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미스테리아 1호 - 창간호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 / 엘릭시르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장르를 깊게 파고들면서도 장르의 외연을 넓게 탐색하는 기획이 공존하는 잡지. 잡지인데 두고두고 책처럼 재독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ww.medici.tv


메디치 tv 1 년권을 끊어놓고 하루에 한 클립은 보자는 결심까지는 좋았는데, 그냥 감동하고 눈과 귀 한번 호강하고 제쳐놓고 말기엔 아까운 '작품'이 너무 많더라. 그래서 올해에는 그날그날 보게 된 영상에 대한 기록을 좀 남겨보고자 한다.  콘서트 영상 같은 건 단순 기록만 하더라도, 다큐나 기록영상, 무대영상 같은 건 그래도 좀 자세히 줄거리라도.  언제 또다시 볼지 모르니...





1.

2012년 12월 31일 밤에서 2013년 1월 1일 새벽 넘어가는 동안 본

Aleksandr Sokurov, " Hubert Robert, A Fortunate Life"(1996)


 

   

 


메디치 티비 영상 주소는 http://www.medici.tv/#!/hubert-robert-a-fortunate-life

(하지만 맛보기 영상은 메디치티비의 짧은 영상보다는 유투브가 낫겠다.) 

 


 

 

  어젯밤에 이 영상을 넋 놓고 보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는데, 내 평생 그렇게 행복하고 경건하고 차분한 송구영신은 또 처음. 해와 해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극(뭔가 시간 층이 달라진다거나 뭔가 다른 차원 간 이동)이 정말 있다면, 그 간극엔 쏘꾸로프가 담아낸 저 영원의 단면 같은 시공간과 공기와 결과 색감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그 막간을 우연히 보게 된 거라고.


 

 

영화는 영상 속 화자가 일본의 전통 연극 장르 '노가쿠' 공연을 보러 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산하고 축축한 안개 낀 봄날, 바람에 살랑거리는 편경 소리, 새 소리, 그리고 안개가 흩어지고 모이는 소리까지 그대로 들릴 것 같은 밤이다.

무대가 되는 신사 마루에 노의 배우들이 조용히, 무게감 없는 걸음걸이로 부유하듯 나타난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노가쿠에 대해

 

일본 전통 가면극 장르인 '노가쿠'에 대해선 2001년 국립극장 야외에서 태양극단의 '제방의 북소리' 공연을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노가쿠, 분라쿠 등 아시아 연극과 인형극 전통에 현대 연극과 무용을 접목한 이 작품을 본 그날 밤의 경험은 벌써 10년도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매우 인상적인,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작년(2012년) 여름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보던 EBS의 "세계 무형 문화 유산" 프로그램에서 '노가쿠' 편을 우연히 보았는데, 노가쿠 배우 특유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걸음걸이와 몸짓에 다시 그 기억이 떠올랐다.

 

EBS 다큐에선 "노가쿠 배우는 시공을 초월해 인간 세계와 신과 영혼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고뇌와 이상을 표현한다"며, "줄거리보다는 주연 배우의 동작과 춤, 노래와 의상과 도구, 그리고 무대의 분위기 등을 더 중시하는 독특한 가무극"이라고 설명했다.

움직임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상징적인 동작으로 의미를 표현하는 노가쿠에서는 배우의 걸음걸이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는 것이었다. 단 두세 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시간이나 거리가 변하는 걸 표현하기 때문이란다.  노가쿠에서 신의 역할을 맡는 주연 배우는 현실의 시공간이 아니라 영원의 시공을 걷는 것이다. 또한 배우의 개성적 얼굴이나 연기가 아닌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가면의 정형화된 표정과 제스처(3-400년 전 가면의 형태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한다)로 독특한 시공간을 소환하는 것이다.

