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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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분명히 적혀있는데도 두 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어? 아까 나온 인물 아닌가?' 하며 연작소설임을 깨달았다. 서로 상관없는 인물, 공간, 배경을 가진 단편집 모음이라고 생각하다 연작이라는 걸 안 순간 나도 모르게 좀 더 집중하게 되고 그걸 깨달으면서 웃었다. 



범인을 밝혀야 하는 추리소설도 아니고 누가 내게 시험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음 글에는 누가 등장하게 될 지 그런 걸 알아맞혀보고 싶은 기분. 지금 읽고 있는 글에서는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그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물 간 관계도를 그려보서 전체를 파악하고 싶은 기분.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아, 그 인물 이야기도 보고 싶었는데 역시 끝까지 스쳐지나가는 조연으로밖에 나오지 않았어.' 같은 아쉬움. A가 주역인 이야기에서 B는 엑스트라일 뿐이지만 C 스토리에서 B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나타날 때의 작은 짜릿함. 



이 책을 함께 읽은 친구는 <은하의 밤>과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에 등장하는 아이돌 양요를 더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워했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인물 '현우'는 그만 봐도 될 것 같았다는 말로 나를 웃겼다. 다른 독자들은 어느 인물이 드러나기를 기대했는지, 누굴 좀 더 보고 싶었는지 앙케이트 설문이라도 해보고 싶다. 



그리하여 읽는 이들은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을 책장에 넘어갈 때마다 깨닫게 된다. 손 안에 작은 만화경이 있는 기분이었다. 인물들은 교차되었다가도 평행선을 달리고,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만날 것 같았다가도 멀어진다. 단편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사건들은 꽤 격한데 살짝 마른('건조하다'기보다도 '조금 마른' 느낌) 문체 때문에 그 감정의 높고 낮은 파도들이 확 덮쳐오지는 않는다. 그런 후폭풍은 책을 다 읽고 회상할 때야 찾아온다. 읽는 도중에는, 모든 것이 화끈하게 터지는 대신 손 안에서 잘못 굴리면 작게 '파삭'하는 소리를 내면서 깨질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게 꽤 조심스러웠다. 책이나 문장을 무슨 그런 식으로 비유하냐고 묻는 이도 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 책은 동물계보다는 식물계에 가깝다. 그리고 생각보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글들이 담겨있다. 



글은 거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묘하게 1인칭 관찰자 같은 분위기를 전달하며, 때때로 각 단편의 주인공들보다 그 주인공이 지켜보고 있는 타인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유리벽 너머로 독자인 내가 그들 모두를 관찰하고 있다는 감각. 가령 <데이, 이브닝, 나이트>에서는 한가을이 주인공이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병원 동료 안미진과 환자 승미 씨였다. <하바나 눈사람 클럽>에서는 한 두 페이지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남희가,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었다가도 모진 말을 듣고 울게 되는 남희가 좋았다. 



예쁜 표지와 크리스마스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이 주는 정취 때문에 따스한 힐링을 기대하고 소설을 펼친다면 조금쯤 서운할 수도 있겠다. 서늘한 북풍이 몸을 스쳐지나가다가 얇은 어깨담요를 살짝 걸쳐주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너무 춥고 싶지 않다는 분께는 중후반부에 있는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를 먼저 권하고 싶다. 작가가 배치한 순서대로 읽지 않는다 해도 책의 인상을 해치지는 않는다. 반려견 설기를 잃은 세미가 카카오톡 목록을 보며 개를 키우는 이들에게 연락할 때, 내가 모은 강아지 사진들이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느릿하게나마 조금씩 설기 없는 삶을 견뎌내려고 하는 세미를 보고 난 다음, 



혹시 연애 이야기 같은 건 없나요? 하고 묻는다면, 이번에 추천하고 싶은 건 <월계동 옥주>와 <하바나 눈사람 클럽>이다. 앞은 예쁘기도 하고 깨지기도 쉬워보이는 구슬 같은 청년들의 여름, 뒤는 성마른 청소년들의 겨울. 친구가 되었다가 다른 감정이 생기고 그래서 힘들고, 어떤 관계는 깨져나가고, 어떤 사이는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요. 눈알을 굴리며 얘들 재회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그냥 이대로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다음으로는 리얼 르포 예능국 이야기;;인 <은하의 밤>, <첫눈으로>, <크리스마스에는>을 차례로. 



많은 캐릭터와 많은 서사를 가진 글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 그 자체보다 어떤 장면이 또렷하게 새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크리스마스 타일>이란 소설을 <월계동 옥주>의 한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호숫물을 떠다 등잔을 밝힐 정도로 아름답고 맑은 호수. 한 그룹을 이룬 친구끼리 모두 같이 가고 싶어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헤어지고, 옥주와 예후이가 둘이서만 갔던 거울 같은 호수. 두 손으로 물을 떠다 등잔에 넣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지만 어쩐지 책을 읽는 내 이마 위로 그 등잔불이 비추는 느낌이었다. 



그 물이 흐르기도 하고, 얼기도 하고, 눈으로 변화해 내리기도 한다. 그 흐르는 물을, 눈을 맞으며 나와 내 일상을 되돌이켜보게 되는 책, 마냥 환하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메리 크리스마스'인 책, 금이 간 타일도 완전히 깨져버린 타일도 있지만 '못 쓰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 이야기, 내가 읽은 <크리스마스 타일>이다. 여름에 읽어서 더 좋았다. 겨울 입김과 쌩쌩 부는 바람에 지쳤어도, 이별의 상실을 겪었어도,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다. 인물들도 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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