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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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홍콩에 출장을 갔다. 출장을 가는 내가 보아도 출장 갈 이유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시황이 이상하기 때문에 한번 가봐야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럴듯한 이유라고 할 수는 없었다.

출장 전날은 장인어른의 기일이라 제사를 마치고 처갓집에서 돌아왔을 때, 열두시였다. 잠이 부족했지만,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야 홍콩발 8시 45분 비행기를 탈 수 있다. 우리 집은 서울의 가장 동쪽이지만, 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노을이 끝나는 서울의 서쪽 너머로 아득하게 멀었다.

흐리멍텅한 의식을 추스르고 공항버스를 탔을 때, 세면도구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짙은 두께의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던 오전 6시는, 이제는 붉고 극명한 아침 햇살로 밝았다. 전조등을 켜고 택시들만 스믈거리며 다니던 거리의 모습이 뚜렷해지자, 공항까지 가는 길인 올림픽대로를 이른 출근 차량이 덮쳐 지체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가는 길에 댄 브라운의 <Deception Point>를 읽다가 잠깐 졸았고, 공항에 닿았다.

7시 20분에 표를 끊고 서점으로 가보니 김훈의 신간, <강산무진>은 없다. 출국수속을 밟고, 어느 나라도 아닌 중간계(변경)로 들어가, 면세 담배 한 보루, 양주 한 병을 사고, 19번 게이트 쪽으로 갔다. 통로의 한 귀퉁이에 가판대가 보였다. 그 가판대의 서가 한편에 <강산무진>이 보였다.

책을 사고, 흡연실로 들어가 담배를 피웠다. 흡연실의 사람들이 담배피우는 모습은 애처롭고도 몽롱하다. 그들은 기나긴 운항시간을 자신의 흡연주기로 계산하며, 보다 많은 니코틴을 몸속으로 밀어 넣기 위하여, 필터가 타들어가도록 볼을 부풀려가면서 연기를 빨아댄다. 그들은 맞은 편의 사람을 쳐다보거나, 아니면 유리창 밖의 활주로 끝을 망연히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대부분 침묵 속에서 모자라는 산소를 아가미로 흡수하는 금붕어처럼 피운다.

담배를 피우며, 강산무진을 펼쳤다. 그리고 더 이상 Deception Point를 읽기를 포기했다. 그 후 비행기가 홍콩에 도착할 때까지 김훈의 글을 읽었다.

글이 재미있다기 보다, 홍콩에 도착한 후 고객들과 이국어로 소통할 대화가 모래알처럼 서걱이고 들떠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 영어로 된 책보다 우리 글로 된 강산무진을 읽었는지 모른다.

홍콩의 고객들이 내뱉는 까끌까끌한 단어들을 조합해가며 나름대로 시장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할 것이다. 시황은 생물과 같다. 고객들의 해석과 판단은 제각각일 것이고, 늘 꿈틀거리고 있어서 날 것으로 보고할 수는 없다. 시황을 잡아서 토막을 내고 양념을 곁들여 상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만 한다.

단편소설집인 강산무진의 주인공들은 색이 빠져 거의 반투명이 된 사람들이다. 삶이 실체가 없어서 그렇게 반투명일지도 모른다. 책의 주인공들은 마치 소외를 통하여 삶의 허무한 실체, 그 투명함에 합치되는 것 같고,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었다기 보다, 오히려 현란한 색으로 아로새겨진 세상에서 삶의 허무한 실체 속으로 스스로 망명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소외된 주인공들은 외롭고 위태롭기보다, 갯벌을 적시는 안개처럼 편안하고,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린 만큼 만족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강산무진에서 세상은 아득하게 멀고, 삶은 들끓지 않고 먼지처럼 차분하다.

