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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르네 지라르,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늑장을 부린 탓에 급조한 것이지만 몇 가지 추억거리를 담고 있어서 버리기엔 아깝다. 창고에 넣어둔다.

르네 지라르(1923- )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에 대해서 몇 자 적어내는 것이 내게 떨어진 몫이었다(이하에서는 <사탄이 번개처럼>으로 줄임). 하지만 일은 콩구워 먹듯이 되진 않았고, 이래저래 미뤄지는 사이에 아마도 가장 요긴한 지라르 입문서가 될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이 장마가 시작될 무렵에 ‘번개처럼’ 출간됐다(한국어판은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재작년에 불어본이 나온 이 대담집은 문학과 종교학, 문화인류학 등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이 예외적인 사상가의 ‘지적 자서전’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모자람이 없는 책인데,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사들면서도 부담감을 다 떨쳐낼 수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견적이 너무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속으로 툴툴댔던 것이다.


사실 지라르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문화의 기원>의 서문에서 대담자들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이사야 벌린의 인용구를 재인용하면서(벌린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각각 이 ‘여우’와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이 고슴도치-지라르의 그 대단한 것이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이라는 걸 미리 일러주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설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40년 이상을, 찰스 다윈의 말대로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을 해오고 있다.”(10쪽)


지라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단순한 것은 그 두 가지 가설만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기나긴 논증’에 대해서 되짚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지적대로 단순성과 명료성은 지라르의 특장이면서 비판의 빌미이다. 나는 이 익숙한 양면성에 대해서 몇 자 거들기보다는 지라르에 대한 사적인 기억 몇 가지를 나열함으로써 내게 떨어진 발등의 불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라르 자신보다 지라르에 대해서 더 잘 말할 자신이 없는 나로선 ‘지라르와 나’ 정도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이긴 하다.

 


 

 

 

 

 

 

 

 

지라르의 출세작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이다. 파리 고문서학교 출신인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소설을 강의하기 시작한 건 그 자신에 따르면 ‘첫 지적 모험’이었는데, 30대 중반에 스탕달과 플로베르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대단한 걸 발견한다: “그 무렵 저는 <적과 흑> <마담 보바리>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연달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원한 남편>을 읽던 때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35쪽)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세르반테스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발견하며 이로써 ‘모방의 리얼리스트’로의 길로 접어든다.

 

지라르의 이 출세작은 비교적 일찍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전체 12장 중에서 8장이 문학평론가 김윤식에 의해 영역본에서 중역돼 나온 <소설의 이론>(삼영사, 1977)이 그것이다(<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완역본이 나온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소설의 이론’이란 표제는 막바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데(물론 역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역자는 소설이론가 루시앵 골드만이 이 저작들을 ‘소설의 이론’이라 할 만한 단 두 권의 책으로 꼽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맞은 첫 여름방학에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손에 든 것은 지극한 당연한 일. 루카치의 책은 난해했지만 지라르의 책은 읽을 만했고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론은 흥미로웠다(<영원한 남편>에 대한 그의 분석은 소설보다도 재미있었다!).  

 

 

 

 

 

 

 

 


다행히도 지라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문학평론가 김현의 노고 덕분이었다. 지라르 이론의 전모를 다루고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연구서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 1987)가 바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240여 쪽의 비교적 얇은 분량이지만 실제 지라르론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라르의 도스토예프스키론과 카뮈론으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은 그럼에도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나 출간된 <문화의 기원> 이전에 르네 지라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책이었다.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김현이 파악한 지라르 이론의 핵심은 ‘폭력’이고 ‘폭력의 구조’였다.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그는 ‘폭력의 구조’로 묶었던 것(김현은 지라르의 <희생양>을 그의 가장 좋은 책으로 꼽는다). 폭력에 대한 관심은 사실 80년대 중반 김현 비평의 화두이기도 했다. “억압적 세계의 기본적 욕망에 대한 분석․해석”을 시도한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은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며 거기엔 ‘증오와 폭력’ ‘폭력과 왜곡’이라는 두 중요한 평론이 실려 있다.


