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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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La vie devant soi


<자기 앞의 生>, 이 책은 중2인 딸내미의 논술공부와 관련된 책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쥐스킨트의 <향수>도 논술과 관련한 교재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딸내미는 14살이다. <자기 앞의 생>은 배달되어 오자마자 내가 읽었으니까, 딸아이가 아직 읽기 전이지만, <향수>는 1/3만 읽었는데, 그 내용도 잘 모르겠고 지루했다고 한다.

나는 논술학원에 정중하게 편지를 한 장 쓰려고 하는 중이다. ‘젊잖다“라고로 대변되는 <조숙성>에 대한 끊임없는 우리 사회의 요구가, 아이들로부터 문학과 예술에 대한 흥미와 재미, 열정과 같은 것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14살의 딸아이에게는 더도 덜도 말고 14살의 자기 앞의 생에 알맞은 책이 필요하다.

사실 14살 먹은 청소년한테, 적절한 책은 없는 법이다. 책이란 늘 14살보다 훨씬 나이든 사람들이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14살에게 하이틴의 이해력을 요구하기도 무리다.

그래서 자신을 10살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14살짜리 모모(모하메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자기 앞의 생>은 14살에게 아주 적절한 책이라고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쥐스킨트의 <향수>에 비하여 이 책은 몹시 까다로운 책이다. 쥐스킨트의 <향수>는 코엘류류의 동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동화적 요소는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처럼, 아니 독일인이 좋아하는 초월, 절대, 유미적인 요소들로 채색되어 있어서, 글의 경계가 뚜렷하며, 화려하다. 그러나 에밀 아자르(그는 로맹가리라는 소설가이기도 하다)의 <자기 앞의 생>은 무채색의 소설이다.

본래 삶(생)이라는 것은, 특히 빈민가의 골목에서 자전적으로 쓰여진 삶은 너무나 많은 지저분한 냄새들로 길들여져 더 이상 자신의 체취를 맡을 수 없는 것처럼, 그늘이 깊어 그 색을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의 아파트에, 창녀들이 맡겨 논 어린 아이들과 창녀를 하다가 늙어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늙은 여자의 이야기라면, 삶이란 것은 없을 수도 있다.

이 책 또한 <호밀밭 파수꾼>이나 <프랑스적인 삶>처럼 지루한 수다를 만난다. 그러나 주인공 모하메드는 엄마와 아버지도 없고 자신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차 모른다. 호밀밭...이나, 프랑스적...의 수다에서 만나는 것은, 삶은 너무 흔하고 가벼운 것이라서, 폐기되어야 하거나 경멸의 대상이라면, 자기 앞...에서 生에서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엉덩이로 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사랑과 믿음을 조금씩 덜어가며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보여준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천박한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살 냄새와 온갖 잡탕들이 섞여 더 이상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는지 미워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정>이라고 하자.

에밀 아자르는 우리가 경멸하는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보잘 것은 없으나 아주 존귀한 삶의 모습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런 글을 읽어본 지는 아주 오래된 것 같다. 아자르의 글은 그러니까 빈민이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서 영웅을 그려내는 까뮈적인 전통과 이어져 있다.

<자기 앞의 생>이란 열 살인 줄 알고 있던 열네살 짜리 모하메드라는 갈보의 자식의 위대한 영웅담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에밀 아자르의 전신인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멋진 제목의 단편집을 샀다. 하지만 열네살 짜리 내 딸아이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다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딸이 자기 눈높이에서 자신 나름대로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내 딸이 아직은 인생의 의미 따위에 신경을 쓰기 보다 즐겁게 독서하기를 바란다. <자기 앞의 생>은 주인공이 열넷이거나 팔십을 먹은 노인이건 간에 아주 나이든 소설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학동네에서 펴낸 자기 앞의 生(La vie devant soi)에는 부록으로 로맹가리가 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왜 자신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네편의 소설을 썼는가에 대한 구질한 글이 있다. 그러나 내가 에밀 아자르나 로맹가리나 금시초문의 불란서 작가라는 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뒈지다>를 읽어본 후에 다시 한번 읽어볼 만한 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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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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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아득한 것들을 불러서 눈앞으로 끌어오는 목관악기같은 언어를 나는 소망하였다.
써야 할 것과 쓸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나는 오랫동안 겉돌고 헤매었다.
그 격절과 차단을 나는 쉽사리 건너갈 수 없었다.
이제 말로써 호명하거나 소환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을 터이고,
나의 가용어(可用語) 사전은 날마다 얇아져 간다.

