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방과 표현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오늘은,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시학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시학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예이론서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모방이론과 시인추방론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를 쓴 목적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지, 문예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말 그대로 시(비극)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평론을 담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문예이론서인 셈이지요. 

플라톤의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이성(logos)을 통해 이데아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이 사는 공동체에 반영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주요관심사가 철학과 정치학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룬 영역은 너무 많아 한마디로 요약할 수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고 있는 분야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동물학, 심리학, 정치학, 윤리학, 논리학, 형이상학. 역사, 문예이론, 수사학 등 매우 다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자랑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학문을 한 사람이 정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영웅과 천재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전능한 힘과 전능한 지혜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합니다. 그리고 전능한 힘과 지혜를 가진 그 사람을 추종함으로써 그의 힘과 지혜를 공유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전능한 힘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환상 속에서 바로 영웅주의와 권위주의가 싹틉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지구의 중력에 영향을 받듯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제약을 받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남들보다 힘과 지혜를 더 가진 사람도 있고 덜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라는 종의 차원에서 볼 때, 그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이룬 일은 다른 사람도 따라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군가의 독창적인 생각도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특정한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의 업적은 다음 세대로 계승될 수 없고 특정한 누군가만 할 수 있는 생각이라면 그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지전능해서 그 모든 종류의 학문에 정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러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새로운 철학을 창시하거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철학과 과학적 지식을 분류하고 종합했던 훌륭한 편집자 혹은 주석가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정치학과 시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윤리학과 논리학은 제논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자연과학은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기간 동안 그에게 보내주었던 수많은 문헌과 표본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영어에는 아리스토크래트(aristocrat)라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의 뜻입니다. 아리스토크래트는 귀족주의자, 귀족티를 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보면 알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마디로 귀족주의자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가난한 시민이었고 플라톤은 몰락한 귀족 정치가 집안 출신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의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할아버지였던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마케도니아 궁전과 인연을 갖게 됩니다.  기원전 367년 17살 되던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갑니다. 아카데메이아가 바로 우리가 학문의 전당이라고 부르는 아카데미입니다. 17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54세가 된 대철학자 플라톤과 만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관계는 기원전 348년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계속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세계는 플라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알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젊은 나이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워낙 책벌레였던 그는 책을 모으는데 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자기보다 부유하고 더 많은 책을 소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부러움과 함께 시기심을 느꼈나 봅니다. 플라톤은 책에 의존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 수집을 비판했고 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늙은 염소처럼 지혜가 빠져나갔다고 빈정댔다고 합니다.  스승에 대한 이런 경쟁심 때문이었는지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스승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 맞서는 학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리케이온입니다. 이 리케이온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은 장서들을 보관했는데 그 장서가 얼마나 많았던지 실제적으로 리케이온은 아테네의 공공 도서관 구실을 합니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에 아카데메이아 분교를 세우기 위해 떠납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소스의 왕 아타르네오스와 절친한 친구가 됩니다. 아소스의 왕 아르타네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신의 조카딸과 결혼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왕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343년 말(또는 기원전 342초) 42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13세 된 그의 아들을 가르쳐달라는 초청을 받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로 가, 3년 동안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을 가르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쳤던 그 아이가 훗날 마케도니아,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 북인도에 걸쳐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했던 그런 학생은 아니었지만, 스승의 학술 연구에는 대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동방 원정에 군인뿐만 아니라 예술가, 시인, 철학자, 역사가, 측량기사, 기술자, 지리학자,수로학자(水路學者), 지질학자, 식물학자들도 원정에 데리고 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과 함께 동방원정에 참여한 문인들과 학자들이 수집한 각국의 문헌과 자료들은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냈습니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당시 모든 문헌과 자료의 최종 집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리스 고전 철학(다시 말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 안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과 맺고 있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50세가 넘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돌아와, 스승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와 견줄만한 학교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리케이온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에 지붕 덮인 산책로를 거닐면서 학생들을 가쳤습니다. 