<폭력의 구조>에도 ‘지라르의 눈으로 한국의 신화 읽기’가 몇 대목 포함돼 있지만 그러한 평론들이 지라르에 대한 관심과 읽기에 힘입은 것이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폭력의 구조>의 글 머리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 그 수태․분만의 과정이 지라르에겐 너무나 자명하고 투명하다. 그 투명성과 자명성이 지라르 이론의 검증 결과를 불안 속에 기다리게 만들지만, 거기에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래서 지라르의 이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거기에는 더구나, 1980년 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17쪽, 강조는 나의 것) 그는 그 폭력의 의미를 철저하게 질문한 아주 드문 비평가였다.

 


한 비평가에게는 ‘소설의 이론’을, 또 다른 비평가에게는 ‘폭력의 구조’를 의미했던 지라르가 내게 의미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의 <도스토예프스키: 이중성에서 단일성으로>(1963)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묵시록’을 마지막 장으로 갖고 있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보유편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망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란 절로 <소설의 이론>을 마무리한 젊은 루카치가 이후에 쓴 도스토예프스키론에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두 걸출한 이론가에게서 소설론의 끝은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소설의 이론’ 이후에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으로 나아가며 ‘소설의 진실’을 발견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1972)으로 넘어간다(나는 두 사람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참조한 졸업논문을 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지라르는 문학비평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넘어간 자신의 작업이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우려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되짚어보면, 그의 본류는 ‘모방욕망의 인류학’ ‘종교적인 것의 인류학’이었고, 그러한 작업의 영감을 문학비평에서 가져왔다는 점이 특이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도 소개돼 있는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1978)과 짝패를 이루는 책이다. “제가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 처음에는 2부의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부는 고대문화, 2부는 기독교에 관한 내용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료는 다 모아놓고도 기독교 부분은 제쳐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문화의 기원>, 52쪽)


이 2부는 두 사람의 동료/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대담의 형식으로 출간된다. 말 그대로 기독교에 관한 부분인데, <희생양>(1982, 국역본1998)이 1부의 보유라면, <사탄이 번개처럼(1999)은 2부의 보유쯤 된다. 후자의 경우엔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의 두어 가지 실수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지라르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수란 건 기독교와 연관된 것에 대하여 ‘희생’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백하는데, 실상 <사탄이 번개처럼>에는 ‘희생’이란 말이 낙석처럼 널려 있다.


여느 저작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지라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신화와 기독교를 구별하면서 그 둘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신화가 가해자의 편인 데 반해 기독교는 희생양의 편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신화의 해석은 집단 폭력의 희생물을 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완전히 잘못이고 환상이며 그러므로 거짓이다. 반면에 성경의 해석은 이 희생물을 무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그러므로 참이다.”(14쪽)


이러한 단언은 어떤 기시감으로 우리를 안내하지 않는지? 이를테면, ‘신화의 거짓과 성경의 진실’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 <사탄이 번개처럼>을 구성한다. 모방적 경쟁관계로 빨려 들어감으로써, 즉 스캔들에 불가피하게 말려들어감으로써 ‘모방의 회오리’, 혹은 무차별적 폭력에 도달하게 되는 메커니즘 자체가 바로 사탄이다(예수 가라사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스캔들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에 휩싸인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러한 폭로를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전범적이다. 그의 소설들은 나폴레옹 모방에서 그리스도 모방으로의 이행, 곧 신화(변증법)에서 복음서로의 이행을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르네 지라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 두 ‘두더지’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결점도 비슷하고. 지라르에게서 맹목적인 서구 및 기독교 우월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맹목적인 러시아 및 정교 우월주의의 냄새를 다 가리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이 '인문학의 다윈'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 할 만하다(나의 졸업논문은 ‘인류학자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것이었다)!    

 

06. 07. 24.

