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연함, 유연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애매함은 정치인의 미덕일 수는 있어도 '지식인'의 미덕이 될 순 없다. 정치인이 현실적 상황에 맞춰 적당한 정도의 유연성을 발휘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그