그리스어로 이런 산책로를 페리파토스(peripatos)라고 하는데, 이 말에 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페러퍼테틱(peripatetic)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하지요.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계는 알렉산더의 후계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사이에도 이어집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그의 부하들에 의해서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세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통치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들의 그의 제국을 나누어 통치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을 별로 없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왕이 되어버린 그들은 통치에 필요한 지식들을 관리해주고 자신의 후계자를 지도해줄 학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초청했던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소요학파였습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활동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한 뒤에도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학문을 체계화하고 보급한다는 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낫지만 독창성면에서 그는 스승 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미학 역시 플라톤의 모방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 세계를 이데아의 모방물로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이 이데아의 모방물에 불과한 현상 세계를 모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현상 세계에서 ‘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세계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방한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전에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Historia)에 대비해 미토스(Mythos)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미토스는 신화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미토스를 이야기 혹은 허구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미토스에는 신화, 이야기, 허구라는 뜻보다 더 보다 많은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토스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개연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표현하려는 미토스, 다시말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개연성은 무엇일까요? 미토스는 일상적인 경험과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말합니다. 칸트나 료타료는 그것을 숭고(sublime)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것을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미토스는 결코 모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개연성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이 실재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미토스의 모방일 수 있다고 한 것은 예술이 존재하는 사실을 재현해 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표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예술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모방한다는 모방 이론(혹은 재현이론)의 시초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는 표현 이론의 시초였던 셈입니다.  예술을 실재의 모방으로 보았던 플라톤이 예술의 중심에 미술을 놓았다면 예술이 실재 일어나지 않은 일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예술의 중심에 음악을 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현 예술의 제일 앞에는 미술이 있었고 표현 예술의 제일 앞에는 음악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이 예술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이 민중을 교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개인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6장에서 한 아래의 말은 문예이론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입니다.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을 통하여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은 신, 혹은 운명이라고 불리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고통당합니다. 비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개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대적인 힘에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과 공포를 통해 스스로의 감정을 정화(catharsis)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화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에서 발견한 가치였습니다.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원래 도덕적 의미로서의 순화(purificatio)라는 뜻과, 종교적 의미로서의 정화(iustratio), 또는 속죄 (expiatio)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적 의미로서는 배설(purgatio)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라는 말 속에는 도덕적인 순화와 종교적인 속죄 그리고 의학적으로는 쌓였던 긴장의 배설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인간의 격정을 자극하지만 인간의 격정을 광기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완화시키고 조절하고 해소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정화 과정을 통해서 천박한 자신의 감정을 고상하게 만듭니다.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존재하는 사실의 재현으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에 덧붙여 문학과 예술을 존재하지 않는 것의 표현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대립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모습을 바꾸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모방이론은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그리고 인상주의의 계보를 타고 내려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 이론은 낭만주의와 표현주의에 이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16세기 고전주의자들은 미의 이데아를 가정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술이 공포와 연민을 일으키는 숭고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사실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의 감상을 퇴폐로 규정지으면서 객관적이고 냉정한 눈으로 사회현실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20세기 표현주의자들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처럼 경험을 초월한 숭고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20세기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숭배하는 동구 쪽에서는 표현주의를 서구의 타락한 예술이라고 비판합니다.  21세기가 되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쪽에서 예술이 사회의 풍기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플라톤 같은 사람들도 있고 예술이 인간의 감정을 정화한다고 주장하며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것일까요? 예술은 존재하는 실재의 모방일까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표현일까요? 예술은 집단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인 것일까요? 정치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지독하게 사적인 것일까요? 그러나 예술은 그 모두이거나 그 모두를 뛰어넘는 어떤 것일 겁니다.

