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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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본,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은 2001년 9.11 사태가 있은 다음 해인 2002년에 쓰여졌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말한다. 실재의 사막을 그린 매트릭스는 1999.05.15일 개봉되었다. 모피어스(Morpheus) 즉 모르페우스는 꿈의 신들(오네이로이) 중 하나를 가리킨다. 현실(Reality)로 네오를 초대한 자가 '꿈의 신'의 이름을 가졌다니... 하지만 매트릭스에서 The Real(실재)이란 꿈보다 더한 악몽이며, 비록 네오가  꿈(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라는 가위에 눌리지만, 꿈을 꿈으로 인식하는 대오(大悟)의 끝에 네오는 초절정 무공의 고수로 거듭난다. 하지만 꿈 속에서 아무리 배가 터지게 먹었다고 해도 깨어나면 허기가 지는 것이 진짜 리얼이다. 불구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네오 일당이 끊임없이 꿈 속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싯점인 1999년, 가상 속에 내포된 현실을 매트릭스가 보여주었다면, 21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 9월 11일, 08:46분과 09:03분(KST로는 21:46과 10:03) 꺼먼 점과 같은 비행기 두 대가 각각 세계무역센터 빌딩의 북쪽 건물과 남쪽 건물을 들이받았고, 한시간이 조금 지나자 110층에 달하는 건물은 폭삭 주저앉았다.

지젝은 '실재의 사막...'라는 책에서, 이 사건 이후 미국의 주도로 자행된 '테러와의 전쟁'의 실체에 대해서 난해한(변증법적이라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해부를 해나가지만, 나에게 이 장면은 110층 높이로부터 그라운드 제로로 추락한 근대이성, 코기토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비행기 내부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테러리스트들의 칼에 난자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죽을 것이 뻔한데도 그를 무릎쓰고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승객들과 함께 가미가제식으로 돌진, 쾅! 한다는, 이성의 합리성에 입각한다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사건이 한번도 아닌 두번, 그리고 부록으로 워싱턴의 펜타곤까지 추돌하는 사태를 내 눈으로 목도한 후, 이성이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승객들과 조종사, 그리고 비행기와 승객의 안전은 물론 지상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하는 기장의 이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면도칼 하나에도 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나의 이성에 대한 목도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충격은 세계의 주축국인 미국의 권위가 핵도 총도 아니고 사소한 면도칼 하나에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바늘 한 개로도 어마어마한 덩치의 코끼리가 죽을 수 있다는 논리의 냉엄함을 9.11은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내 생각이 그친 그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즉 미국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들의 권위를 재구축하기 위해 벌인 것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고, 그 실체를 찾아가는 지젝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발라먹을 살이 십년이 지난 이 싯점에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감상이다.

