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2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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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과 통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예 파편화되어 모든 개인들이 홀로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연결'에 지극한 열망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보면 거기엔 꼭 '관계'가 있더라. 아기 팬더들을 더할 나위 없이 아끼고 보듬는 사육사 할아버지, 이런 케미 저런 조합으로 불리는 아이돌 관계성, 소설/웹툰/드라마와 영화/심지어는 역사적 일화에서까지 '원앤온리'라든가 '구원 서사'라든가 하는 이름표를 달고 낱낱이 파헤쳐지는 유대와 교감. 


relationship이란 단어에서 어근 lat-는 '나르다 to carry'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실어나르며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관계(關係)'는 또 어떠한가? 밧줄로 문과 빗장을 꽁꽁 묶어놓은 모양을 따온 글자 하나, 결박당한 사람을 그려낸 글자 하나 해서 두 한자 모두에 실 사(絲)가 들어가 있다. 우리말로도 누군가와 '엮인다'고, '얽힌다'고 하지 않나. 극단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일은 끈이나 줄로 함께 묶이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여기에 무척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르고 선택할 만한 자격이 없으니까) 그냥 주어지는 걸 받을 수밖에 없다'며 자책하던 남자와 그의 곁에 있던 이들에 관한 글. 


맞다. 나는 역시 <리틀 라이프>를 한 남자가 살면서 만났던 이들과 그 자신이 무엇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새겨놓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쉰을 넘긴 나이까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뒤쫓아가면서 우리는 그에게 흔적을 남긴 인물들과도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이 자취는 칼로 쑤셔놓은 것보다 더 잔악하고, 저 상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멍 같고, 그 자국은 햇살을 받으며 핀 봄꽃 같다. 개인 심리를 장대하게 다룬 소설이지만 주변 인물들의 마음결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왔다 갔다 하는 시점 이동과 변환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안에 갇히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캐릭터의 시선으로 주인공을 샅샅이 훑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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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언뜻 청춘소설처럼 시작한다. 배경은 뉴욕. 진로라는 고민거리를 안고 걱정하는 네 친구들. 재능도 개성도 뚜렷한 20대 청년들을 비추던 조명이 이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다리가 불편하고 타인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동정과 연민을 싫어하는, 아름다운 주드. 주드는 모든 관계가 give and take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도무지 친구들에게 줄 것이 없다(고 여긴다). 애정, 시간, 돈, 심지어는 정보까지. 그는 비밀 하나조차도 털어놓지 못한다. '고백은 유통화폐였고, 폭로는 친밀함의 형식'이기에 사람들은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타인과 가까워지지만, 주드는 도리어 친구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결코 자신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 친구들 또한 묻지 않고 그를 배려하며 그의 곁에 머문다. 

맬컴과 윌럼은 주드의 양쪽에서 주드가 미끄러지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까이, 하지만 주드가 넘어질까봐 대비하고 있다는 의심은 주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제이비 자신도 그렇게 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렇게 하자고 서로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들 그냥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천애고아인 주드에게 양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어하는 해럴드 또한 주드를 '모른다.' 주드는 자신을 내보이지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친구들과 해럴드를 밀어내지도 못한다. 그들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주드를 좋은-괜찮은-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믿을수록 주드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어째서? 거짓이 밝혀지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인지가 드러나면, 비상한 두뇌에 근사한 외모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아보면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을 경멸하고 실망한 채 떠나갈 것이다. 그래서 주드는 팔을 긋는다. 행복한 하루일수록 불안에 잠식당한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기 때문에 자해를 한다. 
전ㅡ 좋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했어요.
그걸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끔찍한 일들, 부끄러운 일들을 했다는 걸, 
그걸 알게 되면 저랑 관계되는 건 고사하고, 알게 된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할 일들을요.

그가 왜 그러는지 알려지는 부분은 출간 당시부터 논쟁거리였고, 아마 오래도록 그러할 것이다. 주드의 과거에 대한 묘사가 '포르노적'이라고 비판하는 독자와 평론가들이 있을 만큼, 이 작품에는 폭력에 대한 서술이 넘친다. 읽는 이가 상상할 수 있는 학대들은 모조리 다 등장한다. 깜박, 깜박하는 플래시백 속에 흐르는 눈물과 비명들. 작가는 담담하게 쓰지도 절제하지도 않았다. 그걸 직면하는 동안 마음 어딘가가 칼로 그어지고, 나중에는 그 자리들이 조각칼로 파내어지는 것만 같을 정도로 괴롭다. 행위 자체의 잔인함도 문제지만, 그 일들을 당하는 어린 주드의 비참함이 그대로 전해져 숨을 계속 끊어서 쉬어야 할 정도였다. 