 

"연극에서의 언어는 단지 행동이라는 캔버스 위에 무늬에 불과하다"는 메이에르홀드의 연극론과도 연결되는 연극의 원천적 힘, 즉 마스크, 제스처, 움직임의 힘이 극대화된 장르 중 하나가 노가쿠가 아닐까 싶다. 마스크는 관객에게 단지 지금 무대에서 벌어지는 극 속의 역할만을 보도록 하지 않고, 관객들의 기억 속에 있는 마스크의 전통을 환기한다. 물론 메이에르홀드도 일본 연극의 장식성에 내포된 '연극성'의 본질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상징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공간을 남기는 노가쿠 특유의 함축적인 무대장치, 즉흥성을 배제한 철저히 계산된 연출과 연기 역시 메이에르홀드의 '우슬로브니 연극'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소쿠로프 영상의 화자는 이 독특한 분위기의 가면극을 보다가, 문득 도스또옙스끼 작품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문득 다른 나라에 와 있었다. 우리나라와 모든 게 똑같지만 모든 게 환하게 빛나는. 키가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꽃잎을 반짝이며 서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이파리가 마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바스락거리며 내게 인사했다, 아니 그런 게 분명했다."

 

이 구절을 두 번 반복해 암송하는 사이, 노가쿠 무대 옆에 서 있던 꽃잎이 하늘하늘 흩날리던 벚나무는 안갯속에서 어느새 시공과 현실-가상의 경계가 바뀌듯, 마치 노가쿠의 벚꽃 신 역할의 배우가 저승인 막 뒤에서 이승인 무대로 걸어 나오는 걸음걸이 같은 템포와 호흡으로, 8세기 한 프랑스 화가의 그림 속 나무로 바뀐다.  

 

 

 

아래 그림 속 나무 같은 나무로.

 

 Hubert Robert_ Landscape with Ruins_1772


 

 계속해서 그는 위베르 로베르의 그림 속과 자신이 보고 있는 노가쿠 무대 사이를, 위베르 로베르 그림의 상당수를 소장한 에르미따주 미술관의 전시실과 다시 그림 속 사이를, 또다시 위베르 로베르의 그림 속과 그림의 모델인 듯한 실제 건축물의 폐허 사이를, 마치 신처럼, 안개처럼, 유령처럼 오간다. 안개가 그림을 어루만지듯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그 안개에 의해 그림이 옅어지듯이 어느새 그림은 현실의 폐허로, 회랑으로 바뀌곤 한다.


 

 

 

 

 

 

 

 

 

그 안개 같은 희미하고 느릿한 움직임 위로 유령 같은 목소리가 읊조리듯, 한숨 쉬듯 나직이 내뱉는 말들.

 

  "건축물의 자연스러운 죽음에는 끔찍한 점이 전혀 없다. 그저 멜랑꼴리만 있을 뿐. 가장 단순하고 그러므로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멜랑꼴리만이." 

 

 "폐허. 그것은 끝없이 쳐다보고 있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어떤 오만함을 치유하는 것.  더 많이 바라볼수록, 이전 세기의 그 믿을 수 없는 풍요로움에 더 감탄하게 된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저들은 저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낸 것일까?" 

 

 

그리고는 카메라는 폐허를 넋 놓고 바라보고 앉아 있는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을 화면 가득 반복해 담는다.

바로 이 그림 속 오른쪽 아래 그려진 화가의 자화상이다.

 

Hubert Robert_ Ancient Temple: The ''Maison Carree'' at Nimes_1783

(http://www.arthermitage.org/Hubert-Robert/Ancient-Temple-The-Maison-Carree-at-Nimes.html ->여기 가면 확대해서 볼 수 있음. )

 

 "얼마나 운이 좋은 남자였던가. 위베르 로베르는 시대에 자신을 맞추었다. 그는 시대보다 자신이 한 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일초 일초"

 

 "그는 자신이 편지를 쓰는 것만큼 그림을 빨리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5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다. 전 문명이 다 담길 수 있는 무한한 세계를. "

 

 

 

 

 

 

영화는 이 위베르 로베르라는 화가의 세계에서 그런 이국의 풍경과 문명이 무한히 소장된 상트 페데르부르그의 에르미따주 미술관으로 시야를 옮긴다. 

 

 

 

 "건축물이란 빛과 그림자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상자이다. 눈 부신 햇빛과 겨울의 잿빛 황혼을."

 

그러나 에르미따주는 수년마다 몇 번씩 범람해 도시를 잠기게 하는 네바 강 바로 옆에 세워진, 그 자체로 위태로운 삶을 영위해가는 하나의 생명체 같은 건물이다.  

