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에 씌어진 시작시인선 131
최승자 지음 / 천년의시작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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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곱 번째 시집

바로 이전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에 적응이 조금 되지 않았었는데

이 시집까지 읽고 나니 나 혼자 시인의 과거에만 목을 맨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하지만 최승자 시인이 어딜 가지는 않아서 간결해지고 쉬워진 것과는 별개로 무겁고 서글픈 시들

나이 들어가니 오규원 시인의 『두두』를 읽었을 때의 감동이 나름 감사해서

최승자 시인도 간결해질 것이라면 좀 더 편안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음 시집이 기다려진다

 

<모가리의 숲>과 <안티 크라이스트>의 한 장면이었던가

하나씩 둘씩 사람들이 숲속으로 걸어들어가던,

숭고함마저 느껴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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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 유년의 상처를 끌어안는 치유의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참 전에 읽고 대충 정리해놓는다

전체적으로 알찬 감이 없고 반복되는 느낌이었지만 죽자고 달려들어 줄은 그었구나

나름 생각도 많아졌고 흥미롭기도, 어슴푸레 열쇠가 되는 글도 있었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교정, 교열 보다 한숨 나던 책

 

엄니의 변한 성격을 생각해보자면 기가 죽고 우울하고 인내심으로 무장한 소극적인 성격과 행동이

강력했던 벽이 허물어지고 공황상태 비슷한 허무와 배신감을 경험한 후 아주 강하고 저돌적으로 변했는데

인생을 살며 이제야 당신 생각을 가지고 의견을 제시하고 주장하고 행동하며 욕심도 부리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표출하게 되었다

그것이 아직 전방위적인 배려와 깊은 사고에서 발현되지 못하고 성급하고 화를 가진 것으로 표출되면서

사회성을 습득하기 전의 아이를 보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가끔 지적하면서도 마음은 마냥 아프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정말 하고 싶은 진실한 자세로 임할 것

대리 만족이나 보여주기가 되지 말 것

모든 시작은 발전의 단계까지 거칠 것

나 자신이 '내'가 될 것

내가 나를 움직일 것

주체적이고 담대하고 가벼워질 것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 것

게으르지 않을 것

겁 먹기 전에 안에서 꿈틀대는 욕구, 자신감, 기대를 솔직하고 용감하게 끌어내 구체적인 대비를 함으로써

내 것으로 만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

 

라고 맨 앞장에 메모를 '해두었었'구나

 

 

 

 

-

'부정적인 신념체계'

신념체계가 자리잡히면 '운명'이 된다

 

 

 

어린시절에는 무조건 공감, 동정, 연민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 우리가 느끼는 것이 정녕 중요한 것인지 아닌지 모른다.

[...] 아이가 눈물 흘리는 것을 아무도 봐주지 않고, 눈물을 흘릴 권리마저 없다면("다 큰 애는 울지 않아", "강한 사람은 절대로 아프다고 하지 않아") 자신의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사랑, 안전, 이해에 둘러싸여 자랄 권리 ...)

 

 

 

'존중 respect'이라는 단어는 '레스피케레 respice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이 말은 누군가를 보는 것, 자신의 욕구와 약점을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아이를 일찍 세상에 내보내 평범한 것에 익숙해지도록 가르쳤다. 걸핏하면 '지금 해야 한다'느니, '그건 하면 안 돼'라고말하는 환경에서 아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이는 말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반은 보이고 반은 그늘이 덮인 세계, 마음 속에서 멀리서만 들을 수 있는 세계로 몸을 감춘다

- 한스 게오르크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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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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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영향으로 <어나벨>도, 신작<모르는 여인들>도 사실 잘 회자되지 않고 있어 조금 안타깝지만
신작가님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다행히 꼼꼼한 신작가님 덕분에 들을 수 있는 뒷 얘기들이 풍부해서 감사하고
책을 읽지 않았지만 작가와의 대화가 가능했던 분위기에 감사하고
자신의 소설과 닮은 신작가님의 말과 생각들도 여전히 좋았다

 
 
「화분이 있는 마당」을 이야기하며,
절교 편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단편은 그 시절 자신을 치유해주었다고 한다
마음 자세도 치유의 방법도 작가답다는 생각이다
필사는 신작가님의 소싯적 재주였겠고(?^^) '창'은 매번 등장하는 이름이다
사실 이런 일련의 소재들이 새롭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글들과 함께 해온 추억들이 되살아나 웃음이 나고
내 지난 이야기들 속 아름다운 것들이 생각나 언제나 뭉클해진다, 진심으로
닮은 꼴은 그래서 애착이 가는 모양이다
 
「그가 지금 풀숲에서」를 이야기하며,
증후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누구나 잠재해 있는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손, 마음
'현대의 삶이 생각하면 안 될 것처럼 사지로 내모는 것 같은'이라고 말하던 작가님의 말은
얼마전 토크쇼에서 내게 신선한 깨달음을 줬던 김창완 아저씨의 현대의 영웅들과 개인 가치의 상실에 대해 한 말과 일맥상통했다
 
「어두워진 후에」를 이야기하며,
 말을 잇는 속도가 느리시다 보니 되려 고마웠다
게다가 자주 내뱉으시는 어, 아, 음... 의 신음 소리(?)는 되려 숨죽이고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뭐, 어떤 이는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성문 앞 보리수」를 이야기하며,
허수경 시인과의 일화와 추억에서 출발한 단편이라는데
함께 소녀들처럼 얘기 주고 받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다가도 조근조근한 두 말투가 만나면 잘 어우러질 것도 같다
알 수 없는 너와 나의 마음을 함께 감싸안기 위해 등장한 '수미'는 인생의 수수께끼
 