정신적으로 약해진 사람들은 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경고문구가 리뷰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너무 비현실적이다. 한 인간이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악인을 만나며 또 어떻게 그리 다종다양한 불행을 겪을 수 있느냐?'라는 지적을 받는 것도 의아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굳이 현실과의 정합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란 내 손톱 아래 박힌 가시가 제일 아픈 존재이며, 기억이란 절대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제가 우리의 오늘을 구성하며, 성격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적인 진실만큼 감정적인 진실도 중요하다. 과거가 설령 30% 정도만 진짜라 해도 주드의 생채기는 120%만큼 쓰라릴 수 있고, 주드의 의식은 지난날을 정말 그렇게 인지할 수 있다. 하여 중요한 건 '이게 말이 되느냐 아니냐'보다는, 그 결과 그가 자신에 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끝없는 자기 혐오, 자해, 자살 시도를 거듭하는 성인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꼭 하나뿐인 방법이기에. 

주드는 몸도 마음도 다치고, 사건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부분에까지 극심한 손상을 입고 만다(Moral Injury). 작가는 이런 점을 두고 인터뷰에서 '결코 나아지지 않는 주인공'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One of the things I wanted to do with this book was create a protagonist who never gets better. to begin healthy (or appear so), and end sick — both the main character, Jude, and the plot itself.'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은 건강하게 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것처럼 시작했다가 아프게 끝난다. 주드와 그가 사는 세상의 신이자 창조주인 작가는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주드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주드는 번번이 최선을 다해 괴로워하기에, 가끔 독자들은 1권을 덮은 다음 2권 읽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독자에게 '1,000쪽이나 되는 책을 읽으며 주인공이 별 같은 희망을 발견하기를, 빛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꺾이는 경험'만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다. 결말을 보고 누군가는 짙은 허망함을 느꼈겠지만,


매일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다시 하루를 맞이하려던 모습 그 자체에 눈이 부셨던 사람도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것이, 우리네 삶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 최종장이 어떻게 쓰여지더라도 거기까지 가기 위한 여정 역시 아프도록 무겁다는 걸 나도 이제 깨달아가고 있어서다. 작가 말대로 주인공은 최후에 낫지 않은 상태로 우리를 떠나갔다. 그렇지만 주드는 나아지려고, 이겨내려고,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시도하고 다시 시도했다. 살기 위해서 견디고 버티고 참았다. 만성적인 트라우마에 맞서 저항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런 사람더러 결국 이겨내지 못했으니 패배했다고 단언해야만 할까? 완전한 회복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기나긴 투쟁을 무의미했다고 치부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리틀 라이프>를 '기어이 그렇게 됐다'며 요약할 것인지, '도리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방점을 찍을 것인지는 우리 몫이다. 나는 주드에게 노력한 걸 안다고, 사실 열넷이나 열여섯쯤에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당신 인생이 좀 더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삶은 대체로 너에게 매정했고 운명은 너를 한계까지 몰아갔지만 그럼에도 가끔 '인생이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듯한 순간들이 있었던 걸 기쁘게 지켜보았다고 말하고프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당신이 끝없는 어둠 속에만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소설은 예상보다 어둡지 않다. 아물지 않은 흉터가 내도록 터져나오고, 참담한 광경이 이어지지만 뜻밖에도 읽는 이들은 일정한, 어떻게 보면 냉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작가는 한 인간의 내면(內, 마음/심리/영혼)을 끝까지 파고들어 상처가 좀 나을라 치면 피딱지를 뜯어내게 만들었다. 대신 그의 겉모습과 배경(外, 바깥 및 표면)에는 다디단 시럽을 발라둔다. 도저히 마침표가 보이지 않는 비극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주장에 공감하지만, 내가 보기에 정말 개연성이 없는 부분은 사건사고가 아니라 '캐릭터 설정' 그 자체에 있다.


