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새물결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번역한 책을 읽으면서 멀미를 하고 있다. 번역 책의 속의 실정성, 실정적 따위의 단어는 도무지 무슨 뜻을 가진 단어인지 모르겠다. 아마 Positive라는 단어의 번역인 것 같은데, 책 한 쪽에 무려 4~5회 씩 무더기로 출현하는데,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기표로, 아니면 번역가의 말버릇으로 거들먹거리는 단어나, '거시기', '그러니까' 식의 군더더기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동안 지젝의 책을 읽으면서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번역에 만족한 적은 없다. 나의 지적 이해력의 탓이 70% 정도는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처럼 번역 상의 문제로 이해력이 떨어진 적은 없는 것 같다. 특히 번역가가 원전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Positive/Positivity 따위를 실정적인, 실정성이라는 단어로 단순하게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정적인/ 실정성'에서 실정은 '실제의 사정이나 정세'의 實情이나 實定法(positive Law)에서 보이는 '일정한 시대,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정립되어 시행되고 있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실정성이라는 단어는 '현실적인 사정이나 정세에 맞는 성질'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번역자가 쓴 실정성이나 실정적이라는 단어는 맥락 상 의미가 다르다고 느껴진다.


번역자가 사용한 실정성이라는 낱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유령같은 단어같은지 책의 270쪽에서 한번 살펴보자.


  "출발점이자 토대로서의 실재는 결여 없는 실정적 충만이지만..."

  "...부정의 변증법에 걸려들지 않는 실정적 관성의 소여이다."

  "...실재 그 자체가 실정성에서 어떤 구멍, 결여, 근본적 부정성의 ..."

  "그것은 실정성에서 이미 그 자체로 순수한 부정성, 비어 있음의 ..." 


이와 같이 번역을 해놓았지만, 실정성의 의미를 발라낼 수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읽다가 결국 원문을 읽게 된다는 고통스런 하소연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Positive는 사전을 보면, '명백한, 법령(관습)에 의해 정해진, 자신있는, 과잉의, 독단적인, 절대적인, 현실의, 실재하는, 경험적인 사실에 근거한...' 따위로 폭넓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 중 적절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번역자의 임무다. 그런데 실정적으로 번역자는 번역의 실정성에 비추어 볼 때, 실정적 배임을 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책의 278쪽 4행에 "그것에 대한 표상의 실패는 그것의 실정적 조건이다"라고 나와 있는데, 9행에는 "표상의 실패야말로 주체를 적절히 표상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디면 4행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표상의 실패야말로 그것을 드러내는 조건이다."


또 279쪽의 "전체 요점은 바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이러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동시에 그것의 실정적 조건이 되는지를 체험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자. 여기서 실정적은 앞의 부정적(negative)이라는 단어에 반하는 뜻으로 긍정적(positive)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 글이 이해되지 않고 지지부진한 것은 (원문에 충실하기 위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취소선을 친 것과 같이) 너무 군더더기가 많다. 그리고 우리 말은 대명사보다는 명사를 직접적으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문장을 "요점은 우리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이러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이 어떻게 동일성의 긍정적인 조건이 되는지를 체험하는 것이다"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원문에 충실하려는 탓이겠지만, 한 문장 안에 '다시 말해', '오직'와 같은 말버릇같은 부사 따위가 군더더기로 달라붙고, 대명사가 중복된다. 따라서 문장의 경제성이 떨어진다. 대명사가 가리키는 명사나 명사구를 찾고, 쓰레기 따위로 쓸데없이 길어진 문장을 이해(독해)하기 위해, 한 문장을 몇번이고 읽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책을 펼쳐놓고 나의 이해력이 빈약한 것인지, 번역이 개판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원작자가 이해할 수 없게 글을 (개떡같이) 썼다고 하더라도, 번역자는 독자를 위하여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찰떡같이) 번역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번역자의 원문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나, 이 책을 읽으면 의문이 든다. 이해를 못한 사람은 절대 남을 이해시킬 수 없는 법이다.


또 번역자가 책을 쓰고 난 후 독자들로 부터 자신의 상품(번역)에 대한 의견을 듣거나, 출간 전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번역에 대하여 자문을 구해보았는지 의문이다. 출판사에서 감수를 했는지도 의문이다. 제대로 감수를 했다면 이토록 군더더기가 많고 중요한 용어에 대한 정리조차 안된 인문서적(문학, 기술, 기능서적에 해당안됨)을 그대로 서점에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책을 서점에 내놓고 판매를 하고 또 팔리는 우리나라의 도서시장에도 놀랄 정도다. 하여튼 나같이 책의 품질 불문, 자신의 지적 역량 불문하고 사서 읽는 놈이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아무튼 번역의 품질과 출판사의 감수에 대한 문제점을 제외한다면, 즉 번역이 만족할 수준에 이른다면, 지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현 사회의 분석을 위한 위대한 도구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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