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 1.2.3권 합본호
장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기분은 어떤 걸까? 작은 나라에 살기 때문인지, 며칠 혹은 몇 달에 걸친 기차 여행에 대한 알 수 없는 기대가 있다. 이 책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그런 기대가 있었다. 잠수함의 앞코처럼 강인해 보이는 열차의 그림과 함께 '영원한 겨울, 얼어붙은 백색의 세상.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하여 열차가 달린다. 절대 멈추지 않는 열차.'라는 글이 보인다.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구의 이쪽에서 저쪽을 지난다는 열차를 보니 내 약간의 기대를 계속 걸어둬도 되겠다며 『설국열차』의 세계로 들어갔다. 근데 이 책이 하는 이야기는 전혀 낭만적이지가 않았다. 그렇다, 난 잘못된 기대를 펄럭이고 있었던 거다.

『설국열차』는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에게 약속된, 우리가 누릴 절망에 대한 이야기다. 대립하던 강대국은 기후를 무기화했고 전쟁이 일어났고 지구는 얼어붙었다. 영하 90도의 지구를 견뎌내기 위해 사람들은 마침 준비되어 있던 고급 유람열차를 선택한다. 열차는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시스템으로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화물칸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멈출 수 없는 여행은 시작되었다. 

1001량이라는 거대한 기차도 문명의 마지막 흔적으로서는 좁디좁은 공간일 뿐이었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앞칸으로의 진출을 꾀하다 많은 수가 죽음을 맞았다. 먹을 것도 배설할 곳도 없는 꼬리칸에서 생일을 맞은 노인이 원한 선물은 한 시간의 고독이었다. 혼자만의 시간. 사람들은 없는 공간을 좁히고 좁혀 노인에게 한 시간의 고독을 선물했고 노인은 그 시간을 자살에 활용(?)했다. 꼬리칸의 승객들이 감히 삶이라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순간, 같은 기차의 앞쪽 황금칸 사람들은 다른 의미에서 삶이 아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좋은 술과 음식에, 대재앙 전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도 희망만은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외면하며 시간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저항이 고작이었다. 기차가 목적지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달리듯, 승객들도 그저 숨쉬고 있었다. 

3권으로 구성된 이야기 중 1권은 설국열차의 꼬리칸 탑승자 프롤로프가 탈출하여 인권운동가 아들린과 함께 황금칸에 이르면서 겪는 이야기다. 2권은 시험적으로 잠깐씩 기차를 정차할 때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펴야 하는 선발대원 퓌이그와 제2 설국열차의 이야기이며 3권은 퓌이그가 정치가가 되어 기차 안의 거짓에 맞서는 이야기다.

 
문명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설국열차의 상황은 지금의 우리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최상의 거울이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더 누리고 더 가지려고 대중에게 알량한 위안과 쾌락을 제공하며 자기들 뜻대로 기만하고 억압하는 사제와 정치인, 군인이 등장한다. 그러면 대중은 어떠한가? 지구를 차갑게 얼려버린 그들의 아둔함이 영하 90도의 기온에 깨어날리 없다. 인류 앞에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용기도 없는 수많은 생존자들은 불안과 권태를 참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한다. 목구멍을 지나는 한 방울 술에 욕심 사나운 사제의 감언에 부드러운 女體의 체온에 빠져 스스로 거짓으로 걸어들어가 흥청망청 몸을 흔든다.


퓌이그가 사제와 의원을 몰아내고 진실을 무기로 열차를 장악하고 대서양에서 오는 신호를 향해 기차를 움직였을 때 사람들은 퓌이그를 반기기보단 거짓 꿈을 꾸게 해주던 사제와 권력자를 아쉬워했다. 그저 죽기 직전까지 가상 여행을 즐기든가 섹스를 하며 죽겠다는 그들. 기차 안 대다수의 인간은 지독하게 나약하고 극악하게 보일만치 이기적이지만, 잔혹한 진실을 외면하고 달콤한 거짓에 열광하는 건 내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어쩐다……. 물론 나 같은 모질이와는 다른, 어떤 시절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과 욕심을 이기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고, 설국열차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황을 바로잡아보려 한다. 그들의 노력은 보답받을 수 있을까? 대서양으로부터의 신호는 인류에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몫의 설국열차 티켓이 예약되어 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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