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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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주 잠깐, 짧은 인상만을 적어두려고 한다.

신형철의 4년만의 신간이 나왔고 반쯤 읽었다. (사실은 거의 다) 서문부터 뭔가 달라졌다고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그게 뭔지는 알지 못했다. 글쎄 뭘까, 전보다 철학적/이론적 예시를 덜 가져오는것? 호흡이 조금 더 차분해진것?

특정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들을 추합한 부분이 섞여있다보니 그 지면의 특성을 따라간 글에선 다소 그런 기분을 느낄수 있으리라. 본질적인게 바뀐게 아니다. 본질은 똑같이 흐르고 마치 호흡이 낮아진 것처럼, 더욱 깊은 숨을 쉬는 글들이 책속에 흐른다. 정확한 글을 쓰고싶다는 소망에 따라 그의 글들은 점점 문장이 짧아지고 때로는 해야할 말을 뒤로 삼킨것 처럼 분절된 공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신형철이 정확하게 쓰려 할수록, 그래서 어떤 ‘인식’의 표면을 손 끝으로 마주할수록 나는 점점 더 정확하지 않은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온당한 부정확함이다. 비정확함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내면에 깊이 다가갈수록 (내면의) 많은 갈래와 빛깔 균열과 파동에 사로잡힌다. 우리 각자의 내면을 구성했을 삶의 모습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말하고자 한다면 한없이 쉽게 정의 할수 있는것도 삶이다. 모든 인간에게 한번씩 주어지는 보편적인 경험이므로.

그러나 그 무수히 많은 삶의 균열들에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몰라도- 틈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갈라진 틈새들이 개별적으로는 정의될수 있어도 포괄적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나아가 그 비정확하게 벌어진 틈새들이 인간 모두에게 정확히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글들은 다른 방식으로 ‘정확성’에 도달하는 중이라는 걸 신형철은 논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확함을 ‘실험’하리라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후 4년이 지났다. 그는 이제 실험에서 ‘공부’로 옮겨왔다. 공부란 아무리해도 정확한, 정의된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의 영역이란 걸 그가 몰랐을리 없다. 나는 이 불가해한 내면과 삶 앞에 오로지 그 비정확성에 더욱 깊게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선언된 정확성이, 그래서 슬픔을 공부하는 자의 슬픔으로 무한히 가까워질 뿐일 그의 정확함을 신뢰한다. 신형철의 글은 이런 식으로 제출되어 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바로 그런 감정으로 그의 글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전 산문집인 <느낌의 공동체>를 읽을때보다 더 많은 한숨과 더 느린 속도가 필요했다. 마구잡이로 흘려버리는 눈물이 아니라 목 뒤로 꿀꺽 삼켜버리고 메이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그렇게 읽히도록 정확하게 고안된, 그런 신뢰할 만한 슬픔을 그는 이번에도 들고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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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지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한 문장의 향기
허연 지음 / 생각정거장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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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평을 읽느니 그냥 다른 작가/비평가들의 책을 읽는게 훨씬 이득입니다. 저자가 시인이라 시적 글쓰기로 쓰여진 산문은 어떨지 기대했는데, 담백하게 말하자면 그냥 평이한 줄거리 나열과 편당 한장 반 정도 되는 짧고 구멍 숭숭 뚫린 에세이? 독후감? 정도로 밖엔 보이질 않네요. 돈 아까워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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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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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아무튼 모든 일들이 예술과 관련된 것이라고 느껴졌을때 그 때 읽었던 책 중 하나다.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으로 나를 독일로 이끌었고 <토니오 크뢰거>로 내가 갖고 있는 가장 내밀한 질문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 보편적이고 정상적이며 스스로와 싸우지 않는, 자기 혐오가 끼어들 곳이 없는 삶과 언제나 자기자신에 대한 모멸감에 시달리며 한없이 추락하는, 발 밑이 푹 꺼진 삶. 그 두 삶 사이의 투명한 거리에서 서성이는 모든 방랑자를 위한 성서. 관념적인 소설과 글을 죽도록 싫어했던 내게도 토니오 크뢰거의 거의 마지막, "읽지마라, 외로워서 우는 왕이 너한테 무슨 상관이겠니" 부분은 (냉철하고 시니컬한) 바깥의 세계와는 관계없이, 외로워서 우는 왕이 중심에 있는 것이 나의 세계라는 것을 깊이 각인시켰다.