그들이 오욕칠정으로 겹겹이 쌓여진 세상에서 밀려나, 삶의 끄트머리에서 서자, 마침내 풍경이 밀려오고, 그것은 아득하여 텅 빈 삶을 채우고 또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낱낱으로 쓰여진 김훈의 단편들은 소외라는 주제로 가지런하다. 주인공 대부분은 삶의 황혼으로 이끌려가는 오십대, 삶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불현듯 회사가 망하고 배우자가 죽고, 자신이 병들거나 한다. 그래서 문득 외롭지만, 육친의 정을 요구하기에는 다 큰 자식들은 제 살기에 바쁘다.

문득 깨달은 외로움이지만, 알고 보면 세월과 삶 속에 오랫동안 비벼진 것이고, 기대할 것은 없지만 지상과의 혈연은 여전하다. 그래서 찌그러진 세상의 한 쪽 구석에서 기어이 사는 것이다.

소규모 식품업체의 파산으로 택시기사가 되어 예전에 직원이자 살을 섞었던 여자를 자신의 택시로 배웅하며 모자라는 사납금을 고민해야 하는 사십대후반의 남자(배웅), 뇌암에 걸려 죽은 아내를 화장하고 연모하던 여직원의 사직서에 가차없이 싸인을 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없이 회사 속으로 밀려난 오십대 후반의 중역(화장), 회사의 파산과 함께 식구를 외국으로 보내고, 회사를 정리한 후 등대의 임시관리직이 되는 55세의 중역(항로표지), 박사학위와 가정에 아무런 애착이 없으면서도 대학을 다니고 술집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마흔이 넘은 후배(뼈), 강력범 범죄자를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놓아줌으로써 파면되어 택시를 몰게 된 형사(고향의 그림자), 남편과 이혼하거나 사별한 폐경기에 접어든 자매(언니의 폐경), 태어난 절에서 속세로 가서 복서가 된 승려(머나먼 속세), 아내와 이혼하고 간암에 걸려 사직하는 오십대 후반의 중역(강산무진).

김훈의 단편소설에 쓰여진 소외의 모습은 너무도 흔하여 이야기꺼리도 안되지만, 살면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모든 상황의 십분지 일 쯤은 될 것이다.

비행기는 시간이 한시간 쯤 주름져 서울에는 12시 20분인, 11시 20분에 첵랍콕에 덜커덕 랜딩을 했고, 나는 <항로표지> 부분을 다 읽고 책을 덮었다.

회사에서 나에게 더 이상 필요없으니, 이제 쉬라고 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남편이 <일>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초조나 계산기 아니면 이메일로 짜가면서 힘겹게 힘겹게 하루를 보내는 줄 안다. 나는 그냥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상사의 눈치를 한번 본 후 가방을 들고 지하철에 오른다. 그러면 묽은 하루가 철커덩거리며 회사가 있는 쪽으로 밀려나가곤 했고, 아침이면 집과의 혈연을 끊어지듯 저녁이면 회사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졌다. 그러나 나는 집에 들어가면 피곤하다고 말했다.

비행기는 엔진을 헐떡거리며, 자신의 육중한 몸을 간신히 간신히 게이트에 연결된 헤치 쪽으로 밀고 갔고, 나는 책을 읽느라 잠을 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만약 집에서 쉰다면, 아내는 나의 느슨한 시간을 보며, 나를 미워하기 시작할 것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 등대로 나도 가봐? 김훈의 소설에 나오는 등대를 생각했다. 그런 곳에 취직이 되고 안되는 것은 나의 상상이다. 그러나 등대로 가서 끝이 없어서 미동도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등대에 점등할 시간을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무료할 것인가와. 파랑경보가 울리고 분노한 바다의 흰색 포말이 넘실댈 때의 두려움과, 죽음처럼 다가와 죽음처럼 사라질 여름날의 기나긴 노을을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떨쳐졌을 때, 내가 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띵하고 희미한 종소리가 났고, 서 있던 승객들은 통로를 따라 꾸역꾸역 홍콩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날 고객과 외국어로 서걱이는 대화를 나눈 후, 지점 사람들과 저녁을 했다. 술을 먹자, 졸음이 깜빡깜빡 찾아왔다. 자고 싶었지만, 좀더 술을 먹고도 싶었다. 그래서 가라오케로 갔다. 젊은 언니는 친해지려고 한 말에 그만 삐져버렸고, 좀 나이가 든 여자가 내 옆에 앉았는 데, 노래를 불렀는 지 술을 먹었는 지를 기억할 수 없이 졸렸다.