 

P.S. 물론 투명성과 자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덕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미덕이 아니다.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의 '두더지적 성향'과 종교적 지향이다. 더 파고들어가면 두더지도 여러 종류가 있다(독백적 두더지, 대화적 두더지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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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5)

어린이날이었고 집에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일 없이도 바쁜 하루였다. 게다가 아이는 어제부터 목감기 증세를 보이는 터라 사촌들과 놀러가는 일정은 모두 취소되거나 간소화됐다. 내가 아이라고 해도 별반 재미없는 하루였을 것 같은데, 큰 투정없이 하루를 보내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열 속에서 아이는 자고 있다. 영화 <희생>에서 아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수원에서는 어린이날을 기념해 에어쇼를 하던 전투기 한 대가 추락하여 조종사가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고, 평택에서는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강제철거를 둘러싸고 군경과 시위대가 오늘도 충돌했다. 인천 영종대 골프장에서는 미셀위가 컷을 통과했고, 일본 도쿄돔에서는 이승엽이 시즌 6호 홈런을 때렸다. 안팎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속은 더부룩하고 마음은 어수선하다(그나마 실시간으로 내리는 밤비가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준다). 이런 날은 문학처럼 '사람으로 붐비는 앎'을 전공한 것이 유감스럽다. 천문학이나 동물학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일부러 그런 책을 찾았다. 다행히도 있었다. "60여년간 평생을 동물 관찰에 바친 러시아의 세계적인 동물학자 V. N. 쉬니트니코프(1874-1956)의 새 관찰 기록"을 담은 <나를 숲으로 초대한 새들>(다른세상, 2006)이 그것이다(출판사 자체가 '다른세상'이군!).(*알라딘에 저자명이 '쉬니트니코흐'라고 표기돼 있는 건 오류이다.)

책은 저자가 1957년 출간한 책 <우리나라의 동물과 새들>에서 조류 부분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같은 책에서 포유류를 다룬 부분을 출간한 <나를 숲으로 초대한 동물들>(다른세상, 2004)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그러니까 한권으로 된 원서를 국역본은 두 권으로 분권해서 낸 셈이다.



소개에 따르면, "수많은 새와 동물이 내는 소리를 성대모사하는 재주꾼 새, '새대가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집짓기나 먹이 사냥에서 영리함을 보여주는 새들, 모성이 충만한 새들과 인간의 손길을 낯설어하지 않는 새들까지, 43종에 달하는 새들의 생태를 흥미롭게 엮었다. 각종 진기한 새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오랜 새 관찰 경험을 토대로 표정과 몸짓에서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서로 교감을 나누는 지은이의 세밀한 시각이 잘 살아 있다. 본문 가운데 각각의 새들을 그린 삽화를 곁들였다." 위의 박쥐 같은.  

 

 

 

 

알다시피, 이런 동물들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따로 동물행동학이라 한다. 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서로 임신재 교수의 <동물행동학>(살림, 2006)도 최근에 나온 책이다. <동물 행동의 이해와 응용>(라이프사이언스, 2005)과 함께 참고문헌에 올려놓을 수 있겠다. 국내에서 이 분야의 가장 저명한 연구자는 베스트셀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의 저자 최재천 교수이다(올해 보다 좋은 연구여건을 보장받고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겼는데, 알라딘에는 저자 데이터가 아직 업데이트돼 있지 않다).

그의 <알이 닭을 낳는다>(도요새, 2006)의 증보판도 얼마전에(지난 3월에) 출간됐었다. 하지만, 이 책은 60여 편의 동물 이야기와 함께 인간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어서 '불만스럽다'. '알면 사랑한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라지만, '알면 슬프다'는 건 나의 오랜(?) 경험이다.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라구요?  

 

 

 

 

두번째 책은 제임스 가드너의 <생명우주>(까치, 2006)이다.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는 것이지만, 책은 "우주론적 관점에서 생명의 비밀을 파헤쳐 보는 저작"이며, "우주의 탄생에 관한 의문을 생명 탄생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하여 제기했다"고 한다. 순수천문학 책이 아니어서 유감이지만, 나로선 그런 책을 읽을 만한 수학적 지식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대략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저자 자신이 다양한 경력을 지난 과학저술가여서, 일반인의 눈높이를 고려했을 법도 하고.

