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라이터즈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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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타인의 운명을 흔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듯이, 또는 키플링이 말한 소원의 집에 소원을 빌면 고통을 가져올 수 있듯이. ‘고스트라이터즈’는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의 삶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적나라한 표현은 읽는 이의 손가락을 바쁘게 하지만, 그 저변에는 타인의 일을 하면서 자신은 드러내지 못한 채 망령처럼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이 있고, 작가로서의 고뇌와 태도, 그들의 생활에 대한 단면이 있고, 무엇보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고요히, 하지만 묵지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래부터 약간의 스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작품 속 고스트라이팅 능력이 타인에 대한 일반적인 소원 성취 능력과 다른 점은, 타인에 대한 상세한 이해와 정보 없이는 효력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소원이 담긴 글을 상대방이 접해야 한다는 조건은, 소설에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치면서 동시에 인간관계에 있어 필수적인 ‘작용’을 나타낸다. 고스트라이팅 현상에 대해 암시하는 부분 부분을 통해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고스트라이팅 현상을 백 프로 믿지 않는다. 믿는 건 강태한이다. ...
“아마도 자기 고스트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인 것 같아. 그리고 둘 사이의 이야기에 의해 서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거고.” (p.262)

“... 본인이 안 믿으면 그쪽이 뭘 써도 상관없거든요. 날 봐요. 난 필요할 때만 믿어요.” (p.318)

 

 즉, 작품에 나오는 고스트라이팅 능력은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대하고 의지하는 어떤 것(타인, 사회, 세상 등)과의 관계에서 오는(받는) 작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스트라이팅 능력은 엄밀한 조사와 정보를 통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구현하며, 그 글은 상대가 읽어야 효력을 발휘한다. 이는 곧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깊이 의식하게 되면 그 일 또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사건이다. 따라서 그 능력의 초자연적 성질을 제외하면,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했듯이, 이러한 외적 작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된다.

 

“고스트라이팅은 읽는 사람이 중요한 거라고. ...”
“믿음을 가지고 읽어야지. 그리고 세심하게 읽어야 해. 진심을 담아 쓴 글을 진심으로 읽어야 한다고.” (p.331)

 

 B의 운명을 빌어주는 A가 있고, A와 B 사이의 관계에 마음이 담긴 특정한 작용이 있고, 그 작용을 강하게 신뢰한다면 바람은 이루어진다. 강한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태한에게 그런 일이 닥쳤던 것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정황이 충분했고, 사건의 흐름을 믿고 행동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믿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음을 전제로 한 강한 개연성 아래 만들어진 미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듯이 허구는 적어도 말이 돼야 하고, 말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일어날 일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김작가는 성미은이 자신을 위해 글을 써줄 것이라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글을 다시 쓸 수 있었다. 진정한 관계는, 기도와 같은 타인의 정당한 바람과 올바른 믿음 사이에서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 일방향적 '작용'은 '건설적 상호작용'이 된다. 사람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여배우와 김작가 사이에, 또 김작가와 성미은 사이에, 계속해서 이어지며 인간 사회의 방대한 네트워크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구성한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연결이 있고 또 그에 해당하는, 혹은 더 많은 외부 작용이 있다. 결국,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자신의 삶을 주체화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결정한다. 김작가와 오진수는 남의 고스트로 살면 자기의 글을 못 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믿음일 뿐 사실은 아니다. 나는 김작가가 오진수의 말을 무시하고 작가로서의 길을 확고하게 걸었다면(그놈의 술독에 빠져 살지 않고) 라이터스 블록을 깨버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작품 속에서는 고스트라이팅 능력의 영향력이 강하게 묘사되긴 한다). 삶의 의욕을 잃은 김작가가 여배우의 고스트로는 훌륭하게 역할을 하지만 자신의 글은 써내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방향을 잃은 채 살아갈 때 타인의 고스트로만 그 역할을 다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연결과 너무나 시끄러운 주변의 재잘거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믿어야 할 것만 믿는 삶을 살지 못하고, 강태한처럼 믿지 말아야 할 것마저 믿어버리고 마는 우리가 있다. 삶에서 우리가 주체로 서지 못하고 남의 고스트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은(사회적 구조로 인한 어려움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관계로부터 들어오는 ‘작용’(고스트라이팅으로 인한 압박)을 발전적이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닐까.
 사회적·집단적 가치와 타인의 부정적 시선,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외적 작용에 과도하게 신경 쓰고, 믿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진정한 관계는 형성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삶이 히죽이는 망령에 휘둘리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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