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를 썼다. 냉철한 복기, 뭐 그런 게 필요했던 것 같다. 뭘 잘못했는지, 그래서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적어놓아야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수험생들은 오답노트를 만든다. 나역시 꼼꼼하게 내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문장을 만들기가 너무 힘들었다. 명문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단지 일지일 뿐인데, 그게 이렇게 어렵다니. 내가 느낀 희열과 안타까움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 더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읽은소설은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이 거의 전부. 거기엔 내게 필요한 문장이 없었다. 그래서 시를 읽기 시작했다.
실수였다.

몽테뉴의 『수상록』. 누렇게 바랜 문고판을 다시 읽는다. 이런 구절, 늙어서 읽으니 새삼 좋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바람이 불면 뒤꼍의 대숲이 요란해진다. 그에 따라 마음도 어지러워진다. 바람 거센 날이면 새들도 입을 다무는 듯하다.
대숲이 있는 임야를 사들인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후회 없는 구매였다. 늘 나만의 숲을 갖고 싶었다. 아침이면 그곳으로 산책을 나선다. 대숲에서는 뛰면 안 된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있다. 대나무를 베어내면 밑동이 남는데, 그것이 매우 뾰족하고 단단하다. 대숲에서는 그래서 늘 아래를 살피며 걸어야 한다. 귀로는 사각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며 마음으로는 그 아래 묻은 이들을생각한다. 대나무가 되어 하늘을 향해 쑥쑥 자라나는 시체들을.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ㅡ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박주태가 은희를 죽이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박주태는 어떻게 만났니?"
아침을 먹다 은희에게 물었다.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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