"우주론과 진화론을 연구하는 복잡성 이론가"로 소개되고 있는 저자는 "우주와 생명을 설계하고 창조한 초월적인 존재인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아무 뜻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처럼 지능을 가진 생명이 과연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축제에 등장하는 하찮은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란 의문들에 대해, "초연적인 현상에 자연적인 설명을 제공해 주는 카오스와 복잡성 이론을 동원하여 그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은 이른바 "이기적 친생명 우주(Selfish Biocosm)" 가설이다. 지능을 가진 생명이 무작위적인 사건에 의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규모에서의 창발과 진화,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다는 것."

이쯤이면 과학과 SF를 넘나드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무튼 "물리학, 우주론, 생물확, 생화학, 천문학, 복잡성 이론 등 다양한 과학 분야를 넘나드는 논지로 기존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이분법 안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생명의 비밀에 관한 새로운 논쟁점을 제시한다"고 하니까 속는 셈치고 한번 읽어봄 직하다. 저명한 물리학자 겸 과학저술가 폴 데이비스도 저자 제임스의 설명을 '정말 굉장하다!'고 평하는 것으로 봐서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고 봐야겠다.  

사실 '엉터리'란 것은 과학과 정치가 연루되거나 결탁하면서 곧잘 발생한다. '정치는 과학을 어떻게 유린하는가'란 부제를 단 <과학전쟁>(한얼미디어, 2006)은 시사적인 읽을 거리이다. "책은 정치가 과학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정치가 어떻게 제대로 된 과학 발전의 길을 가로막는가를 미국의 사례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줄기세포 연구, 비만, 흡연, 낙태, 미사일 방위, 환경문제, 기후변화 등 과학적 정보와 연구가 중대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논쟁 사안에서 정치적 신념을 위해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악용하는 행위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 여러모로 미국이란 케이스는 타산지석감이다.

과학의 또다른 아킬레스건은 '상품화'이다.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는 부제의 <인체시장>(궁리, 2006)은 바로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신간이다. 공저저의 한 명인 도로시 넬킨의 관점은 <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다고.

사실, ""나는 한때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바코드가 찍힌 생명공학시대의 신상품이 되었다." 혈액, 골수, 피부, 정액 등 인간의 생체물질이 과학적 연구, 상업적 이익 등을 위해 악용되는 시대에 대한 지은이들의 비판"을 다루고 있다고 하면 작년 여름에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아일랜드>를 막바로 떠올려볼 수 있겠다. 그때만 하더라도 황우석 교수팀의 젓가락 기술은 대한민국 과학의 '자부심'이자 동시에 미래 생명공학시대(안티-유토피아)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었다(인간이 앞으로 '젓가락질'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그 이후에 우리가 경험했던 사태는 '인체시장'과 '과학전쟁'의 복합적 종합이었다. 해서 이 주제에 관하여 한국인들만큼 잘 '계몽된' 국민은 전세계에 없을 거라 짐작되지만, '복습'을 원한다면 밑줄 그어가며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기운을 좀 차리고 '자연'에서 '문화'로, '문화의 전장'으로 다시 들어가 본다.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이자 이론가 스튜어트 홀 입문서 <지금 스튜어트 홀>(앨피, 2006)이 출간됐다. 'Critical Thinkers'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다(같이 나온 네번째 책이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인데, 바르트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자). 홀의 책들은 간간이 소개된 바 있는데, 그의 논문들을 편역한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2006)이 이제까지는 '정본' 구실을 해왔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이와 단짝이 될 만하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영국 신좌파 그룹에 속해있던 1950년대 이후로 스튜어트 홀의 전방위한 사상적 범위와 연구, 그리고 그에 따른 성취를 요약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문화연구의 주창자로 부상한 것 이외에도, 1980년대 그가 촉발시킨 대처주의와 인종주의에 관한 논쟁, 1990년대 이후의 정체성·디아스포라·민족성에 관한 그의 발언 등을 살핀다."

