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딱 1주일 남았다. 가정의 달인데 가족때문에 힘든 한 달이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모처럼 고향에 내려갔지만 무기력한 어른 4명이서 하는 여행은 이른 더위 만큼이나 서로를 지치게 했다. 서로에 대해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이 쌓여서 그것이 혹시라도 터져나올까봐 조심조심하며 보내고 왔는데 결국은 터질 것은 터지는 법. 얼굴을 맞댄 채가 아닌 전화기를 붙든 채 터져 나온 고성과 짜증과 한탄과 서운함 그리고 눈물이 내내 고막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가족의 우울함에 대한 원망을 죽은 동생에게 퍼붓었다. 몇날 며칠을 퍼부었다. 어제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꿈인지 뭔지 모를 상태에서 가위에 눌려 깨어난 후로 밤을 꼬박 샜다. 출근길 아파트 복도 창으로 바라보이는 신림 정신과 간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병원 옆건물에 있는 단월드센터를 향하는 마음도 점점 커진다. 출근해서는 정신없이 일하다가 갑자기 휴대폰에 깔린 타로 어플을 열어 6월의 타로점을 쳐봤다. 5월의 타로점은 더 없이 좋았는데... 믿을 게 못된다는 걸 몸소 겪었으면서도 또다시 나는 6월의 타로점에 매달려본다. 내 가정은 없지만 이런 저런 경조사로 지출이 컸던 5월이었던 지라 당장 데려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책들을 6월에 데려와야겠다. 그것 하나 생각하며 남은 5월을 버틴다.

 

 

 

한바탕 가족들과 전쟁을 치르고나서 가장 먼저 잡은 책이다. 아빠와 나는 성격이 비슷해서 가슴에 담아놓기보다는 생각없이 바로 밖으로 내뱉는다. 그리고는 금방 잊어버린다. 그걸 들은 엄마와 남동생은 성격이 또 비슷해서 좀처럼 반응하지 않고 대신 상처를 오래 갖고 간다. 극과극인 어른 넷이서 주고 받은 게 상처뿐인 5월이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 참을성이 점점더 적어진다. 특히나 가족과 나 자신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정도다. 이 책을 읽어보니 화는 인간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감정이며 더불어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임을 알긴 알겠는데 도무지 어찌해야 화를 멈출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화를 낼 때마다 암세포가 하나씩 생긴다고 생각해도 도저히 갑자기 솟구치는 화를 어쩌지 못하겠다. 순간 터져나오는 욕설을 고스란히 혼자 듣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다시 우울해지면서도 그 악순환을 빠져나올 방법을 모르겠다. 요가와 명상으로 다스려지기에 내 안의 화는 이미 심하게 변질된 건지도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대여하여 읽었는데 자주자주 들춰봐야 화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구입해서 곁에 가까이 둬야겠다.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를 먼저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유용한 팁이 많아 거의 온통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이 책과 동시에 출간된 것이 <소설을 살다>이다. 사실 소설의 기술에 대한 산문이라길래 <당신은~>만 먼저 구입해서 읽었다. 기술이 필요하지 이미 경지에 오른 소설가의 마음가짐까지 챙겨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소설을 살다>를 빌려 읽게 되었다. 도서관에 소장된 건 이번에 나온 개정판이 아닌 그전에 출간된 책이었다. 그런데 글이 너무 좋아 온통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 천지였다. 적어도 소설을 쓰려면 이런 정도의 사유는 해야 하는 거구나. 어떤 각오와 자신만의 고민이 있어야 하는 거구나. 새삼스런 깨달음에 한번은 꼭 직접 뵙고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6월이 되면 이 책부터 가장 먼저 구입할거다. 소설을 향한 한 사람의 진득하고 곡진함을 엿볼 수 있었던 귀한 책들이 아닐 수 없다. 