The City 뉴욕이라는 공간이 내뿜는 휘황찬란함,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주드(예술가가 그를 보고 영감을 얻은 다음 화폭에 담고 싶어할 만큼),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일궈내 부와 명예를 거머쥔 대학 동창들, 섬약하기에 더 매혹적인 주드를 아끼는 좋은 친구들과 매우 훌륭한 인품을 지닌 양부와 진심어린 치료를 해주되 진료비는 단 1원도 청구하지 않는 의사, 이 친절하고 아량있고 관대한 사람들이 피워내는 우정과 애정 그리고 헌신, 인물들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계급이며 지적인 교양도 풍부해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소위 '먹물 내음'이 난다는 점, 자주 화제에 오르는 전문지식과 예술과 아름다움, 가난이라든가 인종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깊이 파고들지도 않는 정서... 그래서 다소 장르소설 같다고 느껴질 만한 그런 과잉된 부분들이 몰입을 방해하거나 흐름을 깨는가? (그런 이들도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니, 그렇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폭풍과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 같은 주드의 영혼을 따라가는 것만도 상당히 벅찬 일인데 이런저런 환경과 외피마저 처절했다면 이건 르포나 시사고발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작정하고 읽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나가떨어지거나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과 풍경에는 이따금 멜로드라마를 연상케 할 만큼 낭만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고, 그 덕분에 독자들은 불필요한 긴장을 덜어놓고 좀 더 안전한 위치에서 비극을 헤아리게 된다(그래서 나는 무겁고 어둡다는 까닭으로 이 책을 포기하는 독자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리틀 라이프>의 이런 지점은 누군가에겐 비판거리겠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큰 장점일 수 있고, 나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모든 포인트에서 핍진성을 획득하려고 노리는 것보다, 가장 보여주고픈 커다란 물줄기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약하게 만드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작가는 항해의 키를 놓치지 않고 굳건하게 주드와 주드를 둘러싼 관계에 에너지를 응집하는 일에 성공했다. 



이제야 겨우 처음 했던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한야 야나기하라는 무척 유려한 문장들로 소설을 가득 채워놓았는데, 특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일에 탁월하다. 특히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상호작용들을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다루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소중한 사람들과 가까워졌음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하는 주드라든가 

그는 윌럼과 하는 두 가지 대화를 다 좋아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일상적 대화를 즐긴다. 늘 큰 문제들—사랑, 신뢰—로 윌럼에게 묶여 있다고 느꼈지만, 작은 일들, 청구서나 세금, 치과 치료 등으로도 묶여 있다는 게 좋다. 몇 년 전 해럴드와 줄리아네 집에 갔을 때 일이 늘 생각난다. 그때 그는 심한 감기에 걸려서 그 주말 대부분을 거실 소파에서 담요를 두른 채 자다 깨다 하며 보냈다. 그 토요일 밤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해럴드와 줄리아가 집 부엌 수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그들이 조용히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너무 지루한 이야기라 세부 사항은 대부분 듣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공동 생활의 역할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른들 관계의 이상적 표현 같았다. 


오랜 후에 친구들을 멀어지게 만든 제이비의 '단점'을 사랑스러워했던 윌럼

제이비는 윌럼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럴 때 그는 제이비를 완벽하게 사랑했다. 한없이 어리석고 경박한 짓을 할 수 있는, 또 기꺼이 하는 제이비를. 이런 건 맬컴이나 주드와는 절대 나눌 수 없었다. 맬컴은 아무리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예법을 지키고 싶어했고, 주드는 진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구조 작업'이 아님을 깨닫는 윌럼을 표현한 장면들이 그러하다. 