후략......

연재를 앞둔 떨리는 마음으로
2009년 4월 27일
김훈은 쓰다.


김훈 씨의 인터넷 연재소설 <공무도하>를 다 읽었다. 앞에 읽은 것은 까먹어가며 시간이 나는대로 몇일을 쉬다 읽고, 보름을 쉬다 읽다보니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공무도하가

公無渡河    저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가신 님을 어이할꼬

(번역 : 정병욱)

어느 늙고 술 취한 사내가 강을 건너려 한다. 아내는 그를 말리지만, 강을 건넜고 마침내 빠져 죽는다. 그 아내는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부른 후 강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배를 젖던 곽의 사람 고는 이를 보고 아내에게 전한다. 아내 여옥은 이를 슬퍼하며 그 노래를 전했다고 한다.

이 노래가 고조선의 노래라면, 최표가 살던 시대에 비하여 몇백년 전, 아득히 먼 땅의 노래다. 그리고 망자에게 바치는 노래를 고가 듣고, 아내에게 전하여 그녀가 노래한 후, 전하고 전하여 멀리 이역 중국의 최표에게 전해져 중국의 글로 바뀐다. 그 후 다시 이 땅으로 역수입되어 사건 발생 이천몇백년 쯤 지나 우리 글로 다시 살아난 노래다.

그러니 술에 취하여 강을 건너는 자의 심사도, 함께 뛰어든 아내의 슬픔의 내력도 세월의 흐름에 떠내려가 알 수 없다. 배를 젖던 고가 물에 빠진 그들을 구할 생각은 않고 왜 바라보기만 했는지 또한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이 노래는 한국 여성의 애상을 절창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국어시간에 가르친다. 하지만 저 노래가 정병욱씨가 번역한 것처럼 슬픈 것일까?

무식한 내가 번역해보면, <당신은 강을 건널 수 없다/당신은 기어코 강을 건넌다/강에 빠져 죽었다/이제 당신을 어찌할까>이다.

슬프지 않다. 그저 사실일 뿐이다.

김훈의 공무도하

김훈의 공무도하는 기록의 형태로 쓰려 한 소설이다. 아무런 애상을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심사로 그는 글을 기록한다. 무대는 물난리가 난 창야와 공유수면매립을 둘러 싼 해망이라는 마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소설에는 알아낸 사건을 기사화하지 않고 묻어두는 기자, 동료를 배신한 학생운동가, 화재의 현장에서 장물을 취득한 후 퇴직한 소방수, 딸의 목숨을 돈과 바꾼 농사꾼, 베트남에서 시집와서 가출한 여인, 자식을 위하여 먼 곳으로 돈을 벌러왔다가 그만 자식을 잃은 여인 등, 강을 건너려다 그만 표류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하지만 그들은 백수광부처럼 익사하지 않는다. 그냥 살아가지만 표류한다.

김훈은 이들을 통하여 이 시절의 탁류를 그려내고, 그 탁류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의 고향을 등지고 있으며, 그 탁류 속에서 사람들이 표류하는 모습을 허무한 눈으로 기록한다.

소설에 내면의 묘사는 없다.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비평도 없다. 전직 기자였던 그는 소설임에도 사실 만 말한다. 그 사실은 신문기사처럼 간명하고 뚜렷하다.