 

 

 

A Hermit Praying in the Ruins of a Roman Temple, 1760

 

 

 

  그러다 때로는 로베르 위베르 그림의 표면을 극도로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위베르 로베르 그림의 몸, 그 살결, 그 살아 있는 베일. 그것은 숨을 쉰다. 그리고 종종 아프기도 한다." 

 

그림에 생명이 있는 듯,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그림을 스치는 안개가 마치 그림이 내쉬는 숨결 때문에 물러났다 몰려오는 것처럼 연출한 쏘꾸로프의 의도가 납득이 되는 대목이다. 

 

마지막에 화면 속 목소리 화자는 위베르 로베르의 말년을 건조하게 정리한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던 남자지만, 말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아이들을 모두 차례차례 잃는 슬픔을 겪은 후, 75세의 일기로 죽었다. 이젤에 걸려 쓰러지는 바람에. 아니 아마도 삶이 끝나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화면은 노가쿠 장면으로 넘어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하늘, 자욱하고 짙은 구름이 뒤덮은 무겁고 짓누르는 듯한 어둑한 하늘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밤안개, 그리고 마지막 목소리. 

 "연극이 끝났다. 주위를 감도는 벚꽃 향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  Bruno Monsaingeon, Grigory Sokolov Plays Beethoben, Komitas, Prokofiev

   - 2002년 파리, 상젤리제 극장 리싸이틀 연주.

 http://www.medici.tv/#!/grigory-sokolov-joue-beethoven-komitas-prokofiev

 

 베토벤 소나타 9번, 10번 15번

 소고몬 코미타스 - Six Dances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

+ 앵콜곡들

  

 놀랍다. 멍하니, 하던 일 제쳐놓고 그야말로 멍하니, 화장실도 못 가고 멍하니 앉아 보았음.

 처음 들어본 코미타스 무곡도 엄청나게 아름다움.  그냥 이대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랬다.   

 베토벤 들을 때도 비슷했지만, 특히 메카닉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를 이 사람 연주로 듣고 있자니

 검은 옷을 입은 굽은 등의 소콜로프까지 그냥 통째로 피아노인 것 같은 연주. 극도로 절제된 조명에다, 

 누구보다도 피아노와 피아니스트 간의 화학적, 기술적 결합의 메커니즘에 대해 잘 아는 몽생종이 담은 영상이니 더 그런 듯. 

  피아노가 저런 악기, 아니 저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소리가 나는 섬세한 기계구나 하고 새삼.   

 

 그리고 마지막 앵콜곡인 바흐 연주에 눈물이 핑 돌며 뭉클.

 왜 그런지 이 피아니스트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그저 다 옳은 것 같은, 처음 들어본 음악도 그냥 다 수긍하게 되는 연주는 리흐테르 말고는 없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전 엡티 모아둔 파일을 보다가 내가 사랑하는 Slow Lane 칼럼의 첫 연재 소개 기사를 발견했다.

무려 2003년 1월달 신문.

나의 주말은 이 칼럼을 토요일에 정독한 주말과 아닌 경우의 질이 확연히 다를 정도로 내게는 소중한 칼럼인데,

그 출발점과 칼럼의 성격을 필자 자신의 언어로 분명히 밝혀두는 기사를 다시 보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참고로 오늘 칼럼http://www.ft.com/intl/cms/s/2/f314bf06-06f7-11e2-92b5-00144feabdc0.html#axzz29oDuwRfZ도 좋지만,

지난 주와 지지난 주 칼럼이 진짜 좋았다.

지난 주 칼럼은 러시아의 유로지비 전통에 대한 것으로, 마리아 유지나와 쇼옹 얘기가 나와서 반가웠고,http://www.ft.com/intl/cms/s/2/ef9b6884-06f7-11e2-92b5-00144feabdc0.html

지지난 주 칼럼은 스토파드 각색의 안나 카레니나 새 영화에 대한 평http://www.ft.com/intl/cms/s/2/ecd8880c-06f7-11e2-92b5-00144feabdc0.html#axzz29oDuwRfZ이라 줄 쳐가며 열심히 읽었다.  )

 

 

예전 칼럼들도 인터넷으로 다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2003년은 아예 업로드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에 부분부분 타이핑을 해둘까 한다. 