 

 

 

 

좀 전에 알라딘 신간 알림 메일로 받은 따끈한 신간 소식이다. 시인의 첫 시집을 만난 이후로 나는 일명 친구들 사이에서 심보선 시인 빠순이로 통했다. 시인이자 사회학자라는 묘한 정체성을 가진 시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때 나는 심보선 시인이 참여하는 거의 모든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시인을 쫓아다녔었다. 시인이 참여하는 행사는 바로 현재 우리 사회의 바로미터이기도 했기에 나 역시 더욱 열성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 마음이 많이 시들긴 했지만..... 아니 마음이 시든 건 아닌데 실천이 따라주지 않는 몸이 되긴 했다. 몸은 조금 굼떠졌어도 마음은 여전하여 이렇게 신간 소식을 접하면 설렘을 감출 수 없다. 직접 만나는 시인도 좋지만 글로 만나는 시인은 더 좋다. 게다가 이번엔 시집이 아닌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몇 년 전부터 시인의 산문집이 나올 거라는 건 출판 관계자를 통해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내 마음이 한없이 바닥을 헤매일 때 애정하는 시인의 산문집을 만나게 되니 정말로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이쪽의 풍경은 아직은 어둡지만 이 산문집으로 곧 환해질 거라 믿는다.

 

 

 

 

알라딘 페이퍼를 통해서 품절된 이 책의 새로운 출간을 바라는 마음을 종종 드러냈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정말로 이쁜 표지를 하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ㅎㅎㅎㅎ 정말로 간절히 바라면 이렇게 기적같은 일도 일어나는구나 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바로 냉큼 데려오지 않았다. 지갑사정도 있지만 뭔가 뜸을 들여야 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 기쁨이 배가 될 것 같아서.... 그래도 더는 못 참겠고 6월이 되면 데려올테다. 그리고 소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마치 처음 만나는 글인양 다시 읽을 거다. 개정판 전의 소설집도 가지고 있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다.

 

 

 

 

이승우 작가의 산문집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떠올랐던 작가다. 게다 이승우 작가는 <소설을 살다>에서 마루야마 겐지와 <소설가의 각오>를 잠깐 언급하기도 한다. 이승우 작가의 산문집들을 읽으며 소설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절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이 작가의 책들이 떠오를 수밖에.. 최근에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라는 신간이 나왔는데 관심이 간다. 한국과 일본의 문학풍토가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소설가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나 태도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해지는 울림이 있을 것 같아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소살가의 각오>만큼 비장한 제목은 아니지만 뭔가 따뜻하면서도 울림이 큰 조언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울할 때면 더 우울감에 빠지고 싶어 <달에 울다>를 자주 찾아 들었는데... 간만에 <달에 울다>를 주말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요즘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핫한 책이 테드 창의 <숨>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 역시 이 소설집의 소식을 접하지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SF소설, 과학소설 이런 장르소설에 대한 선입견때문에 거의 접할 일이 없던 내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고 단박에 사고전환을 할 정도였으니... 이후 테드 창이 받았다던 상을 역시 받았다고 하는(3관왕이라고 했던가..) 켄 리우 작가의 <종이 동물원>까지 구입한 걸 보면 테드 창의 소설이 나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 셈이다. 그런 테드 창의 신간이니 이번 소설집이 반가울 수밖에...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로 굳어 가는 나의 뇌를 사부작사부작 만져줄지 기대가 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권에 당첨된다면 한방에 지르고 싶은 시리즈!! 일년에 한권씩이라도 모아보자 싶은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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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3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3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3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3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3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4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5-23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대학 친구가 가족의 본질
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고 가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문득 드네요.

지금까지 그렇게 솔직한 말은 들어본 적
이 없더라는.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친구
네요.

페소아 시집을 잔뜩 사서 읽다가 나 역시
나하고 시는 맞지 않는구나 싶어서 어디
에 치워 두었네요.

앤드루 포터의 책은 신간 출간 기념으로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세밀화는 정말 복권이나 맞아야 살 수 있
는 그런 책인가요 핫하

설해목 2019-05-23 23:59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 가족이란 존재가 버거울 때가 있긴 있네요.
사랑해서 힘들게 한다는 말........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

저도 고백하자면 페소아는 시도 좋지만 확실히 <불안의 책>이란 산문들이 더 좋긴 했어요.