공무도하가에서의 사실을 우리가 한국 여인의 애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듯, 그의 소설을 읽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던지 김훈은 관여치 않으려는 것 같다.

쓰기를 마치고

그래서 김훈은 인터넷 연재를 마치면서 이렇게 마감한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나는 왜 이러한가. 이번 일을 하면서 심한 자기 혐오에 시달렸다.
쓰기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 남은 시간은 흩어지는데,
나여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2009년 가을에
김훈 쓰다.


참고> 공무도하가의 조선으로의 반입되어 변형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 해동역사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 - 대동시선
公無渡河 公而渡河 公墮而死 將奈公何 - 청구시초
公無渡河 公終渡河 公淹而死 當奈公何 - 연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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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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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은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한 해는 발자크의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했건만 지금은 발자크의 소설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읽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꿈꾸던 세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란 언어가 형성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보고, 듣고 한 것들이 언어로 추상화(단순화)되어야 기억할 수 있다. 매 순간마다 쏟아져들어오는 감각의 엄청난 데이타를 우리의 뇌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순간의 경험들은 언어라는 기호로 환원되고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발자크의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란 어리석게도 그의 소설들을 읽을 당시 몇권의 책을 동시에 읽곤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 속에 든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저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아침에 읽은 글 중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나를 괴롭혔다. 이 책 저 책을 넘나들면서 책을 읽었지만, 결국 나는 한권의 책도 온전히 읽지 못한 셈이다.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 기억할 필요란 없다. 세상에서 자신 스스로 경험한 것도 까맣게 잊는 판국에, 종이쪼가리 속에 쓰인 것들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카잔차키스의 경우는 다르다. 그의 책을 나는 천천히 읽었고, 상당한 감동을 받곤 했지만, 나는 무슨 글을 읽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이 언어로 저장된다고 할 때, 그의 글들을 기억 속에 가둬두기에는 나의 언어가 너무 엉성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카잔차키스의 글이 발음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인 조르바' 또한 조만간 잊혀지고 말 것이라는 느낌이다.

살아오는 동안 조르바적인 사람들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분별한 열정 때문에 거친 그들의 태도와 앞날에 대한 걱정없이 오늘만 살아가는 몰지각함을 차마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위험할 뿐 아니라, 비루하여 보살필 것조차 없는 내 인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그들을 애써 외면해왔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처의 신화와 예수의 신화에 길들여져 성스러운 사람들의 모습과 태도는 정적과 묵상속에 깃들어 있으리라는 그릇된 관념이, 배가 고파 밥을 먹고, 슬퍼서 눈물 흘리며, 기뻐서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조르바처럼 격정에 넘친 삶이야말로 진정한 방식이라는 것을, 겸허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와 예수의 우상을 쳐부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카잔차키스 또한 조르바와 함께 하면서도, 그의 덕성에 대하여 직면할 수 없었던 것은 완벽했던 최초의 인간이었던 부처에 대한 관념이, 자신 앞에 실존했던 인간 조르바를 늘 부정하고 비판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애인 앞에서는 여러가지를 생각하느라 정작 사랑하지 못했으면서도, 헤어진 후 진정한 사랑이었노라고 말하는 어리석음처럼, 카잔차키스 또한 조르바와 있을 때는 그와 함께 하지 못했으면서도 정작 헤어지고 난 후 조르바를 생각하며 그가 진정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카잔차키스는 왜 조르바 앞에 '그리스인'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을까? 그냥 조르바이거나 인간 조르바라고 하지 못하고 '그리스인'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찌질한 수식어를 써야 했을까? '중국인' 공자는 말이 되도, 인도인 부처나 유태인 예수는 어울리지 않는다.

카잔차키스의 글에서 느꼈던 것은 그와 같은 갈증이다. 성과 속의 변경에서 늘 서성대던,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으로 속됨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결국 성스러움을 알 수 없었던 한 인간을, 나는 그의 글에서 늘 발견하곤 했던 것이 아닐까?