예이츠의 시를 인용하며 시작해서 빅토르 에리쎄를 자기 칼럼의 '수호신'으로 꼽으며(역시!!!) 끝을 맺는, 이 사람 특유의 그 리듬감과 절묘한 압축과 섬세한 묘사의 조화는 글 전체를 봐야 만끽할 수 있지만, 다 타이핑할 수는 없으니, 중요 문장들을 몇 부분 옮겨 놓는다. 에리쎄 언급 부분은 전부 옮겨 놓았다. 에리쎄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상찬! 그가 얼마나 '드문' 위대한 예술가인지... 에리쎄에 대해 내가 경외감을 갖는 부분이 정확하게 지적되었다. 

 

 

 

 

 

 Víctor Erice_ El Espíritu de la colmena (1973)

 

 

 

 

"The Peace comes with the slowing down, which brings heartfelt appreciation of all things and times, the purple glow of noon, the glimmering midnight, the linnet-haunted evening.

 

So this column is not advocating romantic escapism, the idea of getting away from it all, or even downsizing. Over-strenuous efforts to get away from it all tend to defeat their object: you ecounter the same problems on arrival. The point is to find and enjoy the oases of peace that are freely - and I mean often freely - available in the interstices of the daily round : those easily forgotten or ignored oases, the familiar painting(which you could make a date to spend an hour with) or the poem you half-remember (which you could learn by heart), the pair of bustling blue-tits in the garden laburnum you have hardly noticed for years, the conjunction of Saturn and Jupiter in the night sky, a mode of transport which facilitates richness of experience rather than bullet-like translation from A to B. One of the rules of the column is never to go directly from A to B. In the game of Monopoly, the place you go directly to is jail.

 

Back to bee-keeping for a moment. Another of this column's patron saints is the Spanish film director Victor Erice, the reclusive Basque who made one of the most beautiful films of all time, The Spirit of the Beehive. It's not really a flim about bee-keeping, but about how the world appears to a child of seven or eight, in all its mystery and strangeness and horror and beauty.

 

The way Erice conveys this is itself something of a mystery but it has to do with letting things breathe. His camera lingers over things, doesn't rush on or pass them by, pays them proper attention(which is so rare that it seems odd) and so allows them to give themselves to the viewer. Things as well as people need to be granted the proper time in order to give of their best. They also need to be regarded in a certain way, which is free of worries about whether they can be pressed into service.

 

Giving the right amount of time to things and people represents a kind of courtesy. In my experience people and things respond to that courtesy. Birds and fish come not to the anxious birdwatcher or angler, but to the one who tunes into the rhythm of the trees and the sound of the lake lapping by the sho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Victor Erice_ El Sur

 

 

 

http://www.ft.com/intl/cms/s/2/6c6a21cc-a58f-11e1-a3b4-00144feabdc0.html#axzz1xLPSzhnw

 

이번 주 FT weekend의 Slow Lane 칼럼의 주제는 스페인이다. 제목은 "The Master of the Art of Living"

언제나처럼 한 문장 한 문장 밀도 높은 훌륭한 퀄리티. 뭐 전체 요지는 요즘 동네 북 역할을 그리스와 번갈아가며 맡고 있는 스페인에 대한 일종의 'mini-defence'임을 자처하며 시작해 , 문제는 스페인이 아니라 유럽이라고 일갈하는 듯한 뉘앙스로 끝나는 칼럼이다. 무엇보다 스페인을 찬양하고, 스페인의 'the art of living'을 설명하는 이 필자 특유의 방식에서 발휘되는 유연하고 풍성한 지성이 돋보이는 몇몇 대목은 밑줄을 치고 메모해둘만 하다. (가령, 'Gusto' 라는 스페인 단어로 논지를 보충하며,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을 유려하게 섞는 그 절묘한 조합의 기술이나, 복잡한 맥락이 있는 사건이나 인물을 몇 마디로 적확하게 그 맥락을 짚어주고 넘어가는 이 사람 특유의 압축 기술(단어 선택 기술)이 발휘된 대목들.) 