이 작품에 대한 훌륭한 글 한편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책 <작가의 얼굴>에도 실려있는데, 그 부분을 짧게 옮겨본다. (필히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ㅠㅠ)


"토니오 크뢰거는 많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많은 독자들에게 동일시의 대상이다. 100년 전의 이 단편에서 많은 이들이 거듭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으니, 고독하고 불우한 사람들,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느라 너무나 힘겹거나 끝내 찾지 못하는 사람들, 상궤에서 벗어나 있고, 그런 스스로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이다. 깨달았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에도 의심을 멈추지 않기에 더 많은 것을 알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기에 더 많이 괴로운 사람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토니오 크뢰거>는 두 세계 속 혹은 그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 어느 편에도 편안하게 안주하지 못하는 이들, 인간사를 묘사하거나 그 묘사를 평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그 인간사에서 밀려나거나 실패하리라는 두려움에 때로 진저리를 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시적 교본이 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만의 이 단편은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성서가 되었으니, 이들은 마침내 그럭저럭 마음 붙일 피난처, 어쩌면 고향을 얻었다. 바로 문학이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작가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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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 -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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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 고전의 고(古)는 옛 고 자고, 이는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혹은 오래 전이라는 사전적 뜻의 단어와 부합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높을 고(高)를 쓴 다른 의미의 高典(고전). 높이 두고 우러러 볼만 하거나 인식의 지평이 이미 높은 곳에 닿아 있는 작품을 지칭할 때 등장 할 법한 단어다. 예전의 것을 말하는 시간적 의미의 앞선 단어와는 달리, 후자에 등장한 고전(高典)은 공간적 의미의 단어다.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두 단어를 나란히 놓고서야 이 책, 서경식의 <내 서재 속 고전>을 겨우 펼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시간과 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책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연재 된 16개의 칼럼을 한데 모은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저자 서경식의 ‘고전’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절반의 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셈이다. 서경식의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수만가지 갈래로 뻗친 촘촘한 줄기와, 뼈를 부수는 힘으로 파고든 뿌리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일단 두 개의 명제를 던져 놓기로 한다. ‘보편’과 ‘특수’다.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고전’의 작가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인으로 재일조선인 2세인 작가의 문학적 분신이라 부를 만한 작가다. 사이드 저작의 주된 내용은 ‘보편성’과 ‘특수성’인데,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의어로 통하는 이 두 단어는 사이드를 거쳐 지배자- 피지배자 혹은 식민지- 탈식민지 등으로 발화된다.

“문학에서 지배층의 이야기에 피지배자들의 대항적인 이야기를 대치시키는 것이 장차 인류의 ‘새로운 보편성’을 구축하는 데에도 중요하다”(p.73)

아닌게 아니라 사이드는 자신의 저작 <지식인의 표상>에서 보편성을 따로 언급한 적이 또 있다. “보편성이란 우리의 출신배경, 언어, 국적이 타자의 존재로부터 자주 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확실성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성은 또한 대외 정책이나 사회 정책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적 행위에 대한 단일한 규준을 찾아내고 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보편성을 너무나 오랜 시간 해체한 나머지 특수성의 위치까지 끌어올려진 탁월한 예인데, 마이너리티(소수자)로서의 특수한 위치와, 문학이 갖는 보편성(누구나 읽을 수 있고, 어디에서나 읽힐 수 있는)이 섞여 전혀 다른 빛깔을 길어낸, 그야 말로 특별한 정의다. 이 말을 전달할 때 저자는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두 번 중복되어 다뤄지는 사이드 외에도 저자는 ‘프리모 레비’ ‘루쉰’등을 들어 절망과 희망 사이의 낙차를 재는가 하면, ‘가토 슈이치’와 ‘고흐’로 인간 정신의 고된 강건함을 고요히 증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이런 구절

'중세의 가을'은 인상 깊은 번역이지만, 하위징아 자신이 감수한 영어 번역에서는 이 '가을'이란 말을 'waning', 즉 '조락'으로, 프랑스어 번역에서는 'decline', 곧 '쇠퇴'로 옮겼다. 말하자면 하나의 생물체의 사멸처럼, 지은이는 '중세'라는 시대가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것이다.