지젝은 "어째서 세계무역센터의 재난이, 이를테면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투트시족의 후투족 대량학살 사건보다 조금이라도 더 특별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191)고 반문한다. 이들이 무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르완다의 투트시족이나. 후투족은 원조나 국제기구 혹은 미국이 개입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대로 죽일 수 있지만 대신에 신전에 제물로 바칠 수 조차 없는 가치없는 존재)에 속한다. 굶어죽으나 학살당하여 죽으나 매한가지인 값어치 없는 종족이라는 인식 탓인지도 모른다. 110층에 달하는 세계무역센터의 희생자들은 말끔한 슈트에 넥타이를 매고 근무를 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선봉, 후투족과는 달리 가족들과 함께 미국의 풍요와 행복,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끽하며 살아있어야 마땅한 '호모 아메리카노'였던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과거의 냉전과 같은 "주권 국가들끼리의 규제된 분쟁이라는 옛날 의미의 전쟁은 이제 없다"고 한다. 하나는 르완다나 발칸반도에서 보듯 "호모 사케르 그룹들 간의 투쟁으로, 이는 보편 인권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며, 진정한 전쟁으로 간주되지 않고 서구 세력의 '인도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개입이 요구"되거나, "미국이나 새로운 세계질서를 대표하는 다른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 경우 역시 진정한 전쟁이 아닌, '비합법적 전투원'들이 보편적 질서의 세력에 범죄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134)된다. 여기서 '비합법적인 전투원'이란 합법적이 아니기에 '관타나모에 수용된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미군의 잔혹 행위들'에서 보았듯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의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젝은 "힘을 내어, 도처에서 악을 지각하는 결백한 시선 그 자체에도 (역시) 惡이 존재한다는 헤겔의 유명한 격언을 이런 시선에 적용시켜야 한다."(81)고 촉구한다. 미국의 대테러 군사작전의 첫 번째 암호명 '무한한 정의'는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원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가차없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정확히 헤겔의 '惡 무한'에 해당하기에 그 정의상 결코 끝날 수 없고. 임무는 결코 완수될 수 없으며, 언제나 다른 테러의 위협이 존재할 것이다"(82)고 예단한다. 책이 쓰여진 지 십년 이상 흐르고, 빈 라덴이 사살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처형 당하고, 탈레반이 근거를 잃고,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무한한 정의'는 유효하며 광란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냉전시대에 적의 형상이 되어주었던 공산국가들이 붕괴한 이후 "9.11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야 이 상상력은 이슬람 근본주의자 그 자체인 오사마 빈 라덴의 이미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조직망 알카에다의 이미지를 구축해냄으로써 그 힘을 되찾게 되었다"(154)고 하며, "敵은 더 이상 '惡의 제국', 즉 영토를 점유한 또 다른 실체(국가나 국가들의 연합)가 아니라, ... 전 세계적 조직망"이라고 하며 "국가간의 관계를 조정해왔던 국제법이 종말을 맞이"(155)했다고 한다.

지젝은 20세기가 스너프 포르노 등으로 대변될 정도로 '사물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 갈망하던 목표를 직접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서도 "궁극적인 실재라는 괴물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외관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하며, 따라서 그 구성요소인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을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일 뿐"(49)이라고 한다. 늘 실패한 정권이 자신들의 존립 수단, 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공산주의', '테러리스트',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궁극적인 실재를 내세웠지만, 그 껍질을 벗겨보면 거기에는 뿔도, 날카로운 잇빨도, 빨갛게 피칠갑을 한 외양도 없었다. 공산주의니 빨갱이니 하는 성마른 목소리 그 자체야말로 가공스런 폭력이었고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힘이었던 것이다.

지젝은 또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유념해야 할 것은 존재existence의 반대가 비존재nonexistence가 아니라 존속insistence이라는 점이다"(38)고 한다.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했을 경우, 우리의 과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역사 속의 한장으로 기록되고 우리의 뇌리에선 사라진다.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경우,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존재nonexistence가 끊임없이 뇌리에 남아(insistence)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덮어버린 과거의 호명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준하 선생 사건처럼 날조된 채 썩고 있는 과거사의 진상들을 소상히 밝혀내야만, 우리는 왜곡된 망령들을 불러내 진정한 진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에서 '용산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에 이르기까지 낱낱히 말이다.

지젝은 자유당 시절부터 박정희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논리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테러와의 전쟁에 처해 전 세계적 위기상태라는 것이 오늘날의 수사법이며, 이는 법적인 권리와 다른 권리에 대한 중단을 점점 더 합법화하고 있지 않은가?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의 자유를 우리를 겨누는 무기로 사용한다"는 존 애쉬크로포트의 주장에서 불길한 부분은 물론 그 말의 명백한 암시적 결론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결론 말이다."(150) 바로 이것이 위기의 정체이며 유신으로 넘어가는 빌미이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 호(號)의 승객들을 구해냈다"는 전두환의 논리가 아니었던가?

미국이 은밀하게 고문을 하면서도 핵 테러에서 수백만명의 목숨를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하다며 "고문을 합법적인 논쟁거리로 만드는 일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선택의 배경을 뒤바꿔놓는다"(146)고 하며, 합법화될 경우 고문의 범위는 대 테러나 국가보위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납치한 부모를 고문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대부분의 고문 목적은 절체절명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적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거나 처벌하기 위해서 혹은 주민들에게 겁을 주어 복종시키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기 위한 거짓진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며, 이것이 바로 '남영동'이 5공 때 존재해야만 했던 진정한 이유다.