 

 

이 칼럼의 필자에게 스페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삶이 더 다양하고 풍성하다는 걸 알려준 나라이며("made me feel life was more various and richer than I had realised"), 맛, 기쁨 등을 뜻하는 'gusto'의 감각적인 원뜻에 가장 충실한 나라이다. 

the word gusto, meaning vigorous enjoyment, zest or relish, is a Spanish word. Not just that the Spanish lived with more gusto but that they hadn’t lost touch with the word’s original sensuous meaning. A gusto in Spanish means according to taste and to be a gusto means to be at ease, comfortable in your skin. Another untranslatable “g” word in Spanish is gana, as in “porque me da la gana”, “because I damn well want to”.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영화감독 빅또르 에리쎄가 갑자기 언급되어 반가웠던 대목.

I happen to prefer the underrated and understated director Victor Erice to the much more prolific and flamboyant Pedro Almodóvar. Erice’s masterpiece Spirit of the Beehive, made while Franco was still alive, managed to say more about the half-buried memories and legacy (especially the legacy of silence) of the civil war than any film made subsequently.

나 역시 현란하게 인생을 상찬하는 알모도바르(엄청난 다작)보다 기억과 침묵의 유산을 그리는 탁색의 에리쎄(살짝 야속하기까지 한 과작)가 보여준 '삶'의 단면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며칠 전 개막된 유로 2012를 밤마다 한 경기씩 보고 자고 있는데 (처음에는 단지 개최지가 '폴란드-우크라이나'라는 이유만으로 보기 시작했다), 축구 한 게임 보는데 무슨 문명사와 문학사, 그리고 현재 복잡한 유럽 상황까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망상하며 투영하고 보느라, 전후반이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듯 끝나버린다. 축구 경기를 보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사가 충돌하여 뭔가 이야기의 단락이 생기고 경기의 맥락이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리며 도사린달까.

 

물론 내 입장에선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조편성이 있을까 싶은 A 조( 그리스, 폴란드, 체코, 러시아의 각 조합을 한번에 다 볼 수 있다니) 경기들이 가장 흥미롭지만, (특히 그리스와 폴란드 경기는 지금까지 내가 본 그 어느 경기보다 흥미진진했다. 며칠 후 그리스와 러시아 경기, 폴란드와 러시아 경기도 볼 수 있다니 두근두근두근), 이 칼럼을 마침 읽게 되어 오늘 밤에 있을 스페인과 이탈리아 빅매치를 보는 맥락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축구라는 예술의 두 거장이자 "삶이라는 예술The Art of Living"의 두 거장이 그라운드 위에서 만난다.

 

 

 

 Henri Le Sidaner_Table with lanterns in Gerveroy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실제 리스본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하지만 나의 '리스본 로망'과는 상관 있는 사진이다.)   

 

 

리스본은 내게 그야말로 '로망'의 도시이다.

 

가장 사랑하는 도시도 따로 있고, 실제로 가본 곳 중에 살고 싶었던 도시도 따로 있지만, 리스본은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나를 한없이 꿈꾸게 하는 '로망'의 도시다. 

 

명백히 빔 벤더스의 <리스본 스토리>에서 발아된 그 로망은 그 이후 별다른 첨삭과 수정 없이 마치 어딘가 실재하는 시공간으로 내 머릿속에 계속 존재했고, 내 로망 속 리스본은 여전히 벤더스 영화에 담긴 리스본의 공기, 색감, 소리로 축조된 얼개로 남아 있다. 아마도 실제로 리스본을 가게 되어도, '나의 리스본'은 여전히 벤더스의 리스본이라는 틀 안으로 부러 회귀할 것이다.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어쩌면 영원히 가지 않을, 영상이라는 허상의 틀이 걸러낸 이미지와 소리의 조합일 뿐인 어떤 '도시'의 상을 마치 향수에 젖듯이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그저 그 로망은 그것을 부러 해명해야 할 필요도, 굳이 실현해볼 의지도, 더 구체화하고픈 욕망도 불러일으키지 않은 채, 그렇게 옅어지는가 싶다가 다시 새록새록 짙어지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안에 삼투해 들어간 것 같다.