앤드루 포터의 이 책을 만나기 위해 저자의 다른 소설책을 무시했다면 너무 뻥이려나요. ㅋㅋ

가격이 너무 세서... 정말이지 눈먼돈이 생겨야지 지를 수 있는 시리즈긴 합니다. 그래서인가 더더더 갖고 싶어요. ㅎㅎ
 

 

며칠전 요가 수업에서 들은 곡이다. 모든 동작을 끝내고 매트에 편안하게 누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듣는 순간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정말로 손끝 발끝까지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선생님께 노래를 물었고 will blunderfield라는 가수의 요가음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가수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 노래를 알게 된 이후로 내내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이 노래만 듣고 있다. 블로그 배경음악으로 있던 100곡의 곡도 다 지워버리고 이 한 곡만 배경음악으로 해놓았다. 사용중인 음악어플에서는 이 노래가 듣기 허용이 안 되어 있어 네이버 블로그 배경음악 듣기로 외부에서도 언제든 무한반복으로 듣기 위한 조치였다. 10년 넘게 블로그를 하면서 그때그때 내 마음을 적셨던 노래들을 모아놓은 음악들이었고 내 블로그에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만큼 나름 다양하게 선곡된 플레이리스트였는데.... 이 한곡으로 인해 그 플레이리스트를 없애버린 거다. 언제까지고 이 노래만을 듣지는 않겠지만 지금 내 정신과 마음은 이 노래를 필요로 하는 상태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단번에 빠져버린 거겠지.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처음 시작하는 부분은 마하 만트라에서 발췌한 부분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질병을 막아준다는 의미의 만트라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가 내레이션하는 부분은 작가  Marianne Williamson가 쓴 책  <A Return to Love>에 실린 문장을 인용하였다고 한다. 사실 가사에 실린 만트라도  Marianne Williamson의 문장도 잘 이해할 수 없고, 내포한 의미조차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몸과 마음이 위로받는 느낌이랄까. 얼마전부터 매일밤 명상의 시간을 갖지만 10분조차 온갖 생각과 불안에 휩싸여 나를 놓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실망스러웠는데 이 음악으로 다시 나를 들여다보려한다. 아니 들여다보기보다는 나를 내려놓으려한다. 단 몇 분만이라도...

 

<Long Time Sun>

 

- will blunderfield

 

Om Tryambakam Yajamahe
Sugandhim Pushtivardhanam
Urvaarukimiva Bandhanaan
Mrityor Mukshiiya Maamritat (repeated throughout the majority of the song)
{We Meditate on the Three-eyed reality Which permeates and nourishes all like a fragrance. May we be liberated from death for the sake of immortality, Even as the cucumber is severed from bondage to the creeper.}
[This Mahamritunjaya Mantra of Shiva, is to protect and cure the persons from diseases, fear of death.]

A Return to Love  by Marianne Williamson

Our deepest fear is not that we are inadequate. 
Our deepest fear is that we are powerful beyond measure.
It is our light, not our darkness that most frightens us. 
We ask ourselves, Who am I to be brilliant, gorgeous, talented, fabulous?
Actually, who are you not to be? 
You are a child of God. Your playing small does not serve the world. 
There is nothing enlightened about shrinking
so that other people won't feel insecure around you. 
We are all meant to shine, as children do.
We were born to make manifest the glory of God that is within us.
It's not just in some of us; it's in everyone. 
And as we let our own light shine, we unconsciously give other people permission to do the same. 
As we are liberated from our own fear, our presence automatically liberates others.


May the long time sun
Shine upon you
All love Surround you, Surround you!
And the Pure Light that burns bright within you
Guide your way home, Guide your way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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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14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가의 세계에 들어 가셨나 보네요...

영생 프로젝트? ㅋㅋㅋ

저도 운동해야 하는데, 수영 배우겠다고 했더니만
저희 회사 이사님이 초를 치시네요... 손에 장을
지지시겠다고라.

음악은 잔잔하니 요가에 딱입니다.

설해목 2019-05-14 14:26   좋아요 0 | URL
네.. 올초에 필라테스하면서 요가도 추가로 하고 있어요. 몸이라도 다스려보고자.. ㅋㅋㅋ
수영은 정말 배우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인데 가라앉을까봐 무서워서 못배우겠어요. -.-
한동안은 이 음악으로 릴렉스 좀 해보려구요. ^^

2019-05-14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4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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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떠올랐다. 오랜 역사 동안 남성에 비해 억압과 차별을 더 많이 받아온 여성은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바라는 욕망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남성보다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야 하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는 여자

 

, 정수진은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습작을 하고 철마다 응모를 하여서 10년 전에 등단을 하였다. 등단할 당시 예정에도 없던 임신으로 수진은 이미 만삭이었고 수순에 따라 결혼을 하고 터전을 잡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10년 동안 꾸준히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결과물도 내놓지 못한 상태다. 스물세 살에 정한 글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한번도 버린 적 없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면서 그 정체성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주 흔들린다.

