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12일 (금) 12:40   프레시안

청소년 인권, 더 외면할 수 없는 사회의제

[프레시안 성현석/기자]  10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청소년 인권 찾기 선언'이라고 쓰인 종이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 중 한 명이 마이크를 잡았다.
  
  "시대가 계속 변해 왔지만, 학교는 여전히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자 가면을 쓰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앳된 기운이 섞였다. 이들은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다. 가면을 쓰고 마이크를 잡은 청소년들은 '바리캉'으로 상징되는 폭력적인 두발 규제, 교사의 지나친 체벌, 원하지 않아도 받아야하는 보충수업, 종교계 사립학교에서 강요하는 종교수업 등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이날 청소년들은 학교가 자신들을 고유한 개성을 가진 주체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호소했다. 청소년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있지만, 학교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개성이 없는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현재의 학교가 학생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상태로 인권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곳임을 알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 5월 10일 청소년들이 교육부 앞에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이날 행사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등의 청소년 단체와 인권운동사랑방, 문화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5.14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준비위원회'가 주최했다. 오는 14일에 예정된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교육부가 있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청소년들로 하여금 직접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인권침해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지난해 두발규제 반대 촛불집회 이후 1년
  
  지난해 5월 14일 학교의 강제적인 두발규제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촛불시위가 광화문에서 열렸다. 이같은 청소년들의 집단 움직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해 7월 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두발 자유는 학생의 기본권이므로 각 학교에서 '강제 이발'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두발 제한이나 단속은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이뤄지도록 대책을 마련하라"라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각 시도 교육청은 강제적인 두발 단속을 하지 않도록 하는 지침을 각급 학교에 보냈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책적인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일 년이 지났다. 청소년 인권을 고민하는 이들은 지난해 열린 촛불시위로부터 정확히 일 년이 되는 올해 5월 14일에 '청소년 인권행동의 날' 집회를 열기로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청소년 인권의 실태를 되돌아보는 한편, 청소년 인권에 대한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청소년들이 가면을 쓰고 이야기한 주제는 강제적인 두발 규정부터 체벌과 종교수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는 청소년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다양한 지를 잘 보여준다. 14일에 예정된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두발 규제의 철폐에만 초점을 맞췄던 지난해와 달리 학교 안팎에서 청소년들이 겪는 인권침해 전반에 대해 문제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지난해 7월 인권위가 내놓은 강제적인 두발 단속에 대한 권고안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 지적했다.
  
  "지난해 인권위의 권고안은 사실 절충안에 불과하다.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할지는 오직 청소년 개인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다.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의 단속을 허용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유윤종 씨의 말이다. 유 씨는 14일 행사에서 청소년들의 두발 기본권에 대해 보다 원칙적인 입장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문제제기 잇따라
  
  청소년 인권을 전면에 내건 이들의 움직임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최근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인권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움직임이 연이어 나타났다.
  
  지난 8일 아침 서울의 동성고등학교 앞에서 이 학교 3학년 오병헌 군이 '빼앗긴 인권을 돌려주십시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벌였다. 오 군은 이 학교 교사들이 제지할 때까지 시위를 진행하면서, 교사들의 과도한 체벌과 강제 보충수업 실시 등이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5월 8일 서울 동성고등학교 3학년 오병헌 학생이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며, 일인 시위를 진행했다. ⓒ프레시안

  "고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모금하는 성금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품었던 적이 있다. 학교 게시판을 통해 이에 대해 질문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학교 운영의 민주화와 학생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막상 학생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고 보니, 학교가 학생 인권의 불모지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뒤로는 학교의 수많은 반인권적 관행들이 견디기 힘들어졌다. 결국 누군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8일 저녁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오 군이 한 말이다.
  