카잔차키스의 글은 '메토이소노', 즉 '거룩하게 되기'를 이해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기란, 그릇된 관념, '거룩'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룩 또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며, 외식(外飾)과 같은 거룩을 전제로 할 때, 조르바적인 삶의 진지함은 거룩 앞에서 속물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삶이, 밥그릇이 속되고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한, 우리는 聖스러워질 수 없는 것이다. 聖스러움은 결국 삶 속에 깃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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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뿌리깊은 나무>를 사려고 했다. 한글창제와 관련한 살인에 대한 추리소설인 뿌리깊은 나무는 없고, 정조 독살 사건 같은 책 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프랑스적인 삶>을 샀다. 요즘은 영화 뿐 아니라, 소설도  우리 것이 더 낫다.

<프랑스적인 삶>을 감싸고 있는 간지에는 <이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사람들은 단번에 사로잡히고, 손톱을 물어뜯고, 손수건을 준비한다. - 브와시>라고 쓰여 있다. 아마 브와시라는 작자는 <밝은 세상>이라는 출판사가 날조한 인물이며, 이 문구도 이 말을 믿고 책을 살 몇 명의 멍청이를 위하여 쓴 얄팍한 사기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손톱을 깨물고 눈물을 흘린다면, 감수성이 비정상적이거나, 특정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에 툴림없다.

이 책에서 무덤덤한 어조로 레고 블록인지, 블릭인가 하는 사람(놈)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특이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이지만, 이 놈의 삶은 프랑스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적이라는 점에서 일단은 보편성이 있다. 그만큼 놈의 삶이 생소하지는 않다.

늘 아버지의 세대는 힘이 들고 애환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견고한  도덕율에 닻을 내리고, 가족과 자식에 대한 뚜렷한 애정에서 발원한 헌신으로 우뚝한 탓에, 우리의 세대처럼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지 않고 견고하다. 하지만 자식들인 우리들이 맞이하는 세계는 허무하고 난잡하여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위구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프랑스적인 삶이란, 정체성을 잃은 이 세대가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며, 어중간한 자신의 현실을 토로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이십세기처럼 대량으로 생산되고,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다량으로 공급된 적은 없었다. 특히 이 책의 중간에 나오는 1968년은 이십세기 후반을 규정 짖는 시기였으며, 그 후로 우리는 모든 가치에 대하여 충분히 회의할 수 있는 시간들을 향유했다.

시간적으로 선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을 통하여 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성의 가치를 처절하게 인식하기 시작하자, 성은 무한하게 생산되어 값싸게 거래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걸쳐서 중산층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돈, 즉 밥그릇에 대한 인식은 노동권의 신장과 함께 그저 그런 것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돈은 낭비되어야 하는 이념이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국가나 정당, 정치라는 이념적이거나 아니면 야바위적인 것들은, 학생운동과 함께 히피적인 요소들이 혼효되고, 반전과 환경 등의 문제와 함께 하면서, 귀찮거나 없어져야 할 사악한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윤리와 도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거나 삶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보다, 바이러스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그때가 이십세기의 후반이며, 아직까지도 이십세기 후반적인 사고는 유효하다.

장 폴 뒤부아(Jean_paul Dubois: 1950~)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때부터 수음이나 즐기고, 68년 학생운동 덕에 어슬렁거리며 대학에 들어갔고, 평생동안 제대로 된 직업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주인공 블릭을 통하여 프랑스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샤를 드골에서부터 자크 시라크 정부에 이르기까지 연대기적으로 그린다.