 

나는 10년째 병에 걸려 있었다. 청탁을 받지 못하는 등단 작가라는 저주에,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에, 장편소설만 당선되면 이 모든 게 한 방에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고문에, 그리고 양주에. _ p.18~19

 

앞 동에는 공부방이 있고,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거기서 중학생 아이들의 논술을 봐준다. 나머지 시간엔 노트북을 메고 소설을 쓰러 간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쓰러 간다. 봄에는 나머지 시간'을 확보하는 게 특별히 어렵기 때문에 틈만 나면 무서운 집중력으로 쓴다. 아무도 읽지 않지만 언젠간 읽힐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쓴다. 고문당하며 쓴다. _ p.27.~28.

 

하지만 나는 안다. 나를 가위눌리게 하는 진짜가 따로 있다는 걸, 나는 일하는 다른 엄마들처럼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러고 사는 게 아니다. 다른 작가들처럼 원고료를 받고 책을 내고 사는 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_p.34

 

쉬면 죄책감이 들어 쉬지 않았다. 쉬지 않고 소설을 썼다. 나는 직장맘도 아닌데 돌 갓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으니까. 아이의 평생 인성이 결정된다는 생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이를 떨어뜨려놓았으니까. 아이와 둘이 있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게 절대 아니라, 소설을 쓰려고 그런 거니까, 소설을 썼다. 기껏해야 소설을. 청탁받지 않은 소설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 소설을._p.63

 

글을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한 스물세 살 이후로 내 정체성은 언제나 글 쓰는 사람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_p.136

 

수진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와 살림에 전적으로 올인하지 못하는 자신 스스로에게 인색하다. 차라리 돈이라도 버는 직업을 가졌다면 아이와 살림에 소홀해도 가족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좀 더 떳떳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돈은 벌리지 않고 결과물은 내놓지 못한 채 생산적이지 않은 것 같은 글쓰기를 10년째 해오면서 주위 사람은 둘째 치고 수진 스스로가 자신감을 잃고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신에게 분노한다. 이런 수진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작가들이 있다.

 

즉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_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펭귄클래식) 중에서..

 

그보다 내게 더 큰 고통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시절이 내게 심어놓은 공포와 쓰라림이라는 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필요한 것으로 보였던, 걸려 있는 돈이 워낙 중하기에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그런 일을 마음에 없는 말을 해가가 비위를 맞추면서 노예처럼 일한다는 것, 그리고 별것 아니지만 소유자에게는 중요하고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 재능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 나 자신, 나의 영혼과 더불어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꽃피는 봄날을 갉아먹고 나무속을 파먹는 녹이 되어 갔습니다. _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펭귄클래식) 중에서..

 

책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고독해야 한다. 저자의 고독, 글의 고독. 자신을 둘러싼 침묵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 안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하루가 흘러가는 매시간,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든 켜 놓은 전등 불빛이든 어느 빛에서나, 정말로 그래야 한다. 몸이 처한 그러한 실제의 고독, 그것은 침범할 수 없는 글의 고독이 된다. _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중에서..

 

절망을 버티며 쓰기. 아니, 절망을 품고 쓰기. 그 절망의 이름은 모르겠다. _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중에서..

