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허투루 쓴 문장이 단 한 문장도 없는 듯한
아니, 원래 문장을 이렇게 밖에 쓸 줄 모르는 작가인 것 같은 엄청남
글도 이야기도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미끄러지듯 고요히 나를 끌고 가는 마술같은 솜씨
('솜씨' 라기 보다는 명상록에 가깝다)
그 대신 독자는 조용한 가운데 한 글자,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집중해서 모두 읽어야 한다
아니, 읽게 된다

올해 출간된 책은 아니지만 올해 읽은 책 중 인상적인 책이다
문제를 던져주고 생각하게 하고 위로해주고 숙연하게 만드는
인생에서 한번쯤 겪게 되는 그레고리우스의 '어느날 갑자기'
나를 닮은 그를 따라다니며 인생을 돌아보고 위로받기도 하며

언젠가 리스본 기행문을 책으로 펴낸 한 블로거가 있었는데 그때 흥미롭게 들린 리.스.본
이 책의 각 장 간지마다 흑백의 판화처럼 상단에 찍혀있는 야간 열차역을 계속 보고 있자면
그레고리우스를 따라 포르투갈에
아니, 내 삶에 또다른 방향으로 나 있을 것들을 따라 가고 싶어진다
 

페르난두 페소아의『불안의 책』이 번역되기를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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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저 바다로 흘러드는
강과 같다.
/ 호르헤 만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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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수상록』제2권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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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그러므로 주변을 경멸할 때의 어떤 사람은 주변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주변 때문에 괴로워할 때의 그와 동일 인물이 아니다. 우리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 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책』, 1932년 12월 30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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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이 없냐고 물으면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일을 잘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박물관 경비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이런 세상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다. 그레고리우스보다 훨씬 능력이 없던ㅡ정말 말도 안 되게 공부를 못하던ㅡ사람들도 졸업시험을 치르고 확실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다른 세상, 견딜 수 없이 천박한 세상, 그가 경멸하는 기준을 지닌 세상에 속해 있었다. 그들 내보내고 대신 졸업장이 있는 교사를 채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다. 교장도 고전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내보내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졸업시험을 치렀다. 시험 문제는 너무 쉬웠다. 시간을 반이나 남겨두고 답안지를 제출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은 아내를 가끔 원망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돌려 천천히 키르헨펠트 다리 쪽으로 향했다.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p.p. 24~25)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떄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는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그레고리우스는 라틴어를 죽은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위인들이었다. 플로렌스가 누군가와 에스파냐어로 통화를 하면 그는 문을 닫았다. 이런 행동은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p. 29)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p.p. 31~32)
 

 

그는 전화 옆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 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하면서도 장엄한 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p. 38)
 

 

고전어들은 베른식 억양으로 말하는 그의 입에 적절하게 맞았다. 시간을 초월한 그 세계에서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 40)
 

 

자신의 뻣뻣한 발음과 미끄러지는 표준 발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는 같은 문장을 계속해서 다시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해방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정한 한계, 자기 이름을 발음할 때의 느림과 무거움, 생각에 잠겨 박물관의 한 전시실에서 다른 전시실로 더디게 움직이던 아버지의 발걸음과 같은 느림과 무거움에서의 해방,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만들어진 자화상ㅡ자화상 안에서 그는 시력이 나쁜 사람들이 그러하듯, 책을 읽지 않을 때에도 먼지가 쌓인 책 위로 몸을 굽히고 있다ㅡ에서의 해방. 문두스의 자화상에는 그의 서명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분위기를 풍기는 이 조용한 인물이 주는 휴식을 편안하게 생각했던 모든 사람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박물관의 측면 벽에 걸려 있던, 먼지가 많이 낀 이 자화상에서 자기가 걸어 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p.p. 40~41)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그럴 때면 나는 해변으로 가서 목을 길게 늘여 바람에 머리를 맡기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 습관을 내 머리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늘 똑같은 잡담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뭔가 할 말이 생기면,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정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난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언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을? 내가 나의 언어에서 탈출하여 다른 언어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언어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언어를 새로 발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난 아마 포르투갈어 단어들을 새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새로운 문장들은 낡고 진부하다거나 흥분하여 기교를 부린다거나 의도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로 된 문장의 중심을 이루는 원형이라서, 에움길이나 오염이 없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온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단어들은 윤을 낸 대리석처럼 흠이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은 모두 완벽한 침묵으로 변화시키는 바하의 변주곡 음색처럼 맑아야 한다. 가끔 언어의 진흙 구덩이와 타협하려는 마음이 내 안에 약간 남아 있다면, 그 마음은 화기애애한 거실의 부드러운 고요함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느긋한 평온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언어 습관에 대한 분노가 나를 에워싸면, 그 분노는 빛이 없는 우주의 맑고 서늘한 적막함 이상이어야 한다.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 . 종업원이나 이발사나 승무원은 새로운 조어를 들으면서 그 문장의 빛나는 간결함, 그 아름다움에 놀랄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문장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엄격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쉽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p.p. 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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