"법의 층위에서 우리는 시민이자 법적 주체로 취급받지만, 법의 외설적인 초자아적 보충물의 층위, 이 텅 빈 무조건적 법의 층위에서 우리는 호모 사케르로 취급받는다"고 지젝은 말하면서 "명백한 이데올로기적 규칙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그 밑에 깔린 외설적인 불문율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 볼 수 있는 것이다"(50)고 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 외설적인 측면이 오히려 더 보강되고 심화되는 것만 같다. 해방 이후, 제주 4.3사건에서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그 현장에 있었던 국민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유명을 달리한 전직 대통령의 사례를 보면, 법의 외설적 측면들이 어떻게 강화되고 있는가를 우리는 충분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수결이나 민주적 절차가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지젝은 준엄하게 말한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배한 이후 드골은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는데, 드골의 이런 제스처에는 '민주적 정당화'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민주적 정당화'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드골의 편이었고, 그는 실제로 프랑스를 대표하여, 프랑스 국민 '그 자체'를 대표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 사례 또한 우리가 궁극적인 민주주의적 비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도록 해준다... 1940년 프랑스의 사례가 (특히 잘) 보여주듯, 민주주의 그 자체는 그러한 보증을 제공해줄 수 없다. 과잉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212)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뽑힌 대통령이라고 해서 그의 행동과 결정이 반드시 국민 '그 자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드골의 예에서 보듯이, 진리와 정의야 말로 국민 '그 자체'를 대표한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뽑혔다고, 자신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때, 대통령의 뜻과 달리하는 국민들이야말로 모두 '호모 사케르'라고 하는 선언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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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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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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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전인 2013년 3월 21일~23일, 봄을 쫓아 담양 소쇄원을 지나 정암 조광조가 사사되었다고 하는 화순에서 일박을 한 후, 보길도로 건너갔다가 귀경하는 길에 해남 녹우당을 들렀다. 매화꽃은 피고 동백꽃이 툭툭 지는 길을 지나다 보니 그만 조선의 성리학, 더 나아가 고산과 그의 증손인 공제 윤두서의 외증손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경학의 흐름과 실학 중 중농학파의 자취를 더듬어 간 셈이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는 것을 소식을 들은 고산의 일가족은 '남쪽으로 튀어'를 감행하던 중 경치에 뿅가서 그만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세운 세연정이나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을 보았다. 삽질 규모를 감안할 때 엄청난 재원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 아니라 노역에 동원된 섬사람들에게 품삯이 제대로 지급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뇌리에 떠오른 의문을 해소해 줄 정보는 없다. 다만 고산의 가사문학이 어쩌고 저쩌고만 나올 뿐이다. 즉 나라는 난리가 났는데, 고산은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일가족은 잘들 놀았다는 이상의 정보는 부재했다. 이들이 잘 놀았다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죄없는 섬사람들은 뭔 난리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세연정이다, 동천석실이다 불려가설랑 품삯도 받지 못하고 삽질을 해댄 것은 아닐까?

이런 느낌이 들다보니 백성의 입장에서 윤선도 평생의 정적이라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며, 다산이 목민심서를 쓰는 등 자랑스런 선조라는데, 과연 그의 학문이 민중의 이용후생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시공간이 마련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미수에 그친 목민의 학문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도올 선생(후에 도올로 존칭 생략)은 "조선왕조는 귀족정치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다양한 장치들이 활성화되었다. 사림의 등장도 『맹자』라는 민본사상의 존중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의 정맥이 모두 『맹자』를 골격으로 한 것이다. 정암의 지치주의의 순결성, 그러니까 그의 정치적 좌절은 그의 이념을 도덕적으로 순선한 인간의 표상으로 이상화시켰고, 이러한 이상주의를 계승한 것이 바로 퇴계의 理의 능동적 자발성을 인정하는 특이한 성리학적 체계였다.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이 결국 맹학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203쪽)고 말한다.

여기의 민본사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맹자를 읽을 수 밖에 없다.

