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리뷰는 소설의 내용 일부를 스포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책을 먼저 읽으시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토리가 강하면서도 깊은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너무도 아름답다. 이제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p.98)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누구도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시간을 무시한 채 영원히 살 수 없다. 이러한 한계는 절대적이므로 인간은 주어진 시간을 좀 더 길게 영위하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다른 사람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대신 일을 부탁하는 것이나 틈틈이 짬을 내어 뭔가를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시간을 늘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한 번의 삶을 더 사는 것이다. 타임머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능할까? 삶의 목표와 즐거움은 성취욕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타인의 삶에 개입하여 조종하고 성취감을 느낌으로써 또 다른 시간을 영위할 수 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소설 ‘파우스터’는 재력과 권력을 가진 나이 많은 이들이 젊은이들의 감각을 똑같이 느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삶을 조종하면서 벌어지는 긴장과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다. 동시에 자유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트루먼쇼에서처럼 자신의 생활이 속속들이 방송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보는 장면과 들이마시는 향, 음미하는 맛을 누군가가 나 몰래 즐긴다는 사실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남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경험이 허락 없이 공유된다는 사실이 결코 유쾌할 리 없다. 삶의 경계가 언제라도 침범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내 감각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후원자가 되어 내 삶을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의 길로 이끌어준다면 어떨까. 어떤 이는 감각의 공유보다 성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딱히 악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명확한 꿈을 가지고 있고 파우스트들이 (마치 자신의 꿈인 양) 그들의 꿈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함에도, 파우스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길 원한다.

 

 왜 그들은 손쉬운 성공의 길을 마다하고 굳이 불확실한 길을 가려는 것일까.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야구 선수도, 미술계의 우아한 명사도, 그들의 눈앞에 찬연히 펼쳐져 있는 성공 가도를 분명히 보면서 말이다. 그것은 감각의 공유 및 인생의 성취가 자신만의 온전한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라던 꿈에 대한 대가로서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이 ‘나’라고, 자신의 삶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놈이 어떤 영향을 주었건 난 아무것도 대체하지 않는다. (p.136)

 

 자신의 의지로 일구어 왔다고 생각한 삶이 실은 타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삶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을 것이다. 그 삶에는 꼭두각시의 잔영과 씁쓸한 웃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빠져있다.
 또한 타인의 의지로 성취한 꿈은 자신의 삶에 계속해서 타인이 침범할 여지를 남긴다. 한번 금단의 열매를 먹어 성취감을 맛보면 그 열매 없이는 무언가를 할 의지를 잃게 된다. 내 삶에 나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를 기다리는 꼴이 된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가능성을 알았기에 준석과 은민은 남이 닦아둔 편한 길을 따라가기 보다는, 성공은 불분명하지만 자유로운 길을 택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떨까. 자유로울까? 현대사회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작품에서 파우스팅과 넛지, 백업을 통해 주인공의 삶이 영향을 받듯이 우리의 삶은 주변의 소음으로 인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관계망과 전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뉴스, 지인들의 이야기, 사회에 팽배해 있는 가치관에 의해 우리의 생각은 영향 받고 선택은 뒤바뀐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 않고 스스로를 망치던 시간. 오직 나만의 선택이었을까? (p.62)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걱정되어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될 것 같아서,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과 선택을 고수하지 못하고 외부의 목소리를 따르는 삶을 산다. 이 모든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우리는 타인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사회가 속삭이는 성공의 길을 걷는다. 단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삶이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근과 남선을 파우스팅에 빠져들게 한 것은 훤칠한 외모나 젊은 여대생의 삶처럼, 자신은 결코 가져보지 못한 어떤 종류의 것에 대한 욕망이었다. 이러한 결핍과 욕망은 외적 요인으로 우리 삶의 방향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외부의 목소리 없이는 결핍이 되지 않을 요건도 주변의 끊임없는 채근과 주입으로 우리에게 결핍 상황임을 인지하게 만든다.) 사회적 통념에 의해 자극되는 욕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태근은 준석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었다. 다만 준석 역시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p.375)

 

 우리는 사회라는 영역을 벗어나거나 주변의 관계·환경으로부터 떨어져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욕망으로부터도 단절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준석처럼 인지하는 것이다. 인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무엇이, 어떤 목소리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어떠한 욕망이 외부의 속삭임이 아니라, 내 자아의 목소리인지를.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온전히 가야 한다. 준석이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모든 호의와 신의를 의심했던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내가 하는 선택과 행동이 진정 내가 바라던 것이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외적·내적 욕망 사이의 투쟁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통념과는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늘 이기거나 지거나였다. 지금 그는 승패에 대한 단답을 할 수 없다는 게 신기했다. 그는 은민의 질문을 곱씹으며 자신의 인생 최고 투구가 승패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459)

 

