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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니, 작가 이름만 보고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나를 보내지 마'로 처음 접했던,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교하게 구성된 세계관과 담백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문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아온 영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그가 고대 영국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그리는 서사적 이야기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비록 기사가 나오는 고전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서왕 이야기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 이 작가가 재구성한 세계라면 어쩐지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파묻힌 거인'이 발매되었을 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가의 영어 문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그 문체를 오롯이 느끼며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과연 번역본이 원작의 느낌을 온전히 담아냈을지 걱정도 되고 의심도 들었다. 막상 읽어보니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은 훌륭했고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체도 잘 살려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치밀하게 계획했을 인물들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숨쉬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는, 골목의 갈림길로 기억을 더듬어 이웃마을을 찾아가야 하는 고대 영국의 대평원에 한 부부가 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브리튼족이 굴을 파고 사는 마을에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놀림감이 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하다. 액슬은 여전히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고, 이른 새벽 일어나 불을 피울 수 없는 방안에 스며드는 햇살 한 줄기가 아내의 얼굴을 비출 때 행복감에 젖는다. 두 부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망각이다. 망각은 비단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 마을을 망각의 안개가 덮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온 평원을 덮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잊은 채 현재를, 자욱한 안개 속 고립된 섬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 생활에 두 사람도 안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때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언젠가는 진실이었을 거라고. 짧게 스쳐가는 과거의 순간들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 자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 아들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난다.
다분히 클리셰적인 표현이지만, 두 사람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은 한 조각씩, 잃어버린 과거를 모아나간다. 그렇게 비로소 손에 넣은 과거의 정체와 상관없이, 그 끝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부부의 모습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인데도, 여행을 떠나 첫 마을에 닿기도 전 비를 피하기 위해 폐가에 몸을 피한 비어트리스와 액슬의 모습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부부는 그 곳에서 뱃사공을 만나고, 강을 건너 섬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부부들은 함께 그 곳에 다다르지만 섬으로 건너가는 배에는 오직 한 명만이 탈 수 있다. 부부 혹은 연인이 함께 갈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이 진실할 때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두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는 두 사람의 기억이 일치할 때, 두 사람에망게는 함께 섬으로 가는 자격이 주어진다.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 나오는 길, 비어트리스는 액슬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우리는 계속 사랑해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함께 섬에 갈 수 있냐고.
망각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모든 걸 기억하는 인간은 결코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삶에서 도무지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 슬픔에, 분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망각의 이불을 덮고 깊은 잠을 청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일어나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망각이 삶의 소중한 이들을, 행복했던 기억들을 함께 덮지는 않는다. 전부 파묻었다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은 거인처럼 남아 거기에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