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을유세계문학전집 124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지음, 홍진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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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생각났다. 자기가 가진 침대에 남을 눕힌 후 상대가 침대보다 길면 상대 몸을 자르고, 침대보다 짧으면 몸을 늘려서 죽이던 도적이 프루크루스테스였다. 이는 곧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정해 놓고 모든 것을 맞추려 하는 행위'를 비유한 용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내가 정한 기준 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이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지 않고자 인간은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가족과 함께, 학교에서, 직장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건 나와 가치가 다른 사람들이다. 타인과 뒤섞여 살아가며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치우게 된다.


  가족, 학교, 직장에 비해 일어날 확률은 낮지만 연애와 결혼도 사회화 과정에 포함할 수 있다. 후자는 전자보다 일어날 확률이 낮지만 우리 인생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가치관이 상이한 상대와 계속 함께 살면서 새로운 가정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나와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더라도 내가 상대에게 맞추든, 아니면 상대가 나에게 맞추는 식으로 서로 변할 수 있다. 문제는 언제나 상황이 이렇게 좋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발틱의 지방 귀족 출신인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Eduard Von Keyserling, 1855~1918)은 이 지점에 천착했다. 이 책은 장편소설『파도(Wellen)』와 단편소설 「하모니(Harmonie)」, 「무더운 날들(Schwüle Tage)」을 묶은 것이다. 160학점을 이수했을 정도로 학부 때 수업을 많이 들었고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독일문학사>란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난 카이절링이란 작가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번에 나온 이 책이 국내 초역이다. 비슷한 시기에 만과 카프카라는 워낙 걸출한 작가들이 활동했기에 묻힌 듯하지만 뚜렷한 특징이 보인다. 그가 나고 자란 북독일의 기후, 조국 프로이센의 황혼기, 시력을 잃고 등이 굽을 정도로 나빴던 건강 상태라는 요인이 합쳐져 작품에는 스산하고 꺼림직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난다.     


  이처럼 어두운 작중 배경과 상황은 인물 간 갈등을 더욱 부각해주는 소재다. 「하모니」에서 자유분방한 남편 펠릭스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옭아매려는 아내 안네마리와 상극이다. 두 사람의 사랑에는 이해와 공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사랑은 결국 파국으로 나아간다. 『파도』에는 신흥 귀족 집안의 딸 도랄리체가 중심이다. 뼈대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노쇠한 쾨네 백작과 틀에 박힌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한 도랄리체는 화가 한스에게 푹 빠지어 함께 도망친다. 그러나 둘은 계급과 가치관 차이 때문에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도랄리체는 답답한 귀족 생활을 벗어나고자 자유분방한 한스를 택했지만 정작 그의 기질을 따라갈 순 없다. 먼 바다로 나아가려면 파도에 몸을 맡겨야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파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무더운 날들」은 부자 간 갈등을 중심으로 한다. 아들 빌은 아버지와 사촌 누나 게르타의 불륜 관계를 알게 되면서 크게 동요한다. 책에 소개된 소설 3편에서 대립하는 인물쌍은 유미주의-자연주의, 혹은 문명-자연 간 대립을 나타낸 듯하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사람들은 가치관에 혼란을 겪는다. 이런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카이절링은 조국의 미래를 소설을 통해 예견한 듯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로이센은 패망했으니 말이다.



*.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서평단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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