 삶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주체였는지가 중요하다. 주체라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준석과 은민은 성공의 길을 벗어나 방법은 다르지만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삶을 택했다. 준석은 투쟁을 통해 꿈을 이루면서 동시에 굴레에서 벗어났다. 은민은 도망쳤지만 자신의 삶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동안 ‘방황’하겠지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p.134) 이 작품은 성공이란 사회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방황하는 인간에 대한 공감을 나누고자 한다. 인간에게 방황이란 자유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준석이 은민에게 물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진짜로 살아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자신이 노예란 사실을 아는 겁니다. (p.391)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떠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스트라이터즈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타인의 운명을 흔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듯이, 또는 키플링이 말한 소원의 집에 소원을 빌면 고통을 가져올 수 있듯이. ‘고스트라이터즈’는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의 삶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적나라한 표현은 읽는 이의 손가락을 바쁘게 하지만, 그 저변에는 타인의 일을 하면서 자신은 드러내지 못한 채 망령처럼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이 있고, 작가로서의 고뇌와 태도, 그들의 생활에 대한 단면이 있고, 무엇보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이 고요히, 하지만 묵지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래부터 약간의 스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작품 속 고스트라이팅 능력이 타인에 대한 일반적인 소원 성취 능력과 다른 점은, 타인에 대한 상세한 이해와 정보 없이는 효력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소원이 담긴 글을 상대방이 접해야 한다는 조건은, 소설에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치면서 동시에 인간관계에 있어 필수적인 ‘작용’을 나타낸다. 고스트라이팅 현상에 대해 암시하는 부분 부분을 통해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고스트라이팅 현상을 백 프로 믿지 않는다. 믿는 건 강태한이다. ...
“아마도 자기 고스트를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인 것 같아. 그리고 둘 사이의 이야기에 의해 서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거고.” (p.262)

“... 본인이 안 믿으면 그쪽이 뭘 써도 상관없거든요. 날 봐요. 난 필요할 때만 믿어요.” (p.318)

 

 즉, 작품에 나오는 고스트라이팅 능력은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대하고 의지하는 어떤 것(타인, 사회, 세상 등)과의 관계에서 오는(받는) 작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스트라이팅 능력은 엄밀한 조사와 정보를 통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구현하며, 그 글은 상대가 읽어야 효력을 발휘한다. 이는 곧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깊이 의식하게 되면 그 일 또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사건이다. 따라서 그 능력의 초자연적 성질을 제외하면,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했듯이, 이러한 외적 작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된다.

 

“고스트라이팅은 읽는 사람이 중요한 거라고. ...”
“믿음을 가지고 읽어야지. 그리고 세심하게 읽어야 해. 진심을 담아 쓴 글을 진심으로 읽어야 한다고.” (p.331)

 

 B의 운명을 빌어주는 A가 있고, A와 B 사이의 관계에 마음이 담긴 특정한 작용이 있고, 그 작용을 강하게 신뢰한다면 바람은 이루어진다. 강한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태한에게 그런 일이 닥쳤던 것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정황이 충분했고, 사건의 흐름을 믿고 행동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믿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음을 전제로 한 강한 개연성 아래 만들어진 미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듯이 허구는 적어도 말이 돼야 하고, 말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일어날 일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김작가는 성미은이 자신을 위해 글을 써줄 것이라 강하게 믿었기 때문에 글을 다시 쓸 수 있었다. 진정한 관계는, 기도와 같은 타인의 정당한 바람과 올바른 믿음 사이에서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 일방향적 '작용'은 '건설적 상호작용'이 된다. 사람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여배우와 김작가 사이에, 또 김작가와 성미은 사이에, 계속해서 이어지며 인간 사회의 방대한 네트워크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구성한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연결이 있고 또 그에 해당하는, 혹은 더 많은 외부 작용이 있다. 결국,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자신의 삶을 주체화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결정한다. 김작가와 오진수는 남의 고스트로 살면 자기의 글을 못 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믿음일 뿐 사실은 아니다. 나는 김작가가 오진수의 말을 무시하고 작가로서의 길을 확고하게 걸었다면(그놈의 술독에 빠져 살지 않고) 라이터스 블록을 깨버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작품 속에서는 고스트라이팅 능력의 영향력이 강하게 묘사되긴 한다). 삶의 의욕을 잃은 김작가가 여배우의 고스트로는 훌륭하게 역할을 하지만 자신의 글은 써내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방향을 잃은 채 살아갈 때 타인의 고스트로만 그 역할을 다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연결과 너무나 시끄러운 주변의 재잘거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믿어야 할 것만 믿는 삶을 살지 못하고, 강태한처럼 믿지 말아야 할 것마저 믿어버리고 마는 우리가 있다. 삶에서 우리가 주체로 서지 못하고 남의 고스트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은(사회적 구조로 인한 어려움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관계로부터 들어오는 ‘작용’(고스트라이팅으로 인한 압박)을 발전적이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닐까.
 사회적·집단적 가치와 타인의 부정적 시선,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외적 작용에 과도하게 신경 쓰고, 믿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진정한 관계는 형성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삶이 히죽이는 망령에 휘둘리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