이 책 제목이 불러일으킨 연상으로 내 뇌리에는 지금 '현대의 가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지금 나는 ‘현대’라는 시대의 몰락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폭력과 함께했던 이 시대는, 그러나 동시에 가냘프긴 했으나, ‘진보’와 ‘평화’라는 가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게 했다. 20세기에 들어 두 번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으로 이런 희망은 뼈아픈 타격을 받았지만, 그 타격을 교훈 삼아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이어가려는 사상적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즉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석권하는 시대를 맞아 그런 사상적 시도는 일거에 탁류 속으로 떠밀려, 멈춰 서서 조용히 성찰하는 태도를 상실했다. 도처에서 냉소주의가 야만스런 개가를 올리고 있다.”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언급한 저자는 인간 군상의 포악하고 나약한 역사를 외면하고 싶은 얼굴로 돌아온다. 이 수없이 많은 얼굴과 표정들을 하나씩 포개어 겹쳐놓은 것이 바로 이 책 <내 서재 속 고전>이다. 단 하나의 명료한 줄기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들이 있지만, 더러는 여러개의 팔을 뻗어 다양한 층위의 열매를 수확하는 책들도 있다. 명확히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모든 사상과 행동은 컨텍스트(문맥)와 포지셔널리티(위치)를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했다. 식민지의 육체를 갖고 침략의 문맥을 짚어나가는 시선은 고요하고 명징하기에 강력하다. 독자가 공감하기 전에 먼저, 서둘러 공감하거나 아파하지 않는 그러나 엄연히 상처 입은 이 언어들은 보편을 보편적으로 밖에 읽지 못하는 나의 빈약한 감수성에 논리로 호소한다. 이것은 오래 남을 책이다. 그러나 동시에 높고도 넓은, 보편과 특수 양면의 성곽 위로 올려다줄 사다리이기도 하다. 이 말을 할 때 나 또한 망설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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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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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소설에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할즈음 읽게 된 여러권의, 이른바 최근 한국소설 혹은 젊은 작가의 소설이 나의 실망을 더욱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런 한국소설들은 너무나 나이브하고 현실을 반영하는데 급급해 숨막히기만 한 글자들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러했다. 이와같은 이유로 나는 김애란을 그닥 좋아하지 않고 감정만 있고 서사의 구조적인,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류의 구조의 미학은 빠져있는 신경숙, 은희경, 김연수 등등의 책들도 그닥 탐독하진 않았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분명 개인의 취향이기도 하겠으나 사는 것이 숨이 턱턱 막히니 책을 읽으면서까지 그 숨막힘을 연장하고 싶지않은 마음이 컸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헐떡임을 참아가며 읽어내도 끝맛은 씁쓸하기만 할 뿐이니.
그러나 반대로 그런 이유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소설들도 있다. 사실은 몇번 만나지는 못했지만, 감히 소개하자면 이번엔 이 책이다. '쇼코의 미소' - 한국 문학을 일년에 한권은 읽을까? 싶은 내게는 이 책의 저자도 책 제목도 다 낯선 것이었지만 읽기를 결심하게한 문장이 있었기에 읽었다.

그리고 읽고나서는 울었다. 나는 이처럼 값비싼 위로를 받아본지 오래된것 같았고, 해마다 찾아오는 늦겨울의 내 생일이 기쁘지 않은지는 벌써 4년이 훌쩍 지난것 같았다. 내가 이른바 경멸하던, 현실의 반영, 치밀하려 애쓰지만 보는 이의 숨통만 조를 뿐인 지긋한 현실의 거울. 그러니까 한국소설. 그러나 한국소설. 현실의 문턱을 차근히 밟는 이 소설이 뭐가 그렇게 다른걸까 생각하다가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글들을 마치 연애하듯이, 오래 짝사랑해온 사람과 연애하듯이 썼다고 말했다. 그 투명한 기다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이어서일까. 한국어가 이처럼 맑고 깨끗하게 느껴진적은 별로 없었던것 같다.

힘을 내라고, 일어서라고, 할 수 있다고, 작가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그런 말은 생각으로도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냥 그들은 포기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우뚱거리고 초라해졌던 이야기들. 이제 그만두겠다는 주인공의 말에 되려 위로를 받게 되는건 어떤 이상한 양가감정일까. 나는 나이브하고 지극히 현실의 반영일 뿐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위에서도) 말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야기가 내 어깨를 자꾸만 흔들어댄다면 그 이야기는 이미 나이브한게 아니지 않을까.

김애란의 무심함도 편혜영의 치밀함도 없이 이를테면 '영하의 이야기를 영상의 문체로 써내려가는' 오랜만의 한국소설이다. 이제 한국소설을 읽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괴로운 생일을 몇번이나 보내고, 외로운 시간들을 몇년이고 흘려보낼테지만 계속 용기를 낼거고, 버티는 일이던 포기하는 일이던 둘 모두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배울것이다. 이 새벽동안 잠들지 못했다. 쇼코의 미소, 그 글의 끝 문장처럼 내 마음에도 서늘한 미소가 베인다.

+ 계보학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이해'하는 소설이기 때문일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이해받지 못해 서늘해진 이야기와 너무 섣불리 이해해 되려 우스워진 이야기들을 만나왔다. 우리 시대의 멘토들은 타인을 이해하라 설파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누구보다 먼저 나를 이해하려 한다.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남을 여행하는 지도가 될것임을 알고있다. 그 투명한 노력들이 한동안 세계를 무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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