  학교의 두발 규제에 대해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사례도 있다. 지난 4월 19일 서울 양동중학교에서 이 학교 3학년 학생 50여 명이 두발자유와 체벌금지를 요구하는 학내시위를 벌였다. 불과 십여 분만에 끝난 이날 시위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뻔 했지만,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 중 하나가 청소년인권단체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2004년 강의석 사건, 학생인권에 대한 관심 촉발의 계기
  
  2004년 서울 대광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의석 씨가 학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재학 중인 비기독교인 학생의 예배 선택권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강 씨는 종교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학교 역시 학생에게 이같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 인권 혹은 청소년 인권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제적되면서까지 굽히지 않은 강 씨의 주장을 법원이 인정하면서, 학생 인권은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강 씨는 그해 연말 한 시사주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8일 동성고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한 오병헌 군도 2년 전 강의석 씨가 진행한 투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강 씨의 영향을 받은 게 단지 오 군만은 아닐 것이다.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인에게 보장된 기본권을 유예해도 된다는 생각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올해 서울 구로고등학교를 졸업한 전누리 씨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점점 더 민감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동성고 앞에서의 일인 시위나, 4월 19일 양동중학교 학생들의 시위 등은 학생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태도에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다.
  
  지난해 '학생 두발 자유' 완전허용한 대만, 이제 한국은?
  
  그리고 이것은 한국만 겪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한국과 교육 환경이 유사한 대만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지난해 8월 31일 대만 정부는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완전한 두발 자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2000년 민진당 정부가 출범한 이후 대만에서는 과거 국민당 정부 시절의 권위주의적 관행에 대한 청산 작업이 진행돼 왔다. 그런데 이런 과거사 청산 움직임이 청소년들의 권리의식을 자극했다. 두발 자유화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집회가 연이어 벌어졌고, 결국 대만 정부는 청소년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민진당 정부 출범 이후의 대만 사회와 참여정부 출범 이후의 한국은 닮은 점이 많다. 대만과 한국 모두 권위주의가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사춘기를 보낸 청소년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조금씩 민감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월 7일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학생인권법을 발의하자 최 의원의 미니홈피에는 이에 호응하는 청소년들의 게시물이 쇄도했다. 최 의원이 발의한 학생인권법은 두발 규제를 비롯한 각종 학생 생활 규정상의 인권침해 요소 철폐, 과도한 체벌 금지, 학생에 대한 각종 차별 금지,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보장, 강제로 실시하는 보충수업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같은 내용에 대한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호응에서 청소년 인권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돼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오는 14일에 예정된 '청소년 인권 행동의 날' 집회에서 청소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성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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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5-15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인권법은 두발 규제를 비롯한 각종 학생 생활 규정상의 인권침해 요소 철폐,
과도한 체벌 금지,
학생에 대한 각종 차별 금지,
학생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 보장,
강제로 실시하는 보충수업 금지...
학생은 인간이 아니지. 이런 것도 못 누리는 게 인간일까?

해콩 2006-05-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 빠진 것 있네요. '야간 자율 학습' 진짜로 자율적으로 실시!ㅋㅋ
인간 아닌 아이들, 인간 만드는 게 우리들의 '일' 맞지요?
그런데 실은...인간 되지 마라, 아직은 인간 될 생각하지 마라. 대학 가면 저절로 인간된다... 하고 있으니.. 슬/퍼/요...

글샘 2006-05-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알거든요. 공부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닌줄... 공부 그렇게 못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걸... 괜스레 스승의 날이랍시고 찾아온 애들에게 열변을 토했더랬죠.ㅋ

해콩 2006-05-31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 동성고 1인 시위 학생 지원
지난 5월 8일 사랑방과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3학년 오병헌 학생이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학생은 0교시 강제보충 폐지, 체벌 금지, 두발규정 폐지 등을 요구하였는데요,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동성고등학교에서는 느리지만 많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일단 0교시 수업은 9교시로 옮겨졌고, 6:55이었던 새벽별 등교시간도 1시간 정도 늦춰졌습니다. 체벌을 일삼았던 담임교사는 교체되었고, 두발규정과 관련해서는 학생 설문조사 등을 거쳐 개정 절차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오병헌 학생은 시위 전 사랑방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는데, 사랑방 교육실에서는 학교와 교육청에 대응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이 학생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동성고등학교의 사례가 다른 학교의 변화에도 자극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 인권운동사랑방 정기 소식메일 [사람사랑] 2006년 5월 1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