다른 번역서는 났두고 굳이 비싼 도올의 '맹자 사람의 길'을 읽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해석학적인 입장에서 맹자라는 서물이 탄생했던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재현하고, 맹자에 대한 각종 번역서와 관련서적을 바탕으로 번역의 권위를 확보하고 본증과 방증을 들어 해설해줌으로써 맹자에 대한 이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도올은 기대는 물론 간만에 고전을 읽는 재미를 주었다.

불구하고 '맹자 사람의 길'을 읽으면서 부딪힌 것은, 과유불급의 문제, 즉 맹자라는 서물의 선 이해를 돕고자 했던 도올 선생의 해설이 자신의 '논어한글역주'에서 "독자들이 나의 편견의 전제가 없이 『논어』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생각이 든다."(182쪽)고 한 것과 같았다. 때때로 고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떤 구절에서는 "좋지! 좋지?" 하고 노홍철 처럼 의미를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맹자 한편으로 춘추시대와 다른 전국시대의 정치, 군사, 과학, 문화와 당시의 제자백가들에 대해서 문화사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도올을 지나, 맹자라는 서물로 넘어가 보자. 맹자라는 책은 애매하다. 논어와 같이 제자들이 모아 편찬을 한 것도 아니고, 노자의 도덕경처럼 논문도 아니며, 장자처럼 우화집도 아니고, 대충 맹자 스스로 쓴 자서전인 것 같다. 자서전처럼 교묘한 구라가 또 어디있을 것이며, 어느 한 인간의 인격을 자서전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처럼 모호하고 시선이 흐려지는 것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논어를 읽으면 공자가 보이는 데, 맹자를 읽다보니,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더 생긴다. 그것은 자서전이 지닌 독특함 때문이 아닐까? 자서전은 대충 세인들의 오해(오해가 아니라 사실일 경우가 더 많음)에 대한 변명,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석연치 않은 해명, "너희들은 자잘한 고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이렇게 스케일이 크걸랑" 하는 침소봉대, 그리고 "청와대가서 대통령한테 삿대질을 해가며 무슨 소리를 한 줄 알아?" 등의 자랑질 등으로 도배된 것이 아닌가? 물론 이른바 아성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다 노가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맹자의 문장의 스케일도 크고, 민본이라는 그 이상도 대단하지만, 그것이 자기 이데올로기에서 생활과 실천에 이르르면 어떠했는가 하는 점에서 논어는 공자의 모습의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으나, 맹자에는 그 만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강렬한 향수냄새가 등청할 뿐이다.

"천하의 광거에 거하며, 천하의 정위에 입하며, 천하의 대도를 행하노라! 뜻을 얻으면 만천하의 백성들과 정도를 실천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라도 그 정도를 실천하노라! 부귀가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빈천이 그를 비굴하게 만들지 못하며, 위무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노라!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비로소 대장부라 하는 것이다."(346) 이 글을 보면서 이것이 대장부의 개념 규정인지 맹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도올의 맹자에 대한 극찬에도 불구하고 맹자적 폼생폼사와 민본이야말로 왕조체제인 조선이 후대로 내려가면서 훈구대신에서 신진사림으로 권력구조가 쉬프트되면서 신권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 왕권이 약화되고 결국 일제에 병탄되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맹자의 舜·啓·伊尹·공자 등등의 인물에 대한 이와같은 자의적인 해석과 날조가 후세에 과연 도움이 되었을까? 이러한 왜곡으로 도통이나 도학적 전통은 확립했을지 모르겠으나, 결국 실존에 바탕하지 않은 이들의 날조된 허구성이 결국 이 땅 조선의 위선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예교주의를 발아시킨 토양이되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맹자 사람의 길'에서 나는 전국시대의 문화사나 엿보았지 맹자의 사상의 신선함이나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책의 847쪽에 향원(鄕原)이 나온다. 향원은 공자가 극히 미워했다고 했는데, 향원이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위하여 여론에 영합하는 사람, 덕이 있다고 칭송을 받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며, 수령을 속이고 양민을 괴롭히던 토호,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면서 환곡이나 곡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따위의 일을 한다고 되어 있는데, 조선의 양반이란 좋건 나쁘건 민본을 한답시며 자신들은 병역을 기피하고, 향리들과 결탁하여 천석, 만석, 대규모 장원경제를 운영하면서도 세금은 한푼도 아니내는 것이 양반, 즉 선비라며 단물만 빨아먹는 민본, 즉 향원이 되어버린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봄을 찾아 나선 남도의 여행 끝에 나는 향원의 흔적만 엿보고 왔지만, 돌아와 자료를 뒤적이던 중 송시열과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던 윤휴라는 잊혀진 거유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스승인 성호 이익의 스승이지만, 송시열이 사문난적(요즘의 빨갱이에 해당)으로 모는 바람에 결국 역적의 버금가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우리가 실학자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성리학을 하는 유학자일 수 밖에 없던 성호 이익은 사문난적의 제자라는 오명을 짊어지고 갈 수 없었기에 결국 자신이 모셨던 스승 중 윤휴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고산 윤선도와 미수 허목의 제자일 뿐이라고 한다.  