이 친구는 친구의 엄마든 장모든 여자의 엉덩이만 보면, 어떻게 흘레를 붙어볼 수 없을까 하는 몽상을 하는 놈이면서도, 투표란 것은 한번도 해 본 적도 없다. 늘 룸펜으로 살면서 할 일이 없어서 찍은 사진으로 해서 책을 내게 되고, 떼돈을 벌었지만, 그 돈으로 집을 산다거나, 좋은 차를 개비할 생각조차 귀찮은 친구다. 그러니까 욕구는 넘쳐나되, 욕망은 없다. 돈 많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을 하는 행운을 얻었지만, 오히려 장인의 회사를 때려치우고 애들이나 보면서 이웃집 여자와 그 짓거리(?)를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커녕, 자신의 와이프도 딴 놈과 그 짓거리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백수로서의 상당한 내공을 소유한 놈이다.

이런 블릭의 삶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프랑스에도, 한국에도, 중국과 미국 기타 등등 세계 각지의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다. 성에 대한 윤리적인 갈등은 사라지고, 어떻게 하면 짜릿하게 즐길 것이냐 하는 문제들로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대낮에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삶은 예전에 비하여 형편없이 골치가 아프지만, 그렇다고 이 놈의 삶을 고쳐나갈 길은 막연한 만큼 그냥 저냥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자식 때가 되면 그들의 삶이 희망적이라고 계산할 근거는 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 만큼, 저들의 삶은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며, 가족이라는 집요한 혈연도 의혹에 늘 휩싸여 있는 것이다.

결국 블릭은 아내가 죽으면서 아내에게 정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내가 운영하던 회사의 파산으로 빚을 다 떠안은 채, 좌초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좌초로부터 변태적인 프랑스적인 삶도 희망을 걸러낼 수 있다는 것을 작가 장 폴 뒤브아는 애써 강조하려는 듯 보인다.

블릭의 딸은 엄마의 죽음을 맞이하는 불운에 더하여, 엄마가 어떤 놈팽이와 놀아났다는 것을 알아서 인지, 그만 우울증에 빠져들고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블릭은 정원사 노릇을 하면서 얼마간의 돈을 벌면서, 돈의 필요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고, 정신병원에 있는 딸아이를 데리고 오래전 외할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 위로 올라가 딸아이를 포옹하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난다.

장 폴 뒤브아의 책은 어떠한 문학적인 수사도 없이 건조한 수다를 떨어가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직면한 것들, 절실하지 못한 삶의 파편들과 자신을 헤아려볼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으로 성에 도착되어 있는 현대에 대하여 그려나가고 있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 르포르타주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추구해야 할 이념이나, 사랑, 우정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떠한 정언적 명법도 없고, 부모를 포함하여, 관련된 모든 사람에 대한 싸늘하고도 야비한 평가만이 남는 이 소설은, 삶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냉소적인 시각에서 잘 그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소설이 좋다고 해야 하는 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 데, 그런 상은 불란서 친구들은 알지 몰라도 나는 금시초문이다. 이 책의 껍떼기를 둘러싼 각종의 서평을 보면,

『프랑스적인 삶』은 바로 우리의 책! (리베라시옹) --- 어느 싸가지 없는 일본 놈들이 이 책을 가지고 자기네 책이라고 그랬니?

한 프랑스인의 욕망과 이상을 통해 한국인의 삶을 더불어 반추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 (조선일보) --- 욕구는 있어도 욕망과 이상은 없다니까, 조선일보, 너희 딴 책 읽고 이 글 썼지?

『프랑스적인 삶』은 한없이 위대하고 한없이 작은 이야기다. 유머와 비극 사이를 오고 가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입가에 슬그머니 공감의 미소가 떠오른다. (르 몽드) --- 그래도 그럴듯한 평가야! 그런데 블릭에겐 비극은 없더군.

보통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문제, 우리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문제, 이를테면 욕망·사랑·자기 정체성의 위기·늙어가는 것에 대한 고민·잃어버린 환상 등의 문제를 제기한 책. (피가로) --- 대충은 그런 책이지, 맞아!

뒤브아는 차례로 계속되는 프랑스 현대사의 색조를, 모순되는 그 감동을, 그 갈등을, 그 환멸을 생생하게 다시 일으켜 세운다. (텔레라마) --- 그런데 이 책이 무슨 역사소설 쯤 되냐?

