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이사를 온 첫날 저녁, 할아버지 앞에 불려나가서 들은 얘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몇 가지 나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묻고 나서, 할아버지는 갑자기, 내가 6.25 때는 몇살이었으냐고 물었다. 정확한 나이는 얼른 계산이 되지 않아서 열 살이었던가요, 하고 내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아마 그럴 거라고 하며 사변이 남겨놓고 간 것이 무엇인 줄을 모르겠군, 하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변 전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고, 있다고 해도 어린아이로서의 기억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무엇이 사변 후에 더 보태지고 없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것은 가정의 파괴라고 한마디로 얘기했다. 그렇게 말하는 투가 마치 내가 나쁜 일을 해서 책망이라도 한다는 것처럼 단호하고 험악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죄를 지은 기분이 되어 꿇어앉았던 자세를 더욱 여미었다. 89~90p
낙선될 걸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 심사위원들이 멍청이들이어서 당선될 경우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여 당선소감까지, 아주 정직한 소감까지 써둔 것인데 한번 굉장히 정직해 볼 기회가 영 달아나버렸다. 정직해보고 싶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세상이다, 라는 생각도 퍽 흔한 생각이지만, 이젠 내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가짜인 줄 알면서 왜 소설 응모를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한다. 돈이 필요했다. 돈을 얻어들이는 일이나 자신에 대하여 가장 정직한 일이었다. 돈이 필요했다면 왜 하필 그런 수단을 썼느냐, 그러니까 말이다, 앞에서 나는 말하지 않았던가, 수단은 흔히 목적을 배반한다고. 딴은 괘씸하기 짝이 없는 명제다. 하여든 어제 나는 낙심천만하여 찬바람이 휩쓰는 거리를 헤매다가 내 방으로 돌아왔다. 151~1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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