작가  / 류가미


 


 
Karel Boehlee Trio - Northern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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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잘남>은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지성사에 관한 연구 결과이다. 저자인 양승태 교수는 호메로스, 아르킬로코스, 탈레스, 피타고라스, 그리고 소피스트까지 이어진 그리스 지성사의 전개를 미토스가 에포스를 거쳐 로고스에 이르렀다가 레토라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토스는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일의 언어를, 에포스는 자아 의식의 언어를, 로고스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능동적인 인식 및 작용의 언어를, 레토라는 다른 인간의 언어를 의식한 외부로 향한 표현의 언어를 각각 표상하기 위해서 저자가 사용하는 명칭들이다.


앎의 형상과 잘남의 상호연계
역사에 관한 모든 서술에서는 예컨대 잡다한 사실의 더미 사이에서 어떤 것을 하나의 “흐름”이라고 확인할 것인지, 다양한 일과 물건들 사이에 무엇을 “관계”로 인식할 것인지, 나아가 그렇게 인식된 관계들 중에서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길 것인지와 같은 문제와 관련하여 서술자의 가치나 시각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역시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앎(sophia)에 관한 하나의 형상(idea)을 포착하고, 나아가 현실에서 잘살아 가는 일과 앎 사이의 연관을 이해하게 된 것을 지성사에서 하나의 경이적인 발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앎의 형상과 잘남(arete)의 형상을 상호 연계시켜 이해하면서 앎과 잘남을 추구하게 된 상태가 그리스 지성사에서 정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소피스트에 이르러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의 진정한 발전이 아니라 외부로 향하여, 남을 무조건 압도하고 남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정신활동의 역사”로 전락하였다고 한다. 저자의 의식 안에서 이러한 지성사의 전락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는 “지성의 빈곤”과 자연스럽게 결부되어 있다. 이처럼 전락한 상태의 지성과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할 관건은 곧 정신과 분리된 말이 어떻게 다시 그 주체로 돌아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곧 “현실 속에서 잘남을 위한 경쟁의 표현인 타인의 언어에 대한 압도가 과연 진정으로 무엇을 위한 압도이고 무엇을 위한 경쟁이나 투쟁인지”를 묻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결국 “‘자기 자신’은 무엇인가”, 즉 자아의 정체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지는 지적 탐구가 지성의 회복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투쟁을 할 때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중에 어떤 편이 나을까? 이 역시 결코 하나의 표준적인 정답이 있을 수는 없는 질문이지만, 대체로 목적을 알고 하는 투쟁이 모르고 하는 투쟁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투쟁의 목적이나 초점을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립성 논란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런 질문이 제기될 때 각각의 투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관해서 확정적인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은 전형적으로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각 가치가 자기 확장을 시도할 때에 발생하는 다툼에 해당하는 것이다.
누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든지 하나의 투쟁에 관해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보편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발가벗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투쟁의 쌍방 당사자들이 스스로 캐묻는 상황은 - 자의식의 매개 없이 벌어지는 발가벗은 투쟁과 비교할 때 -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에 관한 정답 겨루기라고 하는 (그리고 대개는 지능의 우열이라고 하는) 새로운 쟁점이 덧붙여져 투쟁의 갈래가 더욱 복잡해지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앎과 실제 삶 사이의 관계가 결코 일률적일 수 없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책은 서술에서 본질과 현상에 관한 헤겔 식 구분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정신의 자아 회복”이라는 문구에 대해 시비를 걸자면 자아와 정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 회복되기 전의 자아(또는 정신)와 회복된 후의 자아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자아인지, 애당초 자아를 회복한 정신과 자아를 회복하지 못한 정신을 분별하는 일반적 표준은 무엇인지 등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서 눈앞이 확 트이도록 표준적 주해서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국지성계, 소외 극복 등 과제
자아와 관련한 재귀적 언어들, “제 정신을 찾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다”, “소명을 알아차리다”, “계시를 받아, 본성의 울림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다” 등의 문구들은 각기 어떤 개별적인 맥락에서 서술 대상인 개인이나 행태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다. 개별적인 맥락으로부터 사상하여 마치 “자아 회복”의 표준적인 이상형이 보편적인 언어로써 일반화될 수 있는 듯한 방향으로 논의하는 순간 그때까지 남아 있는 모든 알맹이들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회화 작품에 대해서 “진품”을 운위하는 상황이란 예컨대 김홍도나 박수근이나 세잔의 특정 작품을 앞에 둔 상황을 말한다.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이라는 개별적인 맥락이 없는 상태에서 그 모든 개별성을 사상한 형태의 “진품”이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 지성사의 전개와 한국 지성의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저자는 한국 지성의 빈곤과 한국 대학의 위기를 지적하며 한탄하고 있다. “정신의 자아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성에서 빈곤한 것이 무엇인지, 한국의 대학이 어떤 점에서 위기인지를 묻는 일이 한탄보다 앞서야 할 것 같다. 한국 지성계의 “소외”라든지 “서구중심주의”를 고발하거나 질타하는 목소리는 자주 들리지만 막상 그것을 극복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여전히 요원한 과제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까닭도 이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 삶과 직결되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실존의 차원에서 우러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에 지성이 투자되지 못하고 단지 수학적인 도식에 의해 구성되는 일반관념을 준거로 삼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모든 일들을 “빈곤”과 “위기”로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소외의 결과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그리스 지성사에서 찾아내고 있는 미토스 - 에포스 - 로고스 - 레토라라는 흐름에 관해 메타 비평 한 마디를 덧붙이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선행하는 사회 형태의 순서로 가족-씨족-부족을 상정하는 표준적인 사고방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a) 국가도 부족도 씨족도 없이 가족만 있던 상태, b) 가족과 씨족은 있고 부족과 국가는 없는 상태, c) 가족, 씨족, 부족은 있지만 국가는 없는 상태, d) 가족, 씨족, 부족, 국가라는 개념들이 모두 지시대상을 가지는 상태 등 4가지 유형의 상태를 직접 또는 간접 증거를 통해서 관찰하고 나서 국가의 출현이 가족-씨족-부족-국가의 순서로 이루어졌다고 귀납적인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사실 경험적인 어떤 증거와도 상관없이 다분히 그가 익숙하게 사용하던 언어의 그림자로부터 구성된 것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고한 것이다. 그 보고가 역사적 사실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익숙한 언어의 그림자에 해당하는지 따질 능력도 관심도 없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수용됨으로써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족과 씨족과 부족과 국가 사이에 어떤 발생학적 순서가 있어야 한다면 그 순서는 우리가 속해 있는 관념의 체계 안에서 당연히 가족-씨족-부족-국가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가족보다 선행한다는 식의 명제는 전형적인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일 뿐,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를 사료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경험적 가설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 또는 자연계의 사실이라고 믿는 많은 발상들이 사실은 이런 언어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하는 르네상스 이래의 진보사관 역시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신화에서 로고스로” 지성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도식 역시 실제 역사의 증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신화 다음에 이성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계몽주의적 역사철학에서 무의식적으로 연역된 명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낳고 있다.