『프랑스적인 삶』에는 생생하고 빠르고 짧고 단속적인 글쓰기가 있고, 행간 사이에 녹아든 유머, 메스를 들이대듯이 냉소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르 포앵) --- 논술고사 참고서란 말이지?

그러니까 책의 겁데기에 쓰여져 있는 노가리를 읽고 책을 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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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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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옮긴이(송의경)의 말의 맨 끝에 프랑스 아카데미 공쿠르 회장인 에드몽드 샤를루의 찬사인지 헌사가 실려있다.
"키냐르의 책 한권을 읽는 것은 다른 책 1000권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에드몽드가 말한 다른 책은 어떤 책인가는 별개로 쳐야 할 것이다.

책의 72쪽에 키냐르는 함정을 하나 파놓았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속아넘어 갈 그런 함정이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동화는 나의 비밀이다."
9~126쪽에 불과한 키냐르의 본문 중 72쪽에서 이 문구를 발견한 독자들은 멍청하게도, 키냐르의 비밀을 탐색하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남은 54쪽을 읽은 뒤, 다시 앞에서 부터 책을 읽는 등 키냐르의 비밀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공쿠르의 회장인 에드몽드도 비밀을 찾기 위하여 천번은 못되어도 골백번 쯤 읽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냐르의 비밀을 알아내서 어쩌려고? 본인 자신의 비밀이나 거짓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키냐르의 비밀을 알아서 뭐에 써먹을 것인가?

키냐르가 마치 언어학자처럼 파롤 등의 용어를 구사하는 만큼, 언어학으로 부터 프로이트 심리학을 재구성해나간 자크 라캉의 흉칙스런 괴물, 라멜라(lamella)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라캉은 아메바처럼 생긴 어떤 생명체처럼 그리지만, 인간의 심리 속에 그런 것이 들어있을리가 만무하다.

"라멜라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고집스럽게 자신을 주장할 뿐이다. 그것은 실재가 없이 순수한 허울 만 있는 것이며, 텅 빈 내부를 덮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로, 그 지위는 순전히 환영일 뿐"이라고 술라보에 지젝은 풀이한다.

그런데 '비밀'처럼 라멜라의 속성과 일치하는 것도 없다. 비밀은 그 비밀을 아는 순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비밀이라는 것이야말로 막강한 힘으로 있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비밀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비밀은 없고, 다양한 추측과 무성한 기대들로 뒤덮힌 허울이며 그럴듯한 환타지였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는 그 비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기억하는 그 키냐르의 비밀은 바로 '기록, 글쓰기'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수능과 토플 등 제도권의 시험들이 남긴 지독한 부작용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의 거의 대부분은, 무지 혹은 미지수로 남아있다.

거품이 잘이는 합성세제를 빨래감에 풀어넣듯, 키냐르는 "이 동화는 나의 비밀이다"라고 72쪽에 은근슬쩍 집어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의 상상력은 키냐르가 생각조차 못했던 허울(거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키냐르는 마치 동화를 풀이하는 에세이와 같은 '메두사에 관한 소론'을 통해서 하나의 허울(Fiction)의 가능성을 만들어 냈고, 비밀이 풀리지 않는 한 그 허울은 하염없이 자신을 주장하며 존속하며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는 이 책을 그럴 듯한 무엇, 청동거울과 그림자로 바라보아야 할 언어와 침묵에 대한 수상록으로 기억하게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도, 비밀이 아닌 동화 하나 쯤은 남겨야 할 것 같다.

한 이십년전 쯤 꿈 속에서 세상의 모든 진실이 담긴 16자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 16자를 잊지 않기 위해서 (꿈 속에서) 삼백년동안 외우고 또 외웠다. 하지만 깨어나자 단 한자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데 꿈과 현실을 넘나들 수 있는 '글쓰기'란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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