그럼으로써 "스튜어트 홀의 방대한 연구를 역사적·문화적·이론적 문맥 속에 위치시켜 문화의 정치성,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문제, 정체성의 정치학 등으로 재구성했다. 또한 그가 남긴 지적 유산에 대한 비평가들의 견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지금껏 저서를 한권도 쓰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수정·갱신해 온 홀의 핵심 사상과 영향력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러니 비단 홀 입문서로뿐만 아니라 문화이론('문화적 유물론'이라고도 지칭되는)에 대한 입문서로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문화연구'로 검색되는 책들은 너무 많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스튜어트 홀이 주도했던 영국의 문화연구와 문화유물론에 대한 소개서 두 권, <문화유물론의 이론적 전개>(현대미학사, 2005)와 <영미 문화연구>(문화과학사, 2000) 정도만을 따로 적어놓기로 한다. 물론 홀 등이 참여한 '교과서' <현대성과 현대문화>(현실문화연구, 2001)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더불어, 최근에 대학에서 각광받고 있는 '문화콘텐츠학'이라는 게 실상은 '이데올로기학'으로서의 '문화연구'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거세'한, 그러니까 '뇌관'을 빼놓은 연구라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해두자. 언제부터인가 대학에서의 학문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가축화되었다(이런 현상이 '큰 목소리'로 상쇄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번째 책은 우리를 또다른 전쟁터로 안내한다. 마크 몬모니어의 <지도전쟁>(책과함께, 2006) '지리학' 분야의 책으론 상당히 오랜만에 꼽아보는 듯하다. 그간에 <인문지리학의 시선>(논형, 2005) 등의 책들이 출간됐다. '메르카토르 도법'을 둘러싼 '전쟁'을 다루고 있는 책의 내용은 이렇다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가 구체인 지구를 평면 위에 재현한 것인 까닭에 왜곡이 생기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지도들이 '메르카토르 도법'을 따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페터스 도법'이라는 또다른 도법이 등장하여 꾸준히 메르카토르 도법을 공격해 왔다고 한다. 2001년 방송된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에 등장한 페터스 도법을 따른 지도가 그 예. 이 책이 말하는 '지도전쟁'은 바로 이 도법 사이의 오랜 논쟁을 뜻한다. 400년 전 메르카토르 도법을 만든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 헤라르뒤스 메르카토르는 어떤 인물이었고, 이 도법에 담긴 세계관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서 지금의 가장 대표적인 평면지도 도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등을 본격적으로 상세히 파헤친다."



메르카토르도법의 세계지도라는 건 사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지도이다. 그리기에도 가장 쉬워서, 지리 시간에 한번쯤은 가로줄, 세로줄을 그어놓고 지리부도의 지도를 베껴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모눈종이에다 그렸던가?).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자연'으로서의 도법이었지만, <지도전쟁>은 그 도법이라는 '문화'를 둘러싼 오랜 논쟁을 다룬다. 이 도법에 담긴 '세계관'이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의 '순진한' 학생시절 또한 잠시 도마에 오르게 되는 건 아닐는지?

 

 

 

 