 

 

 

그 로망을 글로 옮긴다면 브로쯔끼의 <Watermark> 비슷한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 감히 엄두도 못 내고-내 깜냥으론 열 번 다시 태어나도 안 되는 일이니 그냥 표현하지 않은 채 추상적인 뭔가로 뭉뚱그리고 켜켜이 묻어둔 감정과 기억들이 얼마나 많은지. VN 번역을 하다 보면, 그 감정과 기억 조각의 일부 파편이 마치 딱 맞는 틀을 만나 떼어진 듯 잠깐씩 수면 위에 떠오르는 때가 있는데, 보잘것없는 내 소우주에 할당된 그 과분한 행운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있었는데, 로망은 스스로 길을 내어 그 이야기를 이어가게 마련인지, 어느 날 우연히 그 로망이 구체적인 언어로 내 눈앞에 묘사되었다. (로망이 로망스로 발전된 순간이랄까. ^^)

 

 

 한 달 전 즈음인가, 을지로 지하 리브로 서점 한 켠에 생긴 헌책방(예전에 그 코너에서 일서 문고본과 잡지를 팔았던가 씨디 코너였던가 기억이 흐릿한데...)에서 리퍼브인 것처럼 보이는 존 버거의 "여기, 우리 만나는 곳"(열화당, 2006)을 발견한 것이다. 그 책에서 '리스본' 장을 읽기 시작했을 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게 마치 벤더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우연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가다 어떤 방 문을 열었던 순간과 흡사했다.

 

 

 

 도시 인상기랄까, 자전적 편린이랄까, 명상 소설이랄까, 글쎄, 어떻게 이름을 붙여도 이 책 전체를 온전히 설명할 장르를 찾기는 어렵겠지만, 나에게 이 책은 브로쯔끼의 <Watermark> 류의, 내가 생각하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여행자의 기록 형식' 즉, 여행자나 일시 체류자의 신분으로 낯선 도시에서 경험하는 그 독특하고 낯설기 그지없는 인상과 상념, 그 추상적이고 임의적이고 찰나적인 양태 그 자체를 오롯이 담아내고자 애쓴, 흔치 않은 작품이었다. <Watermark> 이후로 다와다 요코의 '유럽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글만이 유일하게 소속되어 있던, (나 혼자서 엄격히 지킨) 그 장르 경계 안에 존 버거의 이 책은 무리 없이 진입할 뿐 아니라, 그 장르의 외연을 더욱 풍부하게 넓혀 주는 면이 없지 않았다. 리스본, 제네바, 끄라꾸프, 마드리드..... 이 중에 '리스본' 장 하나만으로도. (사실 내가 사랑하는 도시인 끄라꾸프를 묘사한 장은 조금 실망이었다.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시와 존 버거의 끄라꾸프는 많이 달랐다. 도시는 실제로 가보기 전에 많이 사랑하고 동경하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리스본' 장에서 화자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인 리스본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영혼과 만나, 어머니와 비로소 화해와 이별을 하고, 어머니의 영혼을 그곳에 안치하는 진정한 장례를 치른다. 도시 순례는 곧 어머니의 과거와 기억에 대한 소환과 반추의 과정이 되고, 도시는 그 자체로 이승과 저승 사이의 긴 문턱, 과거와 현재 사이의 수도교, 망자와 산 자가 숨바꼭질하는 게임판이 된다.

 

 

"존, 이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란다. 이제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밤에 몇 시간만 빼고. ...... 리스본 시내에서 전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는 거의 없단다."(16쪽)

 

    

망자가 지상에 머물기로 하는 경우,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평생을 살았던 도시도, 살았을 때 행복했던 곳도 아닌, 다른 곳을 고를 것이다. 가령 리스본 같은.

 

"리스본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법은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다르다. 이곳은 게임을 한다. 이곳의 광장과 거리는 흰 돌과 색돌로 무늬를 넣었기 때문에 길이라기보다는 천장 같아 보인다. 벽은 안팎을 막론하고 전부 그 유명한 아줄레조스 타일(유약을 입힌 푸른색의 타일)로 덮여 있다. 그리고 이 타일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것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19쪽)

 

 

