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벨라르.엘로이즈 지음, 정봉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읽기 전에 이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겐 상당히 생소한 인물들이라 책을 읽기에 앞서 아벨라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는데, 지금 우리에겐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12세기 카톨릭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한 유명인사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엘로이즈라는 여성과 불같은 사랑을 하고 이후 그들 사이에 오간 편지가 1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나에게까지 읽혔다는 건 꽤나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세기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가 싶었다. 평론가들도 이들의 사랑을 그렇게 평가하기도 했고.  
 그러한 기대감, 세기의 사랑을 나눈 그들의 편지를 엿보려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는 그들 사이의 애절하고 애닳고 그런 순정만화같은 감정보다는 오히려 자기 변명과 비난, 후회, 회피와 같은 감정들이 더 많이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초반의 편지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벨라르에 대해서 적잖이 실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뭐야, 세기의 사랑이라고 하더니 이런 비겁한 변명으로 점철된 편지 따위가 어떻게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평가 되고 있었던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편지 읽기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아벨라르에 대해서 100% 동의는 되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의 고뇌, 자기방어, 심신의 피로, 슬픔, 절망 등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소설, 영화 속에 현실 외면적인 사랑 꽃노래가 아닌 지극히 현실 앞에서의 사랑을 보여준 것 같다. 그래서 천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이들이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었던 걸까?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아벨라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띄우고 그렇게 서로 답장을 주고 받게 된다. 초반에는 오랜만에 소식이 닿은 옛 연인들간에 오고갈만한 언어들이 편지의 주요 내용이라면  몇 차례 서신 왕래후에는 육체적 사랑의 감정들이 어느정도 신앙 안에서의 사랑과 격려로 바뀌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려는 모습들이 보인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들의 편지를 '사랑의 편지'와 '교도의 편지'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을유문화사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뒷 부분 '교도의 편지'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일부 발췌하는 형식으로 실어서, 자칫 지루하고 어렵게 읽힐 수도 있는 부분을 비교적 쉽게 지나갈 수 있게 편집하였다. 사실 일반 사람들이 이들의 편지에서 기대하는 것이 당시 카톨릭 사회의 모습이라든가, 교리는 아닐 것이기에 이러한 편집 방식에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연애편지를 접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주 약간이라도 중세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그 둘의 연애사건에 대한 태도랄까 대처방식이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아벨라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서신을 읽다보면, 그가 참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11~12세기 타락한 카톨릭 수도사들 사이에서 자신이 생활에서 얼마나 금욕적이고 절제를 했는가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뛰어난 수사학, 성경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시기 질투하여 음모에 빠지게 했는지도 열심히 설명한다. 그의 이런 설명이 길어질 수록 오히려 아벨라르가 깊은 절망속에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엘로이즈 본인에게 보낸 것은 아니지만, 이 서신을 읽게 된 엘로이즈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엘로이즈의 첫 번째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참 궁금하였다. 엘로이즈는 아마도 참 많이 불편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엘로이즈 서신 앞 부분에 " 거의 전부가 나에게 쓰디쓴 과거를 회상케 하여, 내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당신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요."라는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당신이 내게 지고 계신 그 의무를 따져 보십시오."라든가 자신에게 정성을 쏟지 않고 오히려 반역의 무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아벨라르의 행위를 "허송세월"이라고 표현하는 등 강한 발언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하여간 나는 나의 위로를 위해서 당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며 아벨라르의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고 있다. 엘로이즈가 수녀가 된 것도 아벨라르의 명령으로 된 것임을 상기시키며 "당신만이 내 마음과 몸의 유일한 주인이심을 보여드렸던 것입니다."라며 아벨라르에 대한 여전한 사랑을 드러냈다. 편지 마지막 부분의 "제발 살펴주세요. 내가 당신께 바라는 바를."이라든가 "나는 이 봉사의 보수를 신에게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신에 대한 사랑을 위해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까요." 대목에선 사랑의 화신 엘로이즈를 볼 수 있었다. 그러한 발언은 참으로 용감하고도 위험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사랑앞에서 아무것도 따지고 재지 않는 용감하고도 무모한, 강한 발언을 쏟아냈지만 사랑앞에서 약한 여성임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편지,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쓴 답신을 보면 뭔가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답신은 한마디로 "날 위해 기도해라"는 정도로 밖에 읽히지 않았다. 엘로이즈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다소 감정이 격한 상태로 편지를 써내려갔다면, 다른 한쪽은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이랄까. 상당히 이성적이고 정제된 문체를 유지하려 애쓴 답신이라 생각된다. 
 다시 세 번째 편지인 엘로이즈의 답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편지였다. "나는 하느님을 노하시게 하는 일보다 당신을 노하게 할까 더 근심해 왔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욕망보다도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욕망이 더 컸습니다. 내가 성의를 입은 것은 당신의 명령 때문이었지, 성소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의 문구는 여인 엘로이즈가 아닌 수녀원장으로서는 상당히 부적절하고 위험한 발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네 번째 아벨라르의 편지에 이르면, 그동안 회피와 변명으로 일관해오던 그의 입장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내가 당신의 마음속을 충분히 살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절박한 위험 속에서 계속되는 삶의 위험으로 상시 절망에 빠져 있는 내 입장을 생각해 주시오."라는 대목에서 아벨라르의 답답함, 위기감, 절망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랑 꽃노래가 아닌, 육체적인 사랑을 넘어서 신앙안에서 하나가 되자고 유도하고 있다. 엘로이즈가 육욕에서 벗어나 이제는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느낌의 편지였다. 진정한 구원,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설교같기도 하고 신앙고백같기도 한 편지다. 사실 이미 남근을 잘린 아벨라르의 입장에서, 게다가 신앙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엘로이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초반엔 뻔뻔해 보이던 아벨라르의 나름의 고충이 읽혀졌다. 아무리 뛰어난 당대의 석학이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도 인간이기에 연약하고 언제라도 유혹에 쉽사리 넘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그도 정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아 투쟁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하지않을까 한다. 사랑의 편지 파트의 감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엘로이즈는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아벨라르는 그 감정들을 믿음,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자는 느낌이었다. 
 교도의 편지는 오늘의 카톨릭 상식에 비추어봐도 크게 벗어나거나 특이한 점은 없어 보인다. 다만 아벨라르는 유독 여성과 남성의 다름을 언급하며 각자 지켜야 할 규칙과 역할도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수도사와 수녀들이 같은 수도원에 머물면서 수녀원장이 수도사를 관할하는 일이 있었는데, 아벨라는 그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엘로이즈에게 그들의 문제를 신앙으로  극복하라는 권유에서도 역시 남여의 적용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듯했다. 엘로이즈의 교도의 편지 부분에서 '당신의 요구가 나에게 과하다'고 읽히기도 했다. 
 이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편지를 읽고 답신을 쓰면서 어떤 생각, 감정을 가졌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 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결국은 타인의 성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부합하여 이들의 이야기가 1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알려져 온건 아닌가 싶다. 다르게 말하면 이 둘은 지금까지도 본인들의 욕망의 벌을 아직도 받고 있는건 아닌가 한다. 내 사생활이 천 년 후에도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리 유쾌하지 않을거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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