한국 지성계에 대한 발언 구체적이어야
이 책이 기원전 10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그 시대의 “실상”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들이 거의 모두 근대 이후의 서양 계몽주의의 인도를 받은 시선 및 테크닉에 의해서 발굴되고 수집되고 정리되었다는 점을 감안할지라도 특정 이론이나 이념과 무관한 “역사의 증거”를 그 시대 그리스에 관해서 찾아낸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저자에 대해서 궁금한 점은 과연 저자 본인은 자신의 기획을 어떻게 자리매김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저자처럼 한국의 지성에게 어떤 특별한 민족적 정체가 있어야 한다고 할 경우 특히 심각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만약 <앎과 잘남>이 저자의 가치와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 지성사를 사실적 증거에 입각해서 서술하고자 한 결과라면- 무엇을 사실로 보고 무엇을 증거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이치(logos)가 현대 서양의 고전학계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앎과 잘남>은 현대 서양의 고전학계에서 통용되는 이치를 한국 지성의 내면으로 수용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만일 이 책에서 이루어진 탐구가 (한국 지성계에 대해) 저자가 내놓고자 하는 실존적 발언에 의해서 인도된 것이라면, 그 실존적 발언이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이래 서양의 계몽사조가 고대 그리스의 지성을 현창한 배경에 깔려 있던 실존적 관심이 모두 하나의 일관된 체계 안에 통합되어야 할 이유는 물론 없지만,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실존적 입장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현실 속에서 탁월함(arete)의 표준 하나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그때 탁월함이란 하나의 보통 명사에 대한 일반적 정의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예의 형태로만 표상되고 구현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박동천 / 전북대·정치학




필자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근대정치사상의 토대> 등이 있다.
 




 Glauco Venier -  Rabbit’s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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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umno 2008-05-1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