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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2차 대전 이후 점차 몰락해가는 영국 귀족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 그 설명만으로도 '리틀 스트레인저'는 이미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귀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에는 담담했지만 현실적인 공포에는 취약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방이 있어 한 집에 있으면서도 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는 대저택은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꺼려지는 소재였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선정되어 배송된 이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던 건, 이야기의 흐름이 궁금해서였다. 전후 시대의 몰락하는 귀족과 함께 쇠락하는 대저택이라면 사실 배경은 뻔하게 느껴졌다. 책 뒷면의 추천사만 읽어도 소설의 화자인 닥터 패러데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이미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범인도 알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놀라움과 공포가 있을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7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여유가 별로 없던 생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줄여가며 며칠만에 책을 끝냈다. 세라 워터스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한 챕터만 더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책을 펼치면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덮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야말로 기이해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닥터 패러데이는 분명 이상했다. 그의 눈을 통해 사건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마침 정신과 실습을 돌던 참이어서 홀로 열심히 그의 성격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하고 열등감이 심하며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에어즈가 식구들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가 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집이 악령에 씌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들. 그 사건들의 배후가 궁금해서 소설을 탐독했다.
결말은 깔끔하지 못했다. 명쾌한 설명도 없었고 딱 떨어지는 마무리도 없었다. 어쩐지 찜찜하고 덜 끝난 느낌이 드는데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잔뜩 남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무서웠다. 그것도 많이 무서웠다. 하필 룸메이트가 집에 간 날 밤 기숙사에서 책을 다 읽고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창문과 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커튼을 꼼꼼하게 친 뒤 옷장까지 열어봤다. 그럼에도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정말 피곤해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새벽 3시 반, 방의 불을 전부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리틀 스트레인저'는 그런 책이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을 추억하며
화자가 범인인 스릴러의 대표작으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이 있다. 반전의 여왕 크리스티 여사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인 반전을 자랑하는 소설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정보원이 범인인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는 원망과 성토도 많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스포일러도 아닐 정도로 유명해진 설정이기도 하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닥터 패러데이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는 대사가 적혀 있다. "그때도 이 집을 좋아했던 거네요?"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요."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이라는 설정과 함께 두고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책을 읽기 전부터 닥터 패러데이가 범인일거라고 심증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더구나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닥터 패러데이를 '문학사상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 중 하나로 기록될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쯤되면 반전이라 할 것도 없이 뻔해진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닥터 셰퍼드는 이야기의 말미에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준다. 작품해설을 달아주는 범인이라니, 싶을 정도로.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그런 친절함이 없다. 사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고백을 듣고 책을 덮었는데 닥터 패러데이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짜증이 밀려왔다. 로더릭의 방은 어떻게 된건지, 지프는 왜 여자아이를 물었는지, 처음부터 캐럴라인과의 결혼을 통해 집을 차지하는 게 목표였는지, 공범이 있었는지.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일들, 닥터 패러데이가 담담히 얘기한 그 모든 일들이 정말 일어나기는 한걸까?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서웠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한 닥터 패러데이가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했고, 그래서 대저택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들이 어떤 플롯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면, 모든 게 미궁이었다. 700 페이지에 걸쳐 읽어온 모든 이야기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는 순간, 남는 건 어떤 과정을 거쳐 한 집안의 세 사람이 차례로 극도의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객관적인 진술, 베티는 캐럴라인이 빈방 뿐인 3층에서 놀라 "당신"이라 말하고 극도로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추락하였다고 말한다. 캐럴라인이 그 곳에서 본 것이 무엇일지, 혹은 닥터 패러데이의 어떤 모습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소름이 끼쳤다. 그 곳에서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병적인 요소가 넘쳐난다. 그의 어머니는 헌드레즈홀의 유모였다. 그래서 열 살 무렵의 그는 에어즈 가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집을 동경했다. 벽의 장식을 뜯어 가져올 만큼 좋아했다. 그 이후 그는 의사가 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의 출신성분은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집안의 후원 없이는 의사로서 성공하는 데에도 제한이 있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진료실에 딸린 집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다. 몇 십 년이 지나 헌드레즈홀에 의사로서 출입하게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는 (한 때 그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던) 하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음거리로 여기는 에어즈 가 사람들을 맞닥뜨린다. 더불어 여전히 스스로를 귀족으로, 다른 계급으로 여기며 그에게도 친구가 아닌 아랫사람으로 곁을 주려는 에어즈 부인의 오만함도 느낀다. 그는 남자로서도 캐럴라인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처럼 그의 모습 역시 일그러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답은 없다. 정말 모든 게 닥터 패러데이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그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붙인 것은 닥터 패러데이의 작품인지도. 아니면 그 모든 생생한 일들이 집안의 주치의 노릇을 하던 닥터 패러데이가 무언가 손을 쓴 결과일지도 모른다. 결국 로더릭은 정신과 클리닉에 입원하게 되었으므로.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가 어떤 트릭을 써서 그런 소동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벽에 그을린 자국을 남기고, 거울을 움직이게 하고, 에어즈 부인에게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명확한 사실(이것조차 거짓일지도 모르지만)은 에어즈 가에서는 누구도 남지 않았고, 그 뒤에 홀로 남겨진 건 잔뜩 망가진 헌드레즈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헌드레즈홀을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닥터 패러데이가 있다. 빈집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자라지 못한 열살 소년이.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