윤휴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절대시하는 주희를 자신과 대등한 학자라고 보았다. 그는 주희의 사서에 대한 집주의 맹신에서 벗어나 주희나 주돈이, 이정 형제 등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새롭게 경전을 해석하려는 방향을 취했다는데 있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의 오류를 찾아낸 자신에게 반발하는 송시열 등에게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라고 한다. 송시열은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한다. 그에 따라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결국 사약을 받기에 이르지만, 후일 제자들인 성호와 다산 등에 의하여 주자의 사서에 대한 해석이 비판받기에 이르름은 물론 청대 고증학의 흥륭으로 인하여 청의 학자 염약거는 주희가 학문의 방법론으로 삼았던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핵심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은미하나니 오로지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수 있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상서의 대우모에 나오는 구절이 매색의 위고문임이 밝혀지고 주자의 방법론 자체가 거짓에 기반하는 만큼 주자의 학문의 권위가 실추되는 사테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윤휴의 제자의 한참 제자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통해 주자가 분명 매색의 위고문에 기초하여 자신의 학문을 펼쳤으되, 어찌 학자로서의 그 업적이 어그러지겠느냐고 주자를 옹호한다. 즉 그의 스승의 한참 스승은 주희 때문에 독배를 마셨지만 그는 오히려 주희를 변론하는 아이러니에 처하고 만다. 

이러한 송시열의 주자에 대한 원리주의적 맹신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교수(목사)가 "성경의 기록은 성령이 기록자에게 하나하나 일러준만큼(축자영감설), 성경의 일자일획도 그른 것이 없다는 성경무오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하여 박형룡 박사는 김 교수를 자유주의신학 옹호자라고 비난한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한국의 보수정통주의 핵심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고 응수한다. 박형룡은 장로교 칼뱅주의와 청교도적 경건주의가 서구 계몽정신의 격류를 헤쳐나오는 동안 형성된 보수 정통신학임을 대변하며 비판적 성경연구 태도나 역사주의 및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 기독교 진리는 뿌리까지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국 김재준 목사는 장로교 목사직에서 파면을 당한다. 그래서 한국기독교 장로회와 한신대학교를 세우며 분립함에 따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대한예수교장로회(기장)로 갈라지게 된다.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장로회는 복음의 자유정신, 신앙양심의 자유 존중, 우상타파, 사회윤리적 책임의식, 성서의 비판적 연구 수용 등을 주도했고,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예언자적 저항 운동의 기반이 된 반면, 예수교 장로회는 원리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의 개신교가 보수화, 우경화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보수화, 우경화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원리주의적인 폐쇄성으로 말미암아 신 앞에 개방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신앙이 축자영감설이란 재갈에 물리고 이교도외 이단을 가르는 각종 신앙고백과 사도신경에 입각함에 따라 사랑해야 할 이웃을 적으로 만들고 개신교야 말로 배타적이고 비관용적인 종교로 자리매김 했을 뿐 아니라 적대의 정도를 심화시켜가고 있다.