나는 졸음에서 깨려고 했는 지 몰라도,

“상무님, 제가 보기에는 본사의 생각이 좀 좁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서 장사를 해서 버는 돈을 푼돈입니다. 서울과 여기의 금리차가 0.5%만 나도, 그것을 반반만 갈라먹어도 그 금액은 큽니다. 사장이 생각하는 것은 일견 일리가 있지만 축소지향적인 발상이 아닐까 싶네요.”

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새벽 한시인가 두시에 가라오케를 나오자 비가 내렸는 지, 새벽까지 빛나는 네온들이 도로 위에 선지피처럼 흐르고 있었다.

4/26일 05시에서 4/27일 02시까지

2006042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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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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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책을 읽었을 때, 독일의 문학의 깊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에서 불란서인 주인공의 집에 하숙을 살던 독일군 젊은 장교가 하숙집 서재의 책을 보며, 독일하면 음악은 있지만 변변한 문학은 없노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불란서 작가의 양국 문화비평이긴 하지만, 나도 그에 동의한다. 독일어의 견고한 문법 때문인지는 몰라도, <깊이에의 강요>에서의 느낌은 문체가 정교하지만,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한 느낌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에 이르기까지 소설을 넘어선 사색의 여백이 늘 좁았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의 <향수>라는 책 또한 정교하지만, 독자의 생각이 확대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냄새를 주제로 한 김훈의 <개>와 이 글을 비교한다면, <개>의 냄새는 바람결에 왔다가 가는 냄새이다. 그래서 <개>의 냄새는 아득하며 부드럽다.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냄새는 바람 속에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 깔려있는 악취와 날아가 사라져버리는 향기를 알코올이나 유지에 침적시켜 유리병 속에 가둬두는 편집증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냄새는 집요하고 무겁다.

쥐스킨트의 소설을 읽으면서, 향수(Perfume)란 바람결에 날아왔다 사라지는 냄새의 문화 속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좋은 냄새란 장미나 치자의 향기처럼 뚜렷한 것보다 바다와 같은 냄새, 솔숲의 내음, 낙엽이 진 뜨락에 내리는 가을비 냄새와 같이 미미하여 심호흡을 하게 하는 것들이다.

향수란 결코 전원 생활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악취와 도시의 산물이다. 농촌의 청결한 생활 속에는 늘 향기가 있는 만큼, 향수가 필요치 않다. 18세기의 유럽, 불란서의 도시를 둘러싼 불결함과 악취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특히 중세와 대항해시대를 거쳐 도시화가 이루어지던 서구에 있어서 불결함은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은 육식을 했으며, 여자들도 식사를 하기 위하여 포크와 나이프가 아닌 단도를 휴대했다. 먹다 남은 고기와 피는 썩고, 뼈는 거리에 뒹굴었다. 사람들의 손은 고기의 기름으로 반질거렸고, 대서양을 건너는 선원에게 목욕이란 꿈조차 꿀 수 없다. 이러한 위생상태 속에서 페스트와 매독과 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던 18세기에 들어서는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분뇨와 오물들이 넘쳐났다. 파리의 길거리에 넘쳐나는 오물들이 옷자락에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이힐(굽이 높은 신발)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불결함 속에서 향수란 악취에 대한 대립항에 불과하다. 결국 그것도 냄새일 뿐이다. 숨쉬기가 답답하기는 악취와 매 한가지다.

