. 이름도 구수한 그곳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과 주변 인물들의 정겨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미우라 시온의 연작집이다.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도 그렇고 <배를 엮다>에서처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과 누구나 겪으면서 사는 감정들을 감칠 맛나게 엮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성적인 부분을 그토록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할 수 있다니 약간 변태적인 요소까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대단한 재주를 지닌 작가다. 때문에 각각의 캐릭터들에 대한 공감도가 높아져 그들의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2층 목조건물 고구레빌라에는 여섯 집이 있고, 그중 네 집만이 찼다. 1층에는 아들네가 본가로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나와서 거주하고 있는 주인 고구레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대생의 집이 있고, 2층의 두 집에는 꽃집에서 일하는 수수한 아가씨와 중간 규모의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이 각각 살고 있다. 오래된 허름한 건물이라 벽도 얇고 방도 비좁지만 작은 마당에서 강아지 존이 흙을 파며 재롱을 부리는 정감이 가득한 곳이다. 이곳에 사는 네 명의 입주자와 그들 주변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곱 편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떠난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3년 만에 돌아온 옛 연인으로 인해 현재 애인과 셋이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된 꽃집 아가씨 마유 <Simply Heaven>.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갑자기 맹렬한 성욕에 난감해 하는 주인 할아버지 고구레 <심신(心身)>. 전철역 기둥에 난데없이 돋아난 괴상한 형태의 돌기를 보고 동질감을 느끼는 동네 애견미용사 미네와 야쿠자 두목 마에다 <기둥에 난 돌기>.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채고 마음이 복잡한 꽃집 주인 사에키 <검은 음료수>. 아래층 여대생의 사생활을 엿보는 위층 남자 간자키 <구멍>. 불임과 생명의 존재에 방황하는 여대생 미쓰코 <Piece>. 첫사랑 마유를 잊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 나미키와 음식에서 거짓말의 맛을 느끼는 여자 니지코 <거짓말의 맛>.

 

세대도, 성별도, 직업도, 성격도 모두 다르지만 나름대로 순수한 마음을 지닌 소시민들이 벌이는 유쾌한 소동을 보노라니 잊고 있던 추억들과 메말라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이 살며시 고개를 든다. 전형적인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서 좋고 미래를 향한 여지를 남겨두어서 더욱 여운이 남는다. 모처럼 따스한 온기에 가슴이 뭉클해지기에 고구레빌라를 거쳐 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훈훈한 기원을 하늘로 날려본다.

    

 

나미키는 땅거미가 지는 고구레빌라를 떠올렸다. 창밖으로 부드러운 불빛이 새어 나오는 허름한 목조건물.

이번에야말로 가자.

당신이 좋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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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용의자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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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나라 인도는 호불호가 확실히 나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 간 사람들은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푹 빠지거나 다시는 또 가고 싶지 않은 나라라고 치를 떨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들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많은 편견을 갖고 사는 인간인 나로서는 그다지 가보고 싶지 않은 나라다. 오래전이지만 영화 <시티 오브 조이>의 충격적 장면에서 받은 영향이 너무 컸나보다. 이후 조금 나아지기는 했어도 내 평생 인도를 방문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인도의 모든 지역을 여행한 듯 화려하고 복잡한 도시, 장관을 이루는 사원, 사막과 초원, 바다와 강, 부유한 저택과 가난한 슬럼가에 이르는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고 경험한 기분이 든다. 인도는 발리우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화 산업이 발달된 나라로 꽤 재미있는 영화들이 많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역시 인상적이었기에 원작자인 비카스 스와루프의 작품에 흥미가 생겨 구입한 책 <6인의 용의자>. 믿고 선택한 보답을 받았다.

 

부자와 거지가 모두 존재하는 수도 델리,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중심지 러크나우, 화려한 발리우드의 도시 뭄바이(구 봄베이), 웅장한 사원들을 비롯한 유적과 함께 고층빌딩이 장관을 이루는 콜카타(구 캘커타), 항구도시 첸나이, 갠지스강이 흐르는 신성한 도시 바라나시, 서쪽의 사막 자이살메르 황금요새. 동쪽에서 서쪽으로, 북부지역에서 남쪽지방까지 전 인도를 아우르는 여정에는 삶의 애환과 함께 폭력과 배신이 난무하지만 위트와 따스한 인간애 또한 함께 하고 있다.