최근에 유독 주목할 만한 평전들이 많이 출간됐다. 바사리, 사드, 알카포네, 노신, 파스퇴르 등이 물망에 올라 있는 평전들인데, 내가 다섯번째 책으로 고른 건 롤랑 드 몰레가 쓴 <조르조 바사리>(미메시스, 2006)이다. '희소성'을 고려했기 때문에 선택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메디치가의 연출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16세기의 이 걸출한 미술가이자 미술사가인 바사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저자 야코프 브르쿠하르트가 "바사리와 그의 너무나도 중요한 저서가 없었던들, 북부 유럽, 더 나아가서 유럽 전체에는 아직도 미술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언급하고 있는 책은 흔히 <미술가 열전>이라고 줄여서 불리는 책으로 이미 오래전에 탐구당판으로 완역본이 출간된 바 있고, 축약본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한명출판사, 2000)도 나와 있는 책이다(이 책은 몇달 전에 구입한 바 있는데, 저자가 '바자리'로 돼 있다. 내가 본 다른 미술책들에도 '바자리'로 표기돼 있는데, 어느쪽이 맞는 표기인지 모르겠다).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에는 1400년부터 186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문화를 주도해온 '재현/모방' 패러다임을 아예 '바사리 내러티브'라고 부름으로써 바사리의 미술사적 의의를 다시 확증해주고 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으로 치자면, 그가 미술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서양철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동양철학에서 주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버금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개에 따르면,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 출간된 <미술사 열전>으로 서양 미술사의 거대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르네상스 전후기 이탈리아 미술 전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르네상스'와 '고딕' 등의 표현을 처음 사용하는 등, 미술사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명한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조르조 바사리에 대한 평전으로서, 미술사서를 써낸 그의 면모 뒤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가와 건축가로서의 활약상에도 주목하여 그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그려낸다. <미술가 열전>을 써낸 과정은 물론,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천정화, 우피치 궁 등의 비롯한 프레스코 대작들과 건축물을 짓고, 피렌체 공국의 문화예쑬 사업을 주도한 행정가로서의 면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과 정치,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묘사함과 동시에, 회화, 건축, 장식 작품, 화가, 조각가, 행정가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넘나들며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바사리의 심리와 인간적 면모를 흥미롭게 그렸다."

 

 

 

 

사실 책에 대해서는 비전문가의 나의 참견이나 간략한 소개보다 미술사학자 노성두의 서평을 참조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겠다. 한겨레(06. 04. 28)에 실렸던 서평을 대략 옮겨오기로 한다(서평자는 르네상스 서양미술에 관한 국내의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저역서를 갖고 있다).

-르네상스나 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바사리는 포기할 수 없는 전범이다. 처음 바사리를 만났을 때 나는 한 마리의 행복한 종달새가 된 느낌이었다. 종달새는 단박에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시골목동 조토가 곱돌을 들고 너럭바위에 양의 모습을 쓱쓱 긁어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르노강을 따라 신나게 날아올라서는 괴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얹기 위해 석재를 들어 올리는 거중기 그늘 아래로 찾아들어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엠폴리를 거쳐 빈치의 외딴 마을 무성한 올리브 나뭇가지에 앉아서 소년 레오나르도가 짓궂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버지를 놀라게 할 끔찍한 악룡을 방패에 그려 넣는 것을 훔쳐보며, “이제 미술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이다.



-바사리는 1550년에 ‘아레초의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토스카나어로 저술하였으며, 그들의 예술에 대한 유용하고도 필요한 서문이 포함된, 치마부에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탁월한 이탈리아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라는 아주 긴 제목의 책에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전기 작가이다. 책 제목이 너무 길어서 보통은 ‘예술가 전기’라고 줄여서 부른다. 고대 이집트부터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중세를 거치면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출몰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기록한 전기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술작품은 다락같이 떠받들었어도 정작 작품의 생산주체인 예술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찬밥 신세였던 것이다.

-가령 서기 1세기 로마의 군인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서 기억할 만한 조각가, 건축가, 화가들의 작품과 일화를 열거한다. 그러나 철광석의 채굴과 정련을 다루면서 청동조각가를 언급하고, 광물의 성질을 조사하다가 안료를 채취하는 법과 화가들의 일화를 슬쩍 건드리고 가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바사리는 정당한 의미에서 최초의 미술사 기록자이자 ‘미술사학의 아버지’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사리의 빛나는 저작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술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독일 미술사학자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이 책은 바사리의 삶을 다룬 평전이다. 바사리의 저작이 예술가가 쓴 예술가들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전기 작가에 대한 전기인 셈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관념적 꼬리 물기가 미술의 재현 형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잘 알려진 대로 매너리즘 시대였다. 바사리가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16세기 토스카나의 예술에 매너리즘 조형의 세례를 쏟아 부었던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글쓴이 롤랑 르 몰레는 가장 적절한 평전의 대상을 골랐다고 불 수 있다.

