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towards > [후기] '저자 장정일과의 만남' - 장정일 자신의 <<구월의 이틀>> 책 소개
[알라딘 문화 초대석] 덕분으로 <저자 장정일과의 만남> 행사에 다녀왔다. 그 행사장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은 사실 그의 예전 책들, <<독서일기>>를 읽었을 때 느꼈던 감흥 때문이다. 특히 다음 구절은 지금도 곱씹곤 한다.
"내가 보기에 바른 독서란,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와 같다. 때문에 독자는 저자가 그 책을 쓰기 위해 펜을 내어 달렸던 그 열정의 속도와 같은 속도로 읽어 내려가야 한다. 어떤 저자도 아침에 5분, 저녁에 5분 하는 식으로 책을 쓰지 않았으므로 그런 식의 독서는 이인 삼각 경기를 파탄낸다. 똑같은 책을 '자투리 독서'로 한 달이 걸려 읽은 독자와 한달음에 읽어 치운 독자는, 엄밀히 말해 다른 책을 읽은 것이다. 동일한 책이되 두 사람이 받은 임펙트가 틀리는 것이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5권 176쪽)
이 구절을 되새김질하는 이들이라면, "구월의 이틀"이란 표제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을 텐데 이번 '강연'에서 강조된 '20세 독서경험의 진수'란 아마 그것인 듯 싶다. 나는 20세에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의 '20세 문학유통기한론'이 달갑진 않았다. 예민하고 섬세한 그 시기에 1급 문학서들이 주는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면야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겠지만 '큰 뜻'을 품은 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나이에 책상 앞에 앉아 '시와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는 30세에 그 축복을 누릴 수도 있고, 40세에 혹은 70세에 그것을 음미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해서 어떤 문학책은 20세가 적기이고, 어떤 책은 30세, 어떤 책은 60세가 적기인지도 모른다. 문학작품의 향유는 본인만의 것이니 그것은 보르헤스가 와서 읽지 말라고 말리든, 세익스피어가 나타나서 스무살 때 읽었어야 하는 책이라고 주장하든, 자신이 어느 나이에서건 진실로 그것을 누린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의 권능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 스무살에 응당 누려야 할 독서경험과 그 미완성의 불안하며 요동치는 의식이라야 맛볼 수 있는 '독서의 이틀'이겠지만. 또한 자신의 일에 매진해야 할 20대 후반이상이 '말랑말랑한 시와 소설들'을 만지작거린다는 것의 "불길함". 자신의 일에 혹은 사회현실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허위의식'에 휩싸여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처로 소용되는 소설 읽기에 대한 지탄이겠지만.
그는 이렇게 외치는 듯 했다. 사실 이렇게 외친 것과 다름 없다. <현실을 살아갈 나이가 있고, 책을 읽을 나이가 있다. 대학생 때까지 그것도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로 문학읽기는 졸업해야 한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품종을 늘려가야 하고. 졸업해서는 현실 속에서 살아야지 현실을 외면하고 책 속에서 살면 그것은 비겁한 짓이고 허위의식이며 경멸받을 짓이다.>라고 말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가짓수를 늘려야 한다'는 책들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책들"이리라 짐작한다. 그가 어디에선가 썼던 말인 것으로 기억한다. "시민의 의무"라고. 저자 자신이 <<장정일의 공부>>에서 실천했던 것처럼.
그가 반대하는 것은 시와 소설들이 문학의 다 인양 취급하는 사회라고 이해했다. 더 나아가 그가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시와 소설읽기가 책읽기의 전부로 오도되는 게 문제라고. '허구적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중시될 이유가 없는 데 마치 '고급독서'로 취급하고, 심지어 시인들과 작가들을 '지식인'으로 '대우'하는 관행 말이다. 요는, 문학은 폭발적 감수성의 그 시기에 꼭꼭 씹어 먹어야 하는 청춘의 양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좋은 사회의 요건으로서의 독서는 문학읽기가 아니라, '사회 현실 구조를 직시하고 분석하는 논픽션들'의 대중화라는 게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이것 역시 추측이라기보다는 거진 그가 얘기한 내용이다. 어쩌면 <<구월의 이틀>>이란 신간소개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좀 더 자유롭고 투명하게 [독서] 혹은 [책 읽기와 삶]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물론 내가 기대했던 것은 장정일이 말하는 [책 읽기와 삶]이었고. 그러나 아무래도 신간소개행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자리이다보니 그렇지 못했다. 아쉬운 것은 좀 더 강연회답지 못했다는 점인데, 뭔가 지적 자극 내지 고양을 기대했던 것은 나의 잘못인지, 좀 더 냉정하게 되돌아볼 대목이다. 그도 이번 자리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회라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대학생들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몇 마디 당부로 덧붙일 얘기가 아니라 주제를 잡아 본론인 '강연내용'으로 풀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i) 문학에 대한 회의, ii) 엘리트는 직업이나 신분이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기술과 방법을 다년간 단련한 사람'임, iii) 올드 라이트와 뉴라이트의 한계로부터 새로운 우파의 필요성 제기. 저자는 이 세 가지가 <<구월의 이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견해들을 피력했다("말하고자 한 것들"인지 아니면 "주제들"인지 "동기들"인지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후기에서는 i)에 대해서만 다루었다.
덧붙이는 말. a) 고려대 5번 출구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행사장과 더욱 멀어진다. 길 안내문에서 정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6번 출구방향으로 쭉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그 학교 정문이다. 이외의 장소 안내는 유용했다. b) 행사장 입구에서 그 학교 소속인지를 확인하고 책을 무료로 배부하고 있었는데, 이는 과히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물론 해당 학교 측과 해당 출판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고로 해당 학교의 학생들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는 것은 전혀 참견할 바가 아니겠으나, 그렇게 눈에 띄게 행사장 입구에서 호의를 베풀어야 했을까. 적어도 그 행사에 먼 길 재촉하며 애써 참석한 일반인들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또, 왜 책을 저렇게 공짜로 나누어주는지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