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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사람들 ㅣ 히스토리아 문디 9
아일린 파워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 2007년 10월
평점 :
골치 아픈 책을 읽다가 머리도 식힐 겸 잠깐 들여다 볼 요량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의외의 재미가 있어 단숨에 읽어 버렸다.
이 책은 왕이나 귀족같은 지배자가 아닌 평범한 중세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그런데 비슷한 유형의 다른 책에서 흔히 보이는 상상력의 지나친 개입을 적당히 자제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며 그래서 더 생생하다.
농민 보도의 이야기는 셍제르망 데 프레 수도원의 토지대장(이 문서는 마르크 블로크의 장원제에 관한 책에서도 언급되었던 걸로 기억한다)을 근거로 하고 있고 수녀원장 마담 에글렌타인에 관한 부분은 수녀원의 상급관리자인 주교들이 작성한 수녀원에 대한 각종 문서를 이용하였으며 메나지에 아내는 메나지에 본인이 쓴 믿기지 않게 섬세한 아내교육교본을 근거로 한 것이다. 다른 장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후 매끄러운 논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노력과 균형감각이 돋보여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필자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마담 에글렌타인를 주인공으로 한 수녀원 이야기이다. 레미제라블에서는 읽은 끔찍한 수녀원의 이야기나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중세 수도원의 광신적이고 비이성적인 분위기와 규율을 떠올려 보면 이 책의 수녀들은 귀엽고 인간적이며 사랑스럽기까지하다. 근엄해야될 수녀들은 허영심과 여성스러운 욕망으로 끊임없이 규율을 어겨댄다. 여기에는 그녀들을 감독해야 될 수녀원장도 한 몫을 하는데 더 익살스러웠던 것은 그런 그녀들을 제지하기 위한 엄격한 주교와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이 간단히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한 허가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속세의 사람은 수녀원 안의 수녀를 방문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의 독자들은 수녀가 불쌍하다고 동정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주교들은 2세기 이상 그 명령을 실행에 옮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도 5분 이상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수녀원을 해산하고 본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모든 수녀를 영구히 환속시키던 순간까지 주교들은 그 헛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링컨 주교관구의 한 수녀원에 주교가 찾아와서 교서의 사본을 건네주고 수녀들에게 교서를 준수하라고 명하자,수녀들은 말을 타고 떠나는 주교를 문까지 쫓아가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외치면서 그것을 주교의 머리에 던져 버렸다."
메나지에 아내의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수녀들의 이야기보다 더 새롭고 놀라웠다. 늙은 메나지에는 15살이 된 어린 고아 소녀를 아내로 맞이 하는데 그녀를 위해 일종의 아내생활 교본을 썼다. 아내생활교본, 저자는 '쉽고 일반적인 입문서'라고 표현했는데 그것 자체도 웃기지만 그 내용은 더 재미있다.
서양중세는 온통 종교적 광신성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는 기존 상식으로 볼때(물론 14세기말이면 중세말로 르네상스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지배자인 남편이 그 아내를 위해 재미있게 여가시간을 보내는법,의복 손질하는법,요리법,멋진 연회를 준비 하는법,하인 다루는법, 품위있게 걷는법등을 책으로 정리 했다니 기존의 내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군다나 늙은 남편은 어린 아내가 재혼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고 하니 메나지에 본인 혼자만 이렇게 깨인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중세 부르주아 계층의 사고 방식이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이렇듯 근대적이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수녀원과 메니지에 아내에 관한 장이 특별히 휼륭했는데 다른 사람을 다룬 부분도 재미는 덜할지 몰라도 새로운 정보가 많았다. 양모상인 토머스 벳슨의 장에서는 개인생활상의 비중은 적었지만 중세 양모 무역의 전개 양상을 세밀하게 보여주었고 특히 오늘날의 달러같은 지배적인 국제통화가 없는 상황에서 무역대금의 국제 결제과정에 대한 내용은 어렵긴 해도 흥미진진했다.
최근 온통 어둡고 침침할 뿐이다라는 중세유럽에 대한 종래 상식을 뒤엎는 재평가가 여기 저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그런 유행이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이고 유럽에서는 그저 상식적인 해석일 뿐인지 또 그것의 정당성 여부는 내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유행에 가장 적합한 책이 이 책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다. 중세에 관심있는 독자에게 필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