 

수진이 등단을 했을 때, 뜻하지 않은 임신 대신 예정에 없던 결혼 대신 좀 더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10년 후의 수진은 스스로 작가라 자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진은 남편과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고 말한다. 그만큼 가족이란 존재가 수진의 글쓰기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아닌 방해꾼이다. 아이 역시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지만 때때로 글을 쓰는 수진을 힘들게 하는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수진의 역할은 점점 늘어가고 그럴수록 글쓰는 데 써야할 시간과 열정과 집중이 줄어든다. 수진은 그런 상태로 10년째 글쓰기에 매달려 온 거다. 수진의 소설이 10년째 마무리 되지 못하는 건 어쩌면 이런 환경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그래서 지금이 중요하다. 자신의 정체성인 글쓰는 사람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는 결정의 시간. 소설에서도 인생에서도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간. 더는 이렇게 수동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최후의 시간. 수진은 자신의 삶에 터닝포인트가 될 그런 봄을 맞고 있다.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

 

 

나는 양주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었다. 한 이야기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우 경사의 답변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볼 때, 나는 그 단어 하나만 갖고도 양주 이야기를 바로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설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_p.17~18

 

아빠는 그 길을 택했구나. 그 길로 간 것이구나. 그러면서 예감했다. 이제부터의 내 인생은 아빠가 한 선택과 아빠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선택, 그 둘 사이의 줄타기가 될 거라는 걸. 하루의 대부분을 자살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살 수 있을 거라는 것을. _p.91~92

 

수진은 등단을 한 이후로 10년째 한 가지 주제인 양주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양주는 수진이 태어나 자란 곳, 수진이 빨리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게 만들던 곳. 지금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친정 엄마가 여전히 사는 곳, 수진이 다니던 여고 뒷산에서 아버지가 자살을 한 곳. 엄마의 친한 지인이 사라진 곳. 스물세 살 때 일어났던 일을, 그 당시의 수진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곳. 수진은 그런 양주에 대한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_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존재에 대한 결핍감이야말로 욕망의 원천이다. 결핍이 클수록 욕망도 커진다. 결핍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욕망에 대해서도 예민해진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객관적인 정황과 상관없이 나는 늘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에 붙들려서 지냈다. _ 이승우, 소설을 살다 중에서..

 

자살한 아버지를 완벽하게 빼닮은 유일한 사람인 수진은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려 10년째 양주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닮았으니 자신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래서 자신이 겪은 결핍과 공포를 자신의 딸이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수진은 이번에야말로 꼭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싶은 건지도...

 

하지만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다. 범죄에 대한 이야기이자 삐뚤어진 가족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픽션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수진 자신에게는 결코 완벽한 픽션일 수 없는 경험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더욱 수진은 10년 전 양주의 사건을 완벽한 픽션으로 둔갑시켜 모든 이들에게 털어놓고 새출발을 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건을 모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설로 읽힘으로써 수진은 그제야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과거에서 놓이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여지라고 생길 테니까.

 

#새로운 만남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면 까맣고 예쁜 내 딸 윤소은이 다가와 엄마 웃어?’라고 물었다. 내가 웃었기 때문에 아이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저녁 내내 잘 놀았다. 우리의 저녁은 즐거웠다. 남편이 회식이나 야근을 하면 나는 저녁 시간이 힘들었지만 이젠 덜 힘들었다. 이선우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도 모르고 친정 엄마도 모르고 하늘도 땅도 모르는 사이에, 이선우는 그렇게 18층 우리 집으로 들어와 내 아이를 웃게 하고 있었다. _p.80

 

수진은 양주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집근처 경찰서의 경찰을 만나게 된다. 이름은 이선우. 10년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고여 있던 수진의 삶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꼬박꼬박 작가라고 말해주는 사람. 자신이 물어보면 성심껏 대답해 주는 사람. 그렇게 선우는 수진의 마음을 봄비처럼 촉촉하게 적시고 수진은 어느새 선우로 흠뻑 젖어버린 마음을 알아챈다.

 

이제껏 함께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을 함께하게 해보라. 때로는 세상이 변할 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들은 추락해 불에 타오를지도 모른다. 혹은 타올라서 추락하거나. 그러나 때로, 새로운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이 변하기도 한다. 나란히 함께 그 최초의 환희에 잠겨 몸이 떠오르는 그 최초의 가공할 감각을 만끽할 때, 그들은 각각의 개체였을 때보다 더 위대하다. 함께할 때 그들은 더 멀리, 그리고 더 선명하게 본다. _ 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중에서..