여기에서 쥐스킨트의 <향수>는 시작한다.

쥐스킨트의 소설의 견고함은 향수제조에 대한 박물학적인 지식에도 있겠지만, 아주 문법적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비린내와 썩어가는 냄새로 등청인 어물전 좌판 밑에서 태어났고, 버려졌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런 체취가 없다. 자신의 체취가 없는 그는 누구보다 냄새를 맡는데 탁월하며, 사람들이 소리의 차이를 분별해냄으로써 단어를 인지하듯이, 그는 세상의 모든 냄새의 차이를 변별해낼 수 있었다. 그는 악취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피혁가공공장에서 처음으로 일하고, 그 다음은 향수제조업자 밑에서 일한다. 그에게 있어 특정 향수를 제조하는 것이란 각각의 향기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그 후 그는 여행을 하던 중, 어느 산에서 냄새가 없는 장소를 만나 오랫동안 머물며, 그동안 자신이 맡았던 냄새를 정리하고, 자신에 대하여 깨달아간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향수를 만들기 보다, 향수의 근원이 되는 냄새를 잡는 일에 열중한다.

쥐스킨트는 세상의 온갖 악취가 사람들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고의 향기는 아름다운 처녀의 속살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루누이에게 냄새는 곧 세상을 이해하는 언어이자, 율법이다. 그에게 냄새는 개별적이고 뚜렷하게 존재하며, 추하거나 아름답다. 그래서 위선적이고 타락한 인간들에 비하여, 더 존중받아야 하며, 보존되어야 하는 생명체이다. 그래서 그는 지고의 향기가 더럽혀지거나 사라지기 전에, 그 향기를 잡아 사멸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꽃봉오리가 열리려는 젊은 처녀 스무몇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하고, 그녀들의 알몸 곳곳에서 향기를 채집하여 병 속에 보존한다.

마지막 연쇄살인을 끝낸 후, 그는 붙잡히지만, 처형장에서 사랑의 향기를 퍼트림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의 그에 대한 애정 속에서 처형장에서 풀려난다. 쥐스킨트는 냄새의 율법이 사람의 율법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풀려난 그루누이는 도주하던 중 자신의 몸에 특이한 향수를 뿌리고 사람들에게 잡아먹힌다.

스스로 카니발리즘의 희생자가 된 것은, 그는 이미 지고의 향기를 채집하였다. 또 냄새의 율법을 지배한 만큼 더 이상 악취와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란 없었다. 당연히 죽어야 했다. 그러나 죽음이란 육신의 부패와 악취로 둘러싸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냄새가 없는 죽음을 택한 것인지 모른다.

지고의 향기는 결국 아무 냄새도 없는 <무>, 세상의 모든 냄새가 멈춘 그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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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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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SAMARITANS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

대부분의 미영계의 어중간한 인문서적이 그렇듯 이 책도 읽기가 어렵다.

읽기가 어렵다는 점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비본질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인데, 이 책을 장하준이란 한국 사람이 썼음에도 이 책이 번역된 책이라는 점이다. 즉 장하준은 서구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고, 한국적 정서에 용해되지 않는 문화적인 틈이 이 책에는 분명히 있다. 두번째는 서구의 학자들이 책을 씀에 있어서 견지하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우리와 같이 우지근 뚝딱, 단도직입, 결론이 뭔데?라고 수십년간 살아온 사람들에겐 너무 지리하고, 때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곤 한다. 특히 나처럼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면서 책을 읽고 간혹 졸곤 하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장하준의 책을 읽기가 어려운 것은

① 우리가 옳다고 인정하고 있고 우리가 착하다고 믿는 선진국과 국제기구에서 주장하는 것들(자유무역과 자유방임)에 대하여 아니다 라고 애처롭게 말한다.

② 자신의 주장이 단지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보호무역과 정부의 개입을 통하여 영국이나 미국 등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무수한 예증을 통하여 지적하고, 20세기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룬 한국도 그렇게 발전했다고 강변한다.