「모르는 여인들」을 이야기하며,
이 책의 모든 문장은(딱 한 편 읽고 와서 들은 문장만으로도) 신작가님의 문장 아닌 것이 없는 듯하고
결국 다시 이런 글들을 만나게 되어 정겹다고 해야 할까
마치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감독의 코드들이 나열되면 그것들 찾기를 즐겼던 것처럼
 
「세상 끝의 신발」을 이야기하며,
소년병의 아버지는 신작가님 아버지의 이야기라고도 한다
'작가의 말'과 딱 이것 한 편 읽고 왔는데 신평론가님이 '이 작품 참 감동적이죠?!'라고 하자
참 다행이구나 하는 안도, 후후
평범하지만 신작가님의 글다운, 작가의 옛 작품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글이었다, 내게는
'그런 고장이었어요' 이런 말들을 어디가서 누구에게 들을 수 있을까 싶다...
정말 그랬다, 어른이 있는 집이라면 응당 언제나 손님을 맞은 토방에는 벗어놓은 신들이 돌려놓여지곤 했었다
순옥이 언니의 이야기를 할 때는 아랫집 혜정 언니가 떠올랐고
참 절묘한 공감의 시간을 살았고, 살고 있어 다행히 읽기가 겉돌지 않는다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읽지도 않은 내용들까지도 다 알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아마도 오래 읽고 있는 작가의 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동적이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위로가 되어 감사하다는 말은 전하고 왔다
어렴풋이 깨닫는다
신작가님이 불러내는 기억, 느낌, 사고들이 쓸쓸하고 아픈 기억은 멀리 두고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만 불러내주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들에 그 시절과 현재를 위로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 그렇다면 작가의 글들은 다소 보편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색깔은 있지만 작가가 말하듯 '문학은 연민 같은 것, 가여운 것'이라는 말이 관통하는 보편적이지만 깊히 천착하는 이야기들

 

이제 읽어보자
해를 지나고 지나며 씌어진 작가의 생각과 글들이 무엇을 놓지 못하고 또 무엇을 보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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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몬스터
서유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절판


스노브(snob)한 사람은 지루할 때 지루하단 말을 하지 못하며,
즐거울 때 즐겁다고 실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폴 발레리

모두가 '성공'을, '부자 되기'를, '유명해지기'를 꿈꾸도록 부추기지만,
왜 성공해야 하는지, 어떻게 성공해야 하는지, 그 성공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성찰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성공'이나 '윤리' 같은 개념들은 거추장스럽고 진부한 개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 '질문'은 성공에 아무런 실용적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노브는 재화로부터 '긍정적 가치'를 자발적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재화를 '살 수 없다는 사실로 부터 만족을 얻는다.
[..]
'불의'는 참을 수 있지만 '불이익'은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베블렌의 '과시적 소비',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소비'는 이제 더 이상 상층계급만의 특권이 아닌 '대중화된 스노비즘'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층계급이 더욱 노골적으로 보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현상은 일종의 '강자와의 동일시'다.

사람들은 결코 사물 자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짓는 기호로서 사물을 항상 조작한다.
- 장 보드리야르


< 정여울 / 해설 '스노비즘의 디스토피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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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걷다 -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떠나는 섬 여행
강제윤 지음 / 홍익 / 2009년 1월
절판


어제는 꽃이 피는가 싶더니 오늘은 또 눈이 내린다. 제법 많은 눈이 쌓인다 했더니 햇볕이 나자 눈은 흔적도 없다.
삶 또한 그러하다. 돌이켜 보면 삶이 내 소망대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삶에는 실패나 성공 따위란 없는 것이다. 성공한 삶도 없고 실패한 삶도 없다.
서로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삶의 판관일 수 없다.
어제는 어제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산다. 너는 너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늘 삶에 대해 서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처음 살아보는 삶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 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휘둘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누지 못하는 것의 근원은 소유욕이 아니다. 불안이다.
모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다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두려 한다.

많은 섬들은 요즘 어느 시대보다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고기잡이나 수산물 채취, 양식업 등으로 바다 일을 하는 주민의 수입은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일의 양은 줄지 않는다. 남들이 더 많이 잡기 전에 내가 더 잡고 남들이 기르는 것보다 내가 더 길러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삶에 대한 불안이 줄지는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늘 모자랄까 두려워한다. 만족을 모르는 삶은 도시와 농어촌이 다르지 않다.
본디 일이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만드는 사회는 사악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국가는, 자본은 개인이 필요보다 더 많이 일하도록 끊임없이 선동한다. 개인에게는 온갖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면서도 개인의 삶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교육, 의료, 노후까지도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사회. 그러니 소득이 늘어도 개인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개인의 불안은 사회의 불안을 잉태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국가 안보와 체제 불안을 조장하는 가장 큰 국가 세력은 자본과 국가 자신이다!

섬은 적막하고 섬은 아주 늙어버렸다. 요즈음은 섬의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사람이 죽으면 산이 아니라 완도로 간다. 상여 메고 가 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 나이 들고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찾아 뭍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생애와 하직한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빌고 가지라우."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린다. 섬을 더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집도 이층으로만 해서 마을이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을텐디 몇 집만 잘 살라고들 집을 높이 올리니 못 사는 사람만 더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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