 

서른아홉 수진의 봄에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래도 아직은자신을 여자로 생각할 수 있을 때,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은 그때 선우를 만났다. 선우를 통해 글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여자라는 정체성도 더욱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선우를 향한 마음이 커갈수록, 선우의 마음을 알아갈수록 또 다른 고민 역시 생겨났다. 수진은 선우와의 만남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소설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새로운 사람과 함께한 그 봄날의 만남이 마흔살을 맞은 수진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는 사실이다.

 

#최은미작가의 결

 

흙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의 숨결이 필요했던 것처럼 일상이나 현실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도 작가의 숨결이 필요하다. 일상이나 현실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만의 시각, 당신만의 욕망이나 해석. 그런 것들에 의해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어서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일상은 돌연 낯설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낯익은 일상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당신은 소설이라는 걸 썼다고 할 수 있다. _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에서..

 

이 소설을 포함해 올해 최은미의 소설들을 모두 읽었다. 단편집 2권과 장편소설 그리고 이 소설까지. 스릴마저 느껴지는 탄탄한 서사의 장편소설에 감탄해서 읽은 작가의 단편소설들은 내가 읽은 요즘 작가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단편임에도 서사가 풍부하고 그야말로 이야기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중편 분량의 소설에서는 또 다른 작가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나 일상 너머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내 밀어붙이는 힘.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최은미만의 결을 생각하게 했다.

 

젊은 할머니, 내 친정 엄마처럼 젊은 할머니로 보인다. 나는 저 여자가 업고 있는 아이의 엄마일 다른 여자에게 잠시 부러움을 느낀다. 손주를 봐줄 수 있다는 건 생계를 위해 직접 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고 그건 아직 남편과 살고 있다는 얘기라고, 저 나이가 되도록 큰 탈 없이 가정을 유지했다는 얘기라고, 저 여자의 딸일 아이 엄마는 온전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때문에 아이도 잘 키울 거라고, 나는 혼이 나간 젊은 할머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_ p.37~38

 

나는 아이를 보며 내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보았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분풀이와 탄식을 다시 들었다. 아이는 때때로 내 지난 시간을 들추기 위해 보내진 심판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안에서 들끓는 욕들을 아이가 알아챌까봐 겁이 났고 내가 묻어둔 기억들이 아이에게 이식될까봐 두려웠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해온 것들을 완전히 떼어두고 아이를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을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_p.56~57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이다. 아직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아이를 둔 마흔의 기혼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글쓰기를 이어갈지 그에 대한 결론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또 재미난 건 추리적인 요소에 있다. 작가가 흘려주는 힌트들을 꿰맞추다 보면 양주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최은미가 쓴 소설이자 나, 정수진이 쓴 소설이기도 하다. 그 이중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더 많은 의미들이 독자를 생각에 잠기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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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12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해목님의 글 한 편으로 몇 권을 읽은 기분이 되었네요.

이 주제에 관해서 저도 몇 권을 읽었지만 제가 할 자격이 있는 말 같은 건 별로 없더라구요.

설해목님의 감상을 읽는 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설해목 2019-05-13 09:32   좋아요 1 | URL
소설을 읽고 여러 책들이 떠오르더라구요.
이 주제에 대한 책들 좀더 읽어보고 싶기도 하구,
한편으로는 이 한편의 소설로도 글을 쓰는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할 건 다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구요.
이 소설 덕분에 주말 이런 저런 책들 다시 뒤적거리며 보냈네요. ^^

hnine 2019-05-13 0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은미 작가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이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는 이유가 될 것 같네요. ^^
청탁받지 못하는 등단작가보다 차라리 등단에 계속 실패하는 예비작가가 나을지. 막상막하일지.
등단 못하고 있던 시절에도 자기는 글 쓰는 걸 멈춘 적이 없었고, 등단 여부에 상관없이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작가라고 생각한다던 구병모 작가 인터뷰도 생각나요.