"괜찮아." 주드는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나 팔을 잡은 채 윌럼의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을 거야, 월럼." 그는 고객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 윌럼이 가끔 들었던 그 단호하고 선언적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야. 내가 늘 널 보살펴 줄게, 알지?" 그는 미소지었다. "그럼." 그에게 위안이 된 건 그런 안심되는 말 자체라기보다 자기도 뭔가 줄 게 있다는 자신감과 능력과 확신에 차 보이는 주드의 태도였다. 그걸 보자 윌럼은 그들의 관계가 결국 구조 작업이 아니라, 그가 주드를 구하고 그만큼 자주 주드도 그를 구했던 우정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 그런데도 지난 일곱 달 동안 그는 자기가 주드를 회복시켜놓겠다고, 자기가 그를 고칠 거라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고칠 필요가 없는데. 주드는 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도 주드를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내가 제일 감탄했던 대목도 빼먹을 수 없다. 최초의 빛이자 가장 깊은 어둠이었던,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어떤 죗값도 치르지 않은 채 떠나버린 루크 수사는 작중 최고의 악인이자 만악의 근원이다. 하지만 주드는 저주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루크를 일백퍼센트 증오하지 못하고 차라리 자신을 수치스럽게 간주하는 쪽을 택한다. 독자가 화를 내며 이건 명백히 흑 아니면 백인 문제니까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루크의 미소짓는 얼굴이 순식간에 마법처럼 떠오르곤 했다. 그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있던 시절, 그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애정이 그리운 어린아이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혹당하던 시절의 루크를 생각했다. 그는 온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있었다. 꽃들의 온기와 향기가 그를 망토처럼 둘러쌌다. 그건 그가 그토록 소박하게 행복했던, 복잡할 것 전혀 없는 기쁨을 알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 꼬마 미남이 왔구나!" 루크는 외쳤다. "아, 주드ㅡ 널 보니 너무 행복하다."


언젠가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반짝이는 일순간, 그러나 오래 사유하지 않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아니면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간직하다 못해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던 그런 기분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타인을 완전히 사랑하는 일도 아예 미워하는 일도 실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걸. 너를 황폐하게 만든 사람을 왜 그리워하냐고 따져묻기에는 인간도 인간관계도 너무 복잡하다는 걸.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내겐 나쁠 수 있고, 쓰레기 같은 사람이 내겐 구세주였던 시간도 있다는 걸. 사랑과 이해는 다른 영역에 있어서 사랑한다고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걸. 소설에는 모순된 양가감정이 수없이 나타난다. 창작자인 제이비가 주드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주드가 바라 마지 않는 평범한 삶을 납득하지 못할 때, 주드만큼 날 필요로 하지 않기에 제이비를 덜 사랑한다는 윌럼이 어쩌면 주드를 보며 남동생 헤밍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주드가 한결같이 낙관적인 해럴드의 순진함과 무지함에 좌절하면서도 동시에 깊이 사랑할 때 나는 두꺼운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어야 했다. 


그 마음들을, 감히 이해한다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다고. 내가 말로 하지도 글로 쓰지도 못하고 어디쯤 박제해둔 채 영영 열어보지 않았던 그 감정들을 자극해 어제 일인 것처럼 회상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니. 나는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당신도 이걸 읽으면서 지진을 느꼈나요? 지층이 휘어지고 끊어지는 기분을 그대도 느꼈나요.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고 그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섬광처럼 느껴지는 짧은 행복은요? 주드와 내가 느낀 것처럼요.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 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 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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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는 해럴드의 아들이 만들어준 컵을 깨뜨렸다. 해럴드가 먼저 보낸 아들이 남긴 머그를. 해럴드는 주드가 사과하기 위해 쓴 편지에 위와 같은 답장을 보낸다. 두 사람이 보낸 세월이 어찌 끝났든 이런 빛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주드에게는 이런 날이 있었고 이런 사랑을 받았고, 그렇기에 주드는 아주 간단한 일로 다시 절망에 빠졌던 날까지도 생각한다. 살아갈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특히, 해럴드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어서, 플롯이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서, 특징적인 문체와 고유한 스타일이 멋스러워서,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충격적인 반전이나 결말을 기대해서, 몰랐던 분야에 대해 많이 알고 싶어서, 나와 공명하는 무언가를 찾고파서, 비루한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푹 빠져있다 돌아올 흡입력 넘치는 세계를 원해서...... 우리는 각각의 바람들을 충족해주길 바라며 오늘도 소설을 집어든다. 여기 몹시 다양한 면모를 지닌 소설이 있다. 감히, 당신이 바라던 것 어느 하나쯤은 여기 있을 거라 말하고 싶다. 책장이 넘어가는 걸 아쉬워하며 읽게 될 거라고 장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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