결국 맹자의 민본사상에 기반하여 개국한 조선조는 결국 사민(사농공상)이 근본이 아니라, 선비(士) 만이 민(백성)이자, 본(근본)이 되었고, 이들 양반이라는 것들은 왕이라도 양반과 선비와 사림의 뜻에 반할 경우,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늘 왕을 위협해 나갔던 것이다. 즉 민본은 간 곳 없고, 천하지대본인 양반의 무소불위한 권력 만 파르라니 남았던 것 아닌가? 오늘날 사랑의 복음이 자신들의 믿음의 원리와 가치를 위하여 사랑을 포기한 것처럼...

맹자는 사서에 낄 만한 서물이 못되는 것 같으며, 맹자가 과연 조선 역사에 긍정적이었는가 또한 엄밀하게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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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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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듣지 못하고 읽었다. 동양고전을, 서양의 존재론적 시각에 물들어있는 우리에게, 피차상대(彼此相待)의 관계론적인 입장에서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가르침은 분명 지식을 넘어서고 있다. 어떤 면에서 지식 그 자체가 보편을 함유하고 관념화되고 존재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식을 배우고(얻고) 기억(축적)해야 하는 사물(존재)처럼 받아들였고 그런 식으로 배워왔다. 선생님께서는 단지 그것 만이 아니라고 하신다. 앎이란 아름다움이며, 그 아름다움은 사람과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서로 알고 알아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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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글들이다. 반면 지젝의 현란한 수사학과 방대한 지적 유희를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인데, 번역마저 어렵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읽어본 결과, 이 책만큼 어렵지 않다. 원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번역의 문제인 것 같다. 번역된 글이 어렵다는 것은 번역가의 역량 뿐 아니라, 책이 갖추어야 할 품질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는 우리 출판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14,000원을 주고 책을 샀는데, 번역 때문에 70% 밖에 이해를 못했다면 독자는 4,200원 만큼 손해다. 뿐만 아니라, 난삽한 글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많은 독자들이 소모하는 시간과 정력을 감안한다면, 불성실한 번역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독자에게 제공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거의 매국에 준한다. 게다가 독자는 이해되지 않는 글을 놓고 자신의 IQ가 모자르거나 가방끈 길이가 짧다는 자괴감 끝에 우울증을 겪게 되거나, 원저자인 지젝에게 "왜 이따위로 글을 쓰는 것이냐"고 쌍시옷을 남발하며 분통을 터트리게 되는데, 만약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사회의 불안을 조성한다고 '지하철 공포남'이라는 동영상이 배포되고 대대적인 신상털기가 시작되어 급기야 대인기피증이 생기게 된다면 출판사나 번역자가 책임을 질 것인지 모르겠다.

출판계는 고급+호화+양장본(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하드보드가 아닌 페이퍼 백을 좋아한다) 등 외형 중심의 고가 전략은 추구하면서도, 책의 실질적인 면, 양질의 번역, 책의 내용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한권 짜리 책을 두권 세권으로 뻥튀기하는 등의 얍상한 짓거리나 한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책값이야말로 OECD 국가 중 대학등록금이 두번째로 비싸다는 것이 서러울 정도로 비싸다. 이렇게 난삽한 번역본을, 엄청난 가격(248면에 14.000원: 장당 106원)에 판다. 상품가치 측면에서 볼 때, 책은 싸거나, 내용이 풍부하거나, 재미있거나, 쉽거나, 배울 것이 많아야 산다. 이런 구색은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맛없는 풀빵을 팔면서 손님들이 사 먹지 않는다고 지랄하는 것과 같다.

