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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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소굴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이문열의 소설 제목, 혹은 이에 영감을 주었다던 바흐만의 시 〈유희는 끝났다 Das Spiel ist aus〉한 구절이다. 처음부터 바닥에 있는 이가 추락하진 않는다. 주인공인 빌헬름 카스다 소위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다. 할아버지는 중장, 아버지는 중령 출신이다. 집안 대대로 군에 복무했으며 빌리(빌헬름의 애칭) 역시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를 나락에 빠트린 사건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시작한다. 옛 전우 오토가 빌리에게 돈을 빌리러 오면서다. 오토는 도박에 빠져 군에서도 쫓겨나고 근무 중인 회사 돈에도 손을 댔다가 들킬 위기에 처한다. 오토는 같은 회사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슬쩍했던 1천 굴덴을 돌려놔야 하지만 노름에 빠진 이에게 그런 큰 돈이 있을 리가. 누구보다 착실한 빌리에게 옛 정을 호소하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외숙모님. 사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 대단히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습니다. 내일 아침 8시까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노름빚입니다. 노름빚을 갚지 못하면 저는 군인의 명예를 잃게 됩니다. 저 같은 군 장교로서는 모든 걸 다 잃는 겁니다.” - p.113]



  당장 내일 아침까지 돈을 빌려달라는 급한 부탁을 빌리 역시 거절한다. 처음에는. 하지만 빌리가 재미 삼아 해본 도박으로 꽤 큰 돈을 번다. 그러자 빌리에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난다. 그까짓 돈 도박으로 좀 벌어주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도박판에서는 더 그렇다. 거듭된 승리에 도취해버린 빌리는 그만 독립시행의 확률도 망각해버린 듯하다. 빌리가 도박에서 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의지할 사람은 자신을 전부터 돌봐줬던 부유한 외삼촌뿐이다. 하지만 외삼촌은 어찌 된 일인지 그 많은 재산을 잃은 상태다. 마치 새장 속에 갇혀 정해진 만큼만 모이를 먹을 수 있는 새처럼, 외삼촌은 모든 생활을 외숙모에게 의지한 상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희망은 외숙모다. 비장하게, 그리고 비굴하게 부탁드릴 생각으로 외숙모를 찾아가지만 빌리와 외숙모는 사실 이전에 엮인 적이 있는 사이다. 



[빌어먹을 스페이드! 스페이드는 늘 그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1천 굴덴이 다시 영사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게 무슨 문제가 되나? 아직 수중에 돈이 남았는데. 게다가 이미 망한 신세 아니었나? 남은 돈이 거의 없었는데……, 갑자기 수천 굴덴이 눈앞에 나타났다. 영사는 정말 훌륭한 분이야. 빌리는 잃은 돈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장교답게 영사에게 빌린 노름 빚은 반드시 갚아야지. 엘리프 녀석 따위는 늘 저 모양으로 살겠지만, 나는 장교다. 보그너 같은 놈하고는 달라……. - p.58]



  책 말미에 실린 역자 해설에서는 에로스(삶의 본능)과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방적인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은 외삼촌의 처지, 한때 친밀했던 빌리와 외숙모의 관계는 에로스적이다. 결국엔 타나토스가 에로스를 압도하지만 이를 위해선 그리스 신화에서 또다른 개념을 빌려와도 좋을 듯하다. 니체를 빌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떨까? 주인공 빌헬름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오토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의 이성을 마비시킨 건 도박에서 연이은 승리다.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지만 승리가 주는, 그리고 승리에 뒤따르는 목돈은 이성을 지워내기에 충분하다. 도파민, 오르가즘, 카타르시스. 뭐든 간에 그는 승리에, 상금에, 쾌락에 도취한 디오니소스 같은 상태다. 전도유망한 빌헬름 카스다 소위는 어리고 자신만만했던 이카로스가 날개를 잃고 바다로 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 처지에 빠진다.     

  

  또 하나 곱씹어 볼 것은 제목이다. 한밤은 Morgengrauen인데 이는 morgen과 grauen의 합성어다. Morgen은 '아침'이라는 명사도 되지만 '아침에, 내일에, 미래에'라는 부사도 된다. 또하나 grauen에는 '날이 밝아 오다'라는 뜻 외에도 '무섭다, 두렵다'라는 뜻도 있다. 주광성 동물인 인간은 빛이 있는 낮을 갈구하고 어둡고 스산한 밤을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간이 역설적으로 작용한다. 낮이든 밤이든 간에, 결국 우리 인간은 카이로스에 삼켜질 뿐인 가련한 운명이다. 카이로스가 오는 걸 도박이 몇 차례 막아줬지만 매번 이기기만 하는 도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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