 

우타르프라데시 내무 장관의 아들이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서 피살된다. 오만방자한 범법자 재벌 총수로 당연히 적이 많은 인물이기에 현장에서 6인의 용의자가 체포된다. 간디의 영혼이 빙의된 부패한 전직 수석 차관, 하위 카스트 출신의 휴대폰 좀도둑, 소안다만제도 최후의 부족인 옹게족의 청년, 인도 최고의 섹시 여배우,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를 자칭하는 얼뜨기 미국인, 그리고 마피아 출신의 인도 내무 장관인 피해자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용의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기]편의 각 장에서 화자가 되어 자신을 소개할 때는 피해자 ‘비키 라이’와 전혀 연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지만 [증거]편의 각 장에서는 휘몰아치듯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 얽혀든다. [해결]편에서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고백]에 이르러 놀라움을 안긴다. 어째서 누구의 이야기는 그냥 문장이고 누구는 일기이고 누구는 전화 통화 형식인지 모든 요소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두가 자승자박의 꼴이지만 원주민 ‘에케티’만은 가슴이 아프다. 답답한 섬에서 탈출해 멋진 나라에서의 생활을 꿈꾸었건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벵골만의 안다만제도에서도 소안다만에 남아있는 원주민 옹게족. 옹게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150센티미터에 새까만 피부와 후추머리, 지구상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의 마지막 후손 에케티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캐릭터다. 진짜 주인공은 바로 그가 아닐는지. 그리고 또 한사람 미국인의 경험 또한 특별한 것이었다. 사기를 당한 줄도 모르고 최고의 미인과 결혼하기 위해 텍사스에서 뉴델리까지 날아온 지게차 운전자 ‘래리 페이지’. 두 시간동안 미친 듯이 달려 돌고 돌아 허름한 호텔에 내려주는 택시기사, 아이를 안은 여인에게 돈을 주자 벌떼처럼 모여드는 거지들, 짜고 치는 수법으로 돈을 갈취하는 호텔관계자, 거짓간판을 걸어놓은 사기꾼 탐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난은 계속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리는 이곳에 마음에 든다. 그와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동료들이 생겨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생활을 통해 살아있다는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볼라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 완전 평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결국 세상은 보통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특별하고, 소중하고, 영예로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게 본분인 진짜 보통 사람들 말이다. (p.47)

 

최고의 여배우가 인기절정에 있을 때의 생각이다. 그러나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도 그러할까? 작가는 특별해 보이는 사람도 실은 그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함께 어울리는 생활이 즐거워 래리가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것처럼,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을 때 에케티가 꾹 다문 입을 열었던 것처럼, 악명 높은 테러단체에 소속된 단원도 IT 산업에 열광하는 젊은이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던 것처럼. 보통사람들이 원하는 건 단지 ‘생명과 자유의 권리’에 대한 보장이라는 원칙을 외면하고 정의를 짓밟으려는 기득권 세력에게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중산층은 국가의 양심이다. 따라서 상류층의 방종과 하류층의 패배주의를 바로잡는 도덕적 횃불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현실에 도전하는 건 늘 중산층이었으며 그들에 의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들이 탄생했다. 프랑스, 중국, 러시아, 멕시코, 알제리와 베트남. 하지만 인도는 아니다. 우리 중산층은 현실에의 안주를 맹종한다. 삶의 기준이 저하되는 현실에도 무관심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에도 냉담하다. 그들은 오직 마구잡이식 소비에만 탐닉한다. 인도는 이미 관음증 환자들의 국가가 되었다. 교활한 시어머니와 고통 받는 며느리를 그린 허망한 연속극에 빠지고, 타인의 불행이 낳은 시체를 뜯어먹으며, 유명 연예인의 파탄난 결혼에 군침을 흘린다. 그러는 동안 깜빡거리는 TV 화면에 비친 뇌물수수 정치가의 행태에도 조금씩 관대해지는 것이다. (p.613)

 

아직 카스트 제도가 남아있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며, 드넓은 땅에 수많은 인구를 보유한 나라, 인도. 특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나 사람 사는 사회란 다 거기서 거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탐욕과 부패, 집착과 폭력, 무관심과 이기심, 인간이 지닌 거친 속성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독버섯처럼 자라나 사람들의 약한 부분을 공략해 살금살금 뿌리를 내린다. 마침 요즘 본 드라마 <드래곤사쿠라>에 이런 말이 있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룰로 굴러간다. 바보들은 착취당하고 손해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화 <1987>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니?’ 그래도 보통사람들이 피운 작은 불꽃이 점점 크게 모아진다면 조금씩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적폐는 세계 어디에나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신성한 돌 잉게타이를 손에 넣은 자에게 옹코보크웨의 저주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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