형편없는 번역과 고상한 책값에도 불구하고 슬라보예 지젝은 재미있고, 배울거리가 있으며, 시대에 대한 날선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좀더 읽기 쉽고 싸게 시장에 내놓는다면 상품성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양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반값 등록금과 함께 반값 책값 투쟁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반값 등록금은 4년이지만 반값 책값은 평생에 걸치며 국민 전반에 걸친 건전한 교양은 물론 백년 천년갈 국가의 풍요로운 지적 토양을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난해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따라 지젝의 생각을 더듬어가다 보면 전세계의 총체적 상황 속에서 2011년에 분출되어 나온 사건(아랍의 봄, 월가점령 시위...)들이 현대 자본주의가 적대시하는 핵심 아젠다들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재벌 및 정치권력과 (기독교/뉴라이트/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들이 결탁하여 '소고기 반대 촛불시위'에서부터 '용산참사'를 지나 '미네르바 사건', '천안함 사태' 등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와 빈부격차·인권·환경·교육·복지 전반의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건전한 진보로 인정하지 못하고, 빨갱이 혹은 종북으로 매도해야만 하는 음산한 내막을 알려준다. 나치가 '반유대주의'를 사용한 반면, 우리는 '빨갱이', '종북세력'을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의 방패로 활용해 왔다. 지젝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들에 대하여『지배 이데올로기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중요성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지배적인 반응이야말로 「와 남 니하단」(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었던가?』(p20)하고 묻는다.·

빨갱이나 종북논란(Bvalgangism)과 관련하여, 국가나 사회 내의『계급적대를 부인하고 전체를 대표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방법은, 그 적대의 원인을 그 자체로 사회를 위협하는 반사회적인 요인이자 사회에서 배설된 과잉의 상징인 외국인 불청객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우리는 Bvalgangism)는 ... 그 자체로 본원적 이데올로기"(p56)라며, 1930년대에 히틀러가 실업 등 모든 문제의 배후로『유대인의 음모를 환기하자 (독일 국민들에게) 단순한 인식적 지도가 제공되어 모든 상황이 분명해졌다』(p76)고 한다. 박정희 시절의 인혁당, 민청학련 등 숱한 공안사건들은, 유신철폐 등 독재에 대한 민중의 반대에 직면하자, 조작한 시국사건들로 빨갱이라는 논리로 도배되어 있다. 연루된 자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깃들지 못하고, 북한의 지령에 입각하여, 체제 전복을 도모하고,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법의 이름 아래 날조된 사실들로 점철되어 있다. 체제 내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다수의 선량한 우리와 달리 이들은 이질적이므로 불온한 세력이라는 것이다. 불온한 만큼, 체제의 안정(각하의 심기)을 위해서 불문곡직 총살도 불사해야 한다는 사법부의 졸렬한 판단도 함께 했다.