설해목 2019-05-13 09:37   좋아요 0 | URL
네.. 최근에 읽은 우리나라 젊은작가 중 가장 저랑 잘 맞는 작가입니다. 최은미 작가는..^^
그런 말도 등단해서 책이 그래도 팔리는 작가의 여유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클 텐데
오랫동안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일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랜 기다림 끝에 등단한 작가들 보면 정말 인간승리란 생각이..ㅎㅎㅎ

2019-05-15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디어 라이프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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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앨리스 먼로의 단편에 빠져들었다. 단정하고 소복한 문체로 빚어내는 삶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 묵직하다. 단편소설에서 이런 큰울림을 받기도 쉽지 않은데 역시 앨리스 먼로구나 싶다. 이어 읽을 단편집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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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의 연휴에 고향집에 다녀왔다. 고향에 가면 늘 지척에 있는 바다를 보러 갔지만 이번에는 좀 더 먼 곳을 가보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충분 단양에 다녀왔다. 역동적인 바다 대신 잔잔한 강이 주는 평온함이 좋았다. 바다 둘레길 대신 강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강바람에 축축했던 마음을 말려보았다.  단양강잔도길 끝에 만난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한 소도시의 모습은 고향과 닮은 듯 달랐다.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철도다리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낡아서 이제 더는 기차가 다니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새로 지어져 기차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튼튼해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끄덕없을 것 같던 튼튼한 철다리도 시간의 무게 앞에서는 녹슬어 허물어지고 제 기능까지 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것으로 교체되는 게 순리인가 싶어 한참을 두 다리를 번갈아 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아니 지금부터라도 서서히 삶에서 물러날 준비해야겠지 하는 생각도 하면서... 엄마, 아빠는 삶을 조금씩 정리하고 계신 걸까. 연휴 내내 바라보던 두 분의 뒷모습에서는 어떤 낌새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저 웃음이 적어진 두 분의 얼굴만이 지금의 심정을 짐작케 할 뿐이다. 여전히 걱정거리인 남매가 두 분의 노년을 우울하게 하는 것만 같아 오월의 날씨와는 다르게 마음은 늦가을 흐린 날씨 같았던 연휴였다.

 

 

 

 

"그녀는 작은 지역에 가면 재미 삼아 자신이 그곳에서 살 수 있겠는가 살펴보는 습관이 있다. 이곳은 꼭 알맞은 것 같다. 근처 들판에서 생산된 것은 아니겠지만 꽤 신선한 채소와 흡족한 커피를 구입할 수 있는 제법 큰 규모의 시장, 그리고 세탁소와, 수준 높은 잡지를 갖다놓지는않지만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해주는 약국." _  앨리스 먼로 <호수가 보이는 풍경> 중에서

 

여행을 오기 며칠 전에 읽은 앨리스 먼로의 글때문이었을까 나는 단양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여기서 내가 산다면 어떨까를 상상했다. 삼척과 닮은 작은 시내, 혼자 살기에는 필수적인 쉽게 찾을 수 있는 편의점과 편의시설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강과 푸른 나무들, 이런 곳이면 아무 연고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는 삼척과 서울이 아닌 전혀 나와 상관이 없었던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단양 구인사와 오대산에 있는 금강사는 입구부터가 달랐다. 화려하다 못해 위압감마저 들던 구인사와 달리 소박하다 못해 스님의 인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금강사. 이틀 동안 두 곳의 절을 다녀왔는데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곧 있을 부처님오신날을 위해 걸린 연등에서부터 두 절은 차이가 났다. 이름과 돈 액수를 적은 명찰이 달린 각양각색의 연등들이 절을 가득 메운 구인사와 달리 한가지 모양의 연꽃이 가지런히 달린 금강사. 가는 곳곳마다 돈을 넣을 수 있는 함을 비치해둔 구인사와 달리 금강사에는 대웅전에 있는 함밖에는 보지 못했다. 구인사가 관광객을 위한 절이라면 금강사는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절같았다. 사람 북적거리고 휘황찬라한 조형물들이 가득한 구인사보다는 늦은 겹벚꽃을 볼 수 있고 약수 한잔 마실 수 있었던 금강사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처음 타 보았다. 우등고속보다 3천원 더 비쌌는데 그만큼 값어치를 했다. 커튼을 치면 혼자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스카이라이프로 다양한 티비채널을 볼 수 있고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휴대폰도 충전할 수 있고 좌석도 넓어 몸을 주욱 펼 수도 있었다. 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며 간단한 물건들을 둘 수 있는 선반까지... 오래 걸리는 이동 시간에 이만한 편의시설을 갖추면 차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오는 길에 '세계테마기행 인도차이나 미식여행'을 봤다. 20년차 셰프가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의 음식을 대접 받고 자신도 그들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어가 짧아 여러 여행자들과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모습에서는 포기한 영어공부에 대한 의욕이 불쑥 솟아났다. 무엇보다 태국 빠이캐년에서 인터뷰한 영국 여행자가 인상적이었다. 젊어보이는 연인이 빠이캐년에서 일몰을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일몰을 보기 위해서 이런 여행을 위해서 직장까지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런 그들의 표정에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 바라보는 풍경에 감탄하고 현재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여행을 위해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저들과 나는 뭐가 다른 걸까. 버스 안에서 내내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울어버렸다. 다행히 커튼이 쳐져 있어 눈물을 빨리 닦아낼 필요는 없었다.