③ 이런 예증이 객관적임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자료와 이론들이 각면마다 빼곡하다 보니,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곤 한다.

어설피 그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자유무역이나 정부의 개입의 축소 및 IMF니 WTO니 하는 것들은, 선진국들이 자신들이 올라선 그 위치에 개도국들이 올라서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는 힘들게 어렵게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2007.10.10일 초판이 발행되었다. 그러니 장하준이 영어로 이 글을 쓴 때는 그보다 앞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장하준이 언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한 언급은 이 책에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① 학자들이여! 장하준처럼 책 좀 많이 읽어라. 학문은 IQ가 아니라, 방대한 독서량과 학문적인 엄밀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② 도표와 산수공식, 무슨 법칙, 없다는 가정 하에 등등으로 드라이하고  분과학된 경제학을, 아담 스미스가 썼던 에세이 수준의 인문서적으로 돌려놓았다. 결국 경제학은 인문학인 것이다.

③ 선진국과 국제기구가 싸가지없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과 부록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의 비결과 IMF의 협박 아래 시장을 개방하고 쳐들어 온 외국자본의 폐해들을 낱낱히 파헤쳐볼 수 있다.

④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에 쓰여졌음에도,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제반 정책에 대하여 몹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정책 자체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별로 재미없고 따분하며 지겹지만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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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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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을 읽으면, 그는 사는 동안 한번도
부끄러워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부끄러워진다.

남들이 한 말과 같은 말을 해도
그의 글의 울림이 다르다.
그의 울림은 들뜨지 않고 고요하다.

세상에는 멋진 말을 할 사람은 많지만
좋은 말을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리움이 그림이란다.
사람이 결국 삶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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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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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명청조의 패관잡품의 문장을 배척하고 한문의 문장체제를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회복하자는 <문체반정>은 올바르고 순수한 문체를 공부하여 올리도록 함으로써, 전체 사대부의 문풍(文風)을 쇄신하려 한 운동을 말한다.

정치의 정(政)은 바르도록(正) 매질(한손에 몽둥이를 든 형상)한다의 뜻이다. 그러나 정자를 正+文으로 해석하여 말(文)을 바르게 (正)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무대가 칼의 노래와 다르다.

칼의 노래에서 적의 적으로서 칼을 들고 수많은 아수라를 돌파한 이순신이 있다.

남한산성은 겹겹이 적에 둘러싸인 조그만 산성에서 더 이상 칼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병자 음력 12월 14일부터 정축 1월 30일까지의 이야기다.

무력한 칼 앞에서 척화와 주화의 말들이 일어난다. 김훈은 이 남한산성에서 칼의 이야기를 접고 말(言)의 이야기를 한다.

... 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言)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은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적에게 닿는 저 하얀 들길이 비록 가까우나 한없이 멀고, 성 밖에 오직 죽음이 있다 해도 삶의 길은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뻗어 있고 그 반대는 아닐 것이며, 삶은 돌이킬 수 없고 죽음 또한 돌이킬 수 없을진대 저 먼 길을 다 건너가야 비로소 삶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197쪽>

최명길의 독백은 삶 위에 말(言)이 살 수 밖에 없으며, 죽음 위에 명분(言)이 살 수 없음을 말한다.

그 말들은 김훈의 아버지인 김광주 씨의 말에 이어져 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았던 고국의 동포들에 대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에게 묻자, 김광주씨는 “그 비굴한 대다수의 동포들이 바로 민족과 국토와 언어를 보존한 힘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삶은 뚜렷하게 현실이다. 그러나 말(言)은 현실 위에서 분분하며, 때론 화려하며, 때론 요사스러우며, 때론 그럴 듯 하지만, 늘 삶을 뒤덮지는 못한다.

청 태종에 대하여 김훈은 이렇게 쓴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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