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로 그린 초상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20세기 미국의 서스펜스 작가 ‘빌 S. 밸린저’에게는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 사건을 쫓아 범인을 찾는 형식이 아니라 주요 인물들을 따라가며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글자들이 꿈틀꿈틀 캐릭터의 옷을 입고 일어나 사랑과 욕망과 음모와 배신이 존재하는 플롯 속에서 각자의 색깔로 독자를 향해 도전적인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자. 내 생각을 읽어봐. 내 감정을 느껴봐.’ 하면서. [연기로 그린 초상 Portrait in the smoke]은 작가의 대표작 [이와 손톱]이나 [기나긴 순간]과는 또 다르지만 역시 사랑에 빠진 사나이의 순정을 소재로 삼았다. 순식간에 읽혀지는 만큼 일단 재미는 있다.


대니 에이프릴이라는 청년과 크래시 알모니스키라는 여인이 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의 입장에서 번갈아가며 진행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동시진행 시점이 아니라는 것. 채권 수금 일을 하는 대니는 우연히 보게 된 사진 속의 미인 크래시에게 홀딱 반하고 만다. 꿈속의 여인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 하에 그녀의 자취를 추적하는 나날을 보내는 대니. 그가 단서를 하나씩 찾을 때마다 크래시의 여정은 조금씩 독자에게 드러난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남자를 이용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여자. 뛰어난 미모와 타고난 감각을 지녔긴 해도 남자들의 마음을 장악해가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데, 능력도 충분히 있는 여자가 왜 남에게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히려고만 할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개미처럼 일해서는 큰 부자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파악한 모양이니 대단하지 않은가.


이제껏 팜므파탈을 그린 작품은 많이 등장했으나 어쩐지 완전히 미워지지 않는 묘한 매력의 캐릭터다. 물론 당한 남자들이 딱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예전에 [지푸라기 여자]를 읽고 여자가 너무 불쌍하다고 했더니 오빠가 허황한 꿈을 꾸느라 당했으니 자승자박이라고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차피 환상이라는 ‘연기로 그린 초상’이었으니 추적의 끝이 핑크빛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감은 오지만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을 때면 항상 느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지옥에서 살게 되는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꼬드김에 빠지고 만, 어떻게 보면 순진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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