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레이철 워프 시리즈 5
팻 머피 지음, 유소영 옮김 / 허블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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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이 행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아가는 별종들의 이야기.

20편에 달하는 단편 속 인물들은 소위 '별종'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자신의 시대에서 강제로 빼내어진 네안데르탈인, 소녀의 정신이 덧씌워진 침팬지, 오지 않는 동료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외계인,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못하는 시간여행자, 죽은 아버지가 나오는 영화에 집착하는 여자...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이들, 혹은 강제적으로 세상과 단절된 이들. 이들의 삶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결핍을 가지고 있거나 주변인으로부터 학대를 당한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헤쳐나간다. 그 끝이 불확실하더라도 발을 내딛는다.

단편 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것은 「채소 마누라」다. 수동적인 여성을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에 경악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그녀가 자신을 학대하던 남자를 죽이고 그가 그녀에게 그랬듯 땅에 묻고, 진행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다짐에서 오는 해방감이 가장 컸다. 「숲속의 여자들」에서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이 남편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짐작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돕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은 숲속의 여자들 중 하나가 되어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고 비웃는다. 「사랑에 빠진 레이철」에서 레이철은 애런의 죽음 이후 낯선 환경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하지만 소녀이자 침팬지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센터에서 탈출해 집으로 돌아간다. 이들 모두 스스로를 구원한다. 자신의 힘으로.

이런 인물들을 보며 '남자들은 왜 글 쓰는 여자들을 두려워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글 속에서 여자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는 현실의 여자들 역시 무엇이든 되고자 하는 마음을 먹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내기 때문이다. 이런 힘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팻 머피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층위의 '무엇이든 되기'를 보여준다.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이런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의식 저변에 깔리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숨막히는 상황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쾌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들의 미래가 창창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얻는 쾌감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단편집에서 흥미로웠던 다른 주제는 '민담'이다. 「파도가 다정하게 나를 부르네」에서 등장하는 물범 인간 실키, 「진흙의 악마」에서 등장하는 용암지대의 악마, 「눈의 보금자리에서」 속 예티는 민담이 현실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날렵한 사냥개 네 마리와 함께」나 「뼈」는 그 자체로 민담처럼 다가온다. 이 이야기들은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 비밀의 문을 열고 그 존재를 우리의 세계로 들이고 있다. 비밀의 통로를 걸어 그들의 세계를 찾아가고 있다.'는 팻 머피의 후기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이들의 존재를 믿기에 글을 쓴다고 했다.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 역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 믿음이 모여 이들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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