2012년 대선과 관련해서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는 진보진영과 민주통합당의 대연합에도 불구하고, 안철수의 지원이 2% 모자랐다는 점은 있지만, 문재인이 왜 졌는가 하는 질문에 "대운이 아니었다", "민심을 읽지 못했다" 등이 아닌 꽤 복잡하지만 그럴듯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문재인씨가 제공하는 아젠다 측면에서는 도시의 한쪽 구석의 공원이나 전전하는 돈 없는 어버이들이나 저소득층의 교육과 분배, FTA와 농촌문제 등에서 공화당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유리함에도 저소득층과 중노년층, 농어촌에서 표를 얻지 못했다. 자신들이 아닌 재벌이나 자본과 놀아나겠다는 여당에 표를 몰아준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지젝은 지배계급은 경제적 계급대립을 도덕적 문제로 자리를 바꿈으로써,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고, 하층계급의 분노에 불을 지필 수 있다고 한다. 지젝은 문화전쟁이 곧 전치된 양식의 계급전쟁이라며, 문화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첫째, 양 진영이 있어야 하는데『문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보수 기독교)에 저항하고 다문화적 관용을 옹호하는 데 정치를 집중하는 계몽된 자유주의자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제』(p72)라고 한다. 분명 문재인을 지지했던 조국, 이외수, 나꼼수, 심지어 윤여준 등은 문화를 대변하고 보수(기득권층이 아닌 하층계급)는 그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다문화적 관용과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이들의 싸움은 '하층계급'의 이른바 비관용, 근본주의, 성차별주의와 대척점에 설 때가 많다.』(p73) (예로 들어서 미안하지만) 조국 교수의 가방끈 길이는 이들을 재수없게 했고 무조건적인 반대 기류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반면 조실부모하고 어린 동생을 둘씩이나 먹여살려야 했던 나이든 소녀 가장은 가난한 서민들의 눈시울을 적시는 심파로 다가왔던 것이다. 셋째, 문화는『차이를 인정하고 적대를 공존으로 바꾸려는 논리』를 따르는 반면, 보수는 계급투쟁의 목적인 적대의 논리를 계속함으로써 결국『빨갱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막간다는 것이다. 즉 Gabangknism과 Namoosickism의 대립은 결국 Bvalgangism으로 귀착되고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하는 감정에 충실하다보면, 자신의 이익이고 자시고 간에 공화당(새누리당)을 찍게 되고, 부자감세는 (농어촌이나 저소득층인) 자신들에게 제공될 예산을 삭감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미국산 농수산물이 '이마트" 등을 통하여 물밀듯 들어와 농어촌 경제의 붕괴를 자초하고 거대 유통재벌의 배만 잔뜩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전치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강남 좌파라고 한 조국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의 주구, 돌아온 탕자, 강남 우파의 선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지젝은 이런 논리의 배면에『직접적인 사회 이데올로기적 폭력보다 훨씬 더 섬뜩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이 자리잡고 있다. 이 폭력은 더 이상 개인이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이다. ... 현실은 실제 인간들이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회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현상이나 사태가 나을 것 같다)을 결정하는 자본의 냉혹하고 '추상적'이며 유령같은 논리』(p185)라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순수하고 체계적이며 익명적인 자본의 폭력은 돈없고, 빽없는 용산의 세입자나 쌍용차 및 한진 중공업의 해고근로자에게 향하고 있는 공권력에서 확인된다. 자본이라는 치명적인 악령의 논리 속에서 제 3세계는 굶어 죽고, 생태계는 파괴되어 이상기후가 지구를 뒤덮고 해수면이 안방까지 차오르는데, 미국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지젝은 1971년에 있었던 닉슨의 '금본위제 포기'를 미국 정부가 적자와 씨름하는 대신, 적자를 늘리기로 한 결정이며,『끊임없이 몰려오는 자본을 영속적으로 이전시켜 미국의 적자를 처리할 재원을 마련하면 된다.』(p45)고 적자의 책임을 여타세계로 전가하는 반면, 자신들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받고 있기 때문에『전세계 국가들이 미국에 잉여 수익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p47)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요인에 기인하는 만큼 미국은 만만한 나라를 골라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준비된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사태들을 촉발한 자본주의를 놓고 지젝은 우리의 반자본주의 정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한다.『이렇게 도를 넘는 (자본의) 행위에 맞서 싸울 방법이 민주적 자유주의 틀이라는 원칙만은 가차없다 싶을 정도로 당연시된다』(p161)고 지적한다. 그는『실제 자유의 핵심은 (자유선거, 언론의 자유 등 정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인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다.『우리가 소유구조나 직장 내 관계 등을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 것은 그 문제들이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며 민주주의『그 자체가 자본주의 재생산의 원활한 가동을 보장하는 '부르주와' 국가 장치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p162)고 준엄하게 경고한다.

멈춰서 생각해 볼 것들!

『중동 협상 역시 평화의 문제가 관건이 아니다. '평화협상'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p80)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초콜릿은 좋지만 무지방...콜라는 좋지만 다이어트 콜라...마요네즈도 좋지만 콜레스테롤이 없어야...섹스도 좋지만 안전한 섹스...』(P098)라는 계몽된 소비주의적 쾌락주의는 향락은 용인되고 심지어 권유되지만, 우리의 정신적·생물학적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 건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붙는다. 이로 인하여 자본은 신제품을 판매할 영역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헤이스 규약은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춰 성적·사회적 규약을 강요했지만, 새로운 윤리학은 건강에 초점을 둔다. 이제는 우리의 건강과 복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악인 것이다.』(P103) 이로 인하여 흡연만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마치 빨갱이만 처단한다면 어떤 나쁜 짓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지젝은『그렇다면 유럽연합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가? 물론 여기서 진짜 질문은 '대체 어떠한 유럽연합을 말하는가?'일 것이다.』(p90)고 묻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가? 그런데 도대체 어떤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인가?"

PS: 별다섯을 주어야 하나 별셋을 준 이유는 너무 고생스럽게 이 책을 읽게 만들어 준 번역자의 탓이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영문으로 읽어보고 싶도록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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