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수잔 베가는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이 지상에서 누군가의 팔에 안겨 누워 있다면 당신은 그의 역사를 삼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금 한 남자가 그녀의 곁에 있다. 그녀는 마흔여덟 살. 그는 서른다섯 살. 그녀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보다 미래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2년에 소비에트가 해체되겠지만, 현재의 그, S는 스탈린에게 훈장을 받은 아버지를 둔 파리 주재 소련 외교관이고, 그녀는  미테랑이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미온적 좌익 성향의 작가다. 러시아에서 만난 두 사람은 파리에 돌아와서도 나이와 국적과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탐닉한다.

열정과 맹목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탐닉은 행복이지만, 살 만큼 살고 볼 만큼 보아온 마흔여덟 살 여성 작가에게 그것은 지옥이 된다. S와 만나는 일년 반 동안 일기 외의 다른 어떤 글도 쓰지 못하게 되고, 자기 감정이 아닌 모든 외부의 것에 문을 닫아 건 생활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불행히도 “뜨여 있다.” 비싼 차에 대한 선호, 속물근성 드러나는 옷차림과 섹스를 할 때 보이는 ‘약간 작고 잔인해 보이는 치아’에서 그녀는 불행의 전조를 읽는다. 출세 지향적 삶을 살아온 그의 과거, 그녀를 “섹스 잘하는 정부”로 여기는 그의 현재, 그리고 그녀에게 지옥 같은 이별의 고통을 안겨주게 될 그의 미래가, 그 역사가 그녀의 눈앞에 훤히 보인다.

때로 울컥하는 마음에 그녀는 남의 물건을 탐하는 S의 ‘기둥서방 근성’을 비꼬기도 하고, 자기보다 예쁘지 않은 그의 아내와 존재 여부조차 분명치 않은 그의 많은 여자들에 대한 샛노란 질투로 밤을 지새고, 비싼 선물을 해준 뒤에 물질 대 감정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너그러운 어머니와 온갖 창의적인 체위를 구사하는 창녀를 동시에 연기하여 그를 기쁘게 하고는 “나는 언제나 모든 역할을 다 맡는 걸 좋아했다.”고 자기 경멸에 빠진다. 그럼에도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다. 먼저 우아하게 이별을 고할 시기도 이미 놓쳤다. 남은 일은 아무런 미래도 교감도 없는 관계 속에서 ‘나의 모든 공허함을 다해’ 그를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모멸과 불안과 절망과 환희와 기쁨에 대해. 일기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이성과 부질없는 희망과 연장되는 이별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과 탄식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작가라는 것, 아무리 두려워도 진실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아무리 아뜩하게 사랑하고 몸에 와 닿던 손길에 목말라도 모든 희망이 상상의 산물이며 S와 자신은 광년(光年)을 사이에 둔 먼 존재, 단지 육체의 이야기일 뿐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육체와 욕망, 고통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은 그녀 외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엄연한 사실!

그리하여 S가 전화 한 통 없이, 전언 하나 없이 러시아로 돌아간 후에도 그녀는 살아 남는다. “다시 돌아올거야.” “나는 늙어빠졌을거야.” “내게 당신은 결코 늙지 않는 사람이야.” “늙지 않도록 노력할게.” 하지만 그녀는 나이를 먹는다.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 것, 그가 있었을 때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상상 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녀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뜬다. 그럼에도 이 행복에 아무런 동기, 아무런 사랑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약간 슬프게 한다. 그래서 그녀,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과 『탐닉』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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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0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순한 열정을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이 책도 읽어봐야 겠네요~
리뷰 감사합니다~
퍼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