-바사리의 업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소묘, 회화, 프레스코와 건축에 이르는 작품목록은 훑어보기에도 기가 질린다. 완전한 알레고리의 우주로 불리는 카사 바사리의 장식에 숨겨진 수수께끼는 지금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전기 작업에 등장하는 고딕양식, 비잔틴 양식, 매너리즘, 소묘 예술, 단축법 등 주요 미술용어들은 훗날 양식사를 밝히는 등불이자 미술사학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고대 예술의 부활, 곧 르네상스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를 사용한 것도 바사리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바사리는 왜 ‘부활’을 필요로 했을까? 그가 꿈꾸었던 부활의 참뜻은 무엇이었을까?

-바사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았다. 이탈리아의 가장 참담한 역사를 목격하고 인정해야 했던 불운한 운명이 이탈리아 예술의 운명을 밝히는 책을 써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들린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종교적 반목, 터키와 스페인의 무력분쟁,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 앞날을 알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위기상황에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수백 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정파를 나누어 모이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했다.

-1527년 로마 대약탈 이후,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분열된 도시국가들을 통합하고 단일국가의 기틀을 형성하는 일은 차치하고 당대를 호령하던 천재 예술가들이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서 조국을 등지고 유랑을 시작하는 막바지 상황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바사리의 심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이 순간 바사리는 부활을 꿈꾼다. 그것은 지난 콰트로첸토의 은성했던 황금시대에 관한 희미한 기억이었다. 현실의 역사가 절망을 노래하는 후렴구의 끝자락에서 예술가의 지친 영혼을 이끈 것은 예술가의 삶을 기록하는 전기 작업이었다. 이탈리아의 예술을 기록하고 망각의 늪에서 건져내어 기억의 전당에 헌정하는 작업은 이탈리아의 입술에 예술의 입김을 불어넣어 사위어가는 영혼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무모한 시도이기도 했다.



-예술을 통해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터 잡기의 삽질은 고대 로마의 모범에서 출발한다. 바사리는 고대의 폐허로부터 빛나는 재건을 음모했던 콰트로첸토의 예술정신을 잊지 않았다. 고대 로마는 다름 아닌 이탈리아의 선조들이 남긴 유산이었다. 르네상스의 장인들이 고대 예술의 모방을 통해 중세의 ‘야만적’ 양식을 극복하는 과정은 하나의 이탈리아라는 정치적 이념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상징적 지표와 다름없었다. 바사리는 고대를 예술의 완전한 실현으로, 중세를 예술의 죽음으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예술의 새로운 부활로 읽는다. 조형예술의 역사서술에 종교적 구원사의 형식을 덧씌운 것이다.

-이 책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이자 초유의 예술가 전기를 완성한 바사리의 삶의 자취를 유년기부터 임종 그리고 무덤에 누운 뒤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더듬는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사리의 삶의 방식이다. 천재와 예술적 영감의 가치를 가장 높게 쳤던 매너리즘 시대에 바사리는 근면과 성실을 존재의 덕목으로 삼았다. 비웃음을 사기 딱 좋았을 것이다. 바사리의 인문적 토양은 무수한 기록과 증언의 수집과 정리에서 돋보인다. 수집된 정보들이 예외 없이 그의 두 눈과 두 다리를 통해서 검증된 다음에야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르네상스 예술의 굳은 혀를 풀어준 것은 부지런함과 지칠 줄 모르는 발품이었던 것이다.

06. 05. 05-06.

P.S.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비롯한 몇몇 소설들이 소개대상에서 빠졌는데, 조만간 따로 페이퍼를 쓰거나 리뷰를 쓸 예정이다. 할말은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은 짧다. 책에 대한 '수다'를 떠는 데만으로도, 하물며 '학문'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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