 

 

그런 시간, 그런 곳에선 멀리 두고 온 것만 같은 한국의 나에 대해 남 이야기하듯 술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_p.126

 

어쩌면 그렇게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려고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낯섦이 일상에게 해주는 대답을 찾으러…… _P.174

 

관계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세상은 그대로 좋아 보였고, 내가 그 안에 있고 없고 따위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떨어져나온 나도 나쁘지 않았다. 각자 그렇게 서로에게 불만이 없는 세상과 나…… _P.188

 

밥을 먹을 곳을 찾아야 하고, 잠자리 고민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나를 환영해준다는 말이 꽤나 반가웠던 건, 모든 것을 털어낸 다음에 남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여행은 그 말, ‘너는 괜찮아라는 말을 듣기 위해 떠나는 것 아닐까. _P.191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다시 만날 일도 없지만, 그런 이들과의 기분좋은 마주침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인간을 좋아하고 반가워한다라는 걸 확인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의외로 힘이 세다. 어느 만큼은 그런 마주침이 다시 여행을 떠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_P.208

 

김현우, <건너오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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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06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제가 전국의 폐사지를 비롯해서
숱한 사찰들을 섭렵해 봤습니다만...

가장 마음에 드는 절은 개심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풍 부석사도 가을 여행하기
에 최고였구요.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보셔
야 합니다 반다시.

내려 오시는길에 사하촌에서 파전+막걸리
한 사발이면 더 바랄 게 없을 듯 합니다.

여행 길에 만난 이들과 나누는 대화야말로
여행의 참맛이지효...

잘츠부르크 호스텔 빨래방에서 한참 동안
야기를 나눈 캐나다 친구 그리고 뮌헨에서
하룻 동안 술친구 등등 숱한 기억들이 주마
등처럼 스치고 지나 가는 밤이네요. 이럴
땐 코히 비루를... 냉큼 나가서 사와야지 -

설해목 2019-05-07 09:46   좋아요 0 | URL
와~~ 진짜 레삭매냐님은 정말이지 제가 부러워할 경험을 모두 하신 분이시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
개심사 저도 가보고 싶은 절인데 언젠가는 가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고즈넉한 절이 점점 좋아집니다.
정말이지 멋진 여행을 위해서라도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됩니다!! ㅎㅎㅎ
오늘은 영어회화책을 하루 종일 검색할 것 같네요. ㅋㅋ

bookholic 2019-05-0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 보니, 저도 프리미엄 고속버스 타고 여행가고 싶어집니다.^^ 그런 버스가 있었군요....

설해목 2019-05-07 09:47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 타봤습니다. 정말 딴 세상이더군요. ㅎㅎㅎ
삼척까지 족히 3시간 반에서 4시간 이상 걸리는데 명절때 막힐 때는 더 걸리구요.
그럴때는 무조건 프리미엄 버스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북홀릭님도 꼭 한번 타보셔요. 신세계일 겁니다. ^^

카알벨루치 2019-05-07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을 다녀와 이런 글을 쓰는 분, 설님 같은 분...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ㅜㅜ울긴 왜 울어요 하지만 흘리는 눈물이 있어 더 기름진 여행이 되어겠군요 ^^👏👏👏

설해목 2019-05-07 17: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흘린 눈물만큼 생각도 많고 반성도 하고 나름 다짐도 하는 그런 여행이었습니다. ^^
카엘벨루치님 댓글 덕분에 여행의 뒷맛이 조금은 달게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