"그러면서도 벽과 바닥, 창문 주변이나 계단을 따라 똑같이 장식된 타일은 뭔가 다른 것, 아니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흰 도자기 표면의 잔금 무늬, 생동감 넘치는 색상, 틈을 메운 모르타르, 반복되는 패턴. 이것은 모두 그 타일들이 뭔가를 덮고 있으며, 때문에 그 뒤나 그 밑에 있는 것은 앞으로도 쭉 보이지 않고 감춰진 상태를 유지하리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걸어가면서 본 그 타일들은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많은 카드놀이를 하는 듯했다. 내가 걷고, 계단을 오르고, 방향을 바꾸는 사이사이에 판이 바뀌고, 판돈이 오갔다. " (20쪽)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것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는' 타일이 깔린 이 도시는 마치 카드 게임을 하듯 은밀히 숨겨놓은 서사를 이면에 드러낸다. 도시의 순례자는 그 타일들을 밟고 스쳐 지나가며  어느새 이 도시가 풀어놓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가 걷는 길은 그 자체가 이야기, 서사의 길이 되어간다.  

 

 

" 가파른 절벽 같은 암반에 터를 잡고 있어서 몇 백 미터마다 솟아올랐다가 곤두박질 치는" 구릉이 일곱 개는 되는 곳.

도시의 가파른 그 거리들은 현기증을 가셔 줄 온갖 방법을 몇 세기가 지나는 동안 궁리해 왔다.

 

"계단, 시야의 차단, 층계참, 막다른 골목, 난간, 덧문. 모든 것이 태양과 바람을 피할 보호막으로, 그리고 실내와 실외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 목적으로 사용되었다."(20쪽)

 

 

 

 

계단, 층계참, 막다른 골목, 난간, 덧문, 문턱......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공간의 이름들이다. 서사의 굽이가 생기고 서사의 은밀한 계기가 스며드는 공간(가령, 도스또옙스끼의 '문턱의 시공간'. 도스또옙스끼의 인물들은 얼마나 자주 문턱에 서서 은밀한 얘기를 엿듣곤 하는가). 그렇다, 리스본은 바로 그런 공간 자체로 이루어진 도시인 것이다. 도시 자체가 계단이자 골목이고 문턱인 도시. 고대 바빌로니아의 건축물을 상상할 때마다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던 건, 바로 그 도시를 거니는 것 자체가 그 도시의 서사를 발로 밟으며 그 궤적을 추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상상 때문이었다. 내게 서사는 바로 그런 굽이와 계단과 문턱과 난간의 형태로 이루어진 하나의 건축물이었기에.

 

 

나는 리스본의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고, 리스본과 관련된 소설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리스본의 '서사'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어떤 개별적이고 특수한 서사에 대한 매료가 아니라, '서사'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태, 언어 행위 양식이 '도시'라는 또 다른 인간의 존재 양태와 행위 양식과 만나 구체적인 물질로서 현현하는 것에 대한 매료였다.

 

 

 

벤더스의 '리스본 스토리'에서 카메라는 그야말로 여행자의 눈처럼 도시를 여행한다. [영화에 나오는 한 영사 기사는 리스본의 한 영사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인간이 기록한 세상의 첫 '원 필름'(인간이 신의 시선에 대응할 만한 시선을 획득한 최초의 눈이랄까)을 찾다가, 그냥 카메라를 짊어지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 '원 필름'을 재현해보고자 한다.] 카메라가 훑는 도시의 구릉과 골목과 하늘과 사람들과 공기와 색 자체가 영화의 서사가 되고, 그 서사는 공들여 꾸민 그 어떤 서사보다 아름답고 진실한 인간과 인생의 서사를 얘기해준다. 리스본의 역사를 얘기하지도, 리스본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을 얘기하지도 않는 이 영화의 제목이 '리스본 스토리'인 것을, 나는 이제 이렇게 이해한다. 리스본 그 자체가 스토리, 즉 서사라는 뜻이라고. 인간에게는 서사 말고는 없다, 인간은 곧 서사이며 세상은 곧 서사다, 라고까지 말해 버리면, 그저 내 모토를 이 틈에 슬쩍 발설해 보려는 수작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벤더스가 리스본에서 영화, 혹은 필름의 본질과 진실을 얘기할 수 있는 무엇을 발견했듯이, 나 또한 리스본에서 '나의 존재 이유'이자 '유일한 신앙'인 '서사'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무엇을 발견한 것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