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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4
김수경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0월
평점 :
'고수의 진짜 싸움은 바로 지금부터!'
처음에는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말은 세상이 있고 나서 나중에야 생긴 것이니까.’, ‘말이란 그런 것이다.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하려고 보면 조금 어긋난 것 같고, 딛으려고 하면 자꾸만 미끄러지는. 해놓고 보면 거품 같고, 전하려고 하면 물방울처럼 달아나버리는. 허나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은 말을 할 수밖에.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니.’라는 구절을 읽고, 한 장 한 장 읽어갈수록, 나는 고수라는 주인공에게 푹 빠져 들어갔다. 고수는 2년 전에 집을 나와 대학로에서 길거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노는 장소, 심지어 잠자리까지도 모두 대학로 안에서 생활했다. 대학로를 벗어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로는 고수의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대학로에서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쓰지 않고 서로 별명을 붙여주곤 했는데, 리듬을 몸으로 느낄 줄 아는 녀석이라 해서 히로가 ‘고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히로’는 영웅, 즉 히어로라는 뜻이라고 한다. 대학로에서만 생활을 하던 고수는 히로에게 네 시간 반 정도 걸린다는 지리산 근처의 지방으로 자신의 친구에게 물건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고수는 대학로를 벗어난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첫 길거리 생활에서부터 도움을 준, 자신의 영웅인 히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부탁을 받고 지방에 내려가게 되었고, 지방에 도착한 고수는 어떤 사내 무리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 무리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다가 길을 잃게 되었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한 할멈을 만나게 된다. 지리산 자락에서 사는 할멈은 힘이 무지무지 셌다. 멧돼지도 맨 손으로 잡는다며 고수에게 자랑도 했다. 고수는 그 말을 믿는 둥 마는 둥 했지만, 할멈의 공격에 뼈도 못 추린 고수는 할멈의 힘을 인정하게 된다. 할멈은 산 속에서 길을 잃은 고수에게 잠잘 곳과 밥을 제공했으며, 자신의 손자처럼 대해줬다. 고수와 할멈은 고수를 찾는 사내들을 피해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지리산에는 엎친 데 덮친 격 눈까지 내렸다. 그래서 고수는 꼼짝없이 지리산에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겨울을 보내면서 가족을 회상하고, 길거리 생활을 회상했다. 어느 날 산에서 길을 헤매다 다친 남자와 그 남자를 부축해 온 약초꾼이 눈 내리는 산에서 생활을 하던 할멈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어딘가 수상했던 한 남자. 그 남자는 알고 보니 고수의 뒤를 쫓아온 형사였다. 그 형사는 여자아이들을 팔아버리고, 마약을 사고 파는 일에 까지 관여하고 있던 히로를 잡기 위해 뒷조사를 하던 중에 히로의 심부름을 하던 고수의 뒤를 쫓은 것이라고 했다. 고수는 믿고 따랐던 자신의 영웅인 히로에게 큰 배신감이 들었고, 고수가 진심으로 지켜봤던 화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히로의 양면을 알게 된 후 고수는 아버지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남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참지 못하는 인간. 그 화풀이를 아무에게나 해대는 인간. 히로와 아버지, 둘은 똑같다고 말이다. 고수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폭력을 벗어나서 나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반드시 강해지고 싶었다고. 집을 나오고 거리에서 2년 넘게 살면서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는 줄 알았던 고수는 히로의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이렇게 말했다.
‘조금은 강해져가는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게 허상이었다. 나는 그저 또 하나의 폭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거짓에 의존하고 있었다. 히로의 빤한 가면 뒤에 숨어서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한낱 거짓말 같았다. 꾸며낸 이야기 같기만 했다. 무엇보다 내가, 내 삶이 거대한 거짓말 같았다. 나는 과연 히로를 믿어왔을까? 그 애를 진짜 내 친구로 여겼을까? 그저 스스로 청맹과니가 되기를 자처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감고만 싶었던 건 아닐까? 어째서 내 삶에는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어째서 내 삶에는 폭력과 위선, 천박한 배신만이 가득할까. 나는 내가 왜 이 구깃구깃한 삶을 더 견뎌나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히로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 고수. 고수의 마음을 잘 나타낸 구절이 있었다.
마음이 아려왔다.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가면서 지칠대로 지친 고수가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고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고수가 집에서 받았던 상처를 감싸준 사람은 없었지만, 히로에게서 받은 배신감과 상처를 감싸 준 사람들은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서 잠 잘 곳과 음식을 제공하며 고수를 손자같이 대해준 할멈, 넉살 좋게 고수를 대해준 약초꾼, 진심을 다해 무술을 가르쳐 준 형사까지. 배신감에 고통 받던 고수가 재기하면서 했던 말이다.
'이제 나는 나의 북을 치고 있다. 나의 리듬을 치고 있다. 나의 싸움은 더 이상 히로를 향해 있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 싸울 것이다. 그게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든, 히로의 얼굴을 하고 있든, 혹은 화산의 얼굴을 하고 있든, 나는 도망치지 않겠다. 모른 체하지 않겠다. 고개 빳빳이 들고 당당히 맞서리라.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별처럼 빛날 것이다. 나는 머나먼 시원부터 이어져 내려온 나의 우주 그 자체이니까.'
집에서도 상처받고 자신이 믿었던,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배신 받은 고수. 할멈에게 받은 북은 의지할 곳 없는 고수를 보호해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 북에서 나는 북소리는 고수를 항상 지켜줄 것이라고 할멈 또한 말했다.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 점점 이상해져갔던 어머니, 철썩 같이 믿었지만 처음부터 고수를 속였던 히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더러움을 선택했던 화산, 적을 사랑하는 방법의 기술을 알려준 형사, 거칠지만 따뜻하게 고수를 감싸주고 지켜줬던 할멈, 쿨하고 넉살 좋은 약초꾼, 석 달 동안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눈 덮인 흰 산까지……. 모두 고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고수는 지리산에서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고, 어떤 일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눈이 녹고 지리산에 사람들의 흔적이 나타나고, 정 들었던 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고수는 망설임 없이 대학로로 향했다. 그리고 히로가 춤을 추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당당하게 말한다.
"어때? 헷갈리지? 다른 아이들도 너 때문에 그렇게 헷갈렸어. 엉뚱한 데를 디디기도 하고, 도무지 어떤 리듬에 맞춰야 할지 몰라 허둥댔지. 너의 그 거짓 가면 때문에 아이들의 발이 마구 꼬였다고. 이제 네가 나에게 맞출 차례야."
고수의 많은 명언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말이었다. 고수의 확신에서 당당함이 느껴졌고, 히로의 정곡을 찔러버리는 말이 너무 통쾌했다. 고수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히로를 보기 좋게 꺾어버렸다. '히로가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당당하게 겨뤘다. 지리산에서 겨울을 보내고 더 굳세어 돌아온 고수의 모습을 보고 내가 더 기뻤고, 고수에게 뼈도 못 추리는 히로를 보며 속이 시원했다.
"히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고수가 진짜 싸움을 시작한다고!"
나는, 고수의 멋진 선전포고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모두 나와 다를 게 없다. 모두가 때로는 두려움에 떨고, 막막함에 길을 잃고, 외로움에 눈물도 흘린다. 그 모든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생의 활기가 넘쳤으면 좋겠다. 우리 유전자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원시의 활기, 야생의 활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거침없이 생의 에너지를 뿜어냈으면 좋겠다. 나는 이 소설에서 그런 활기를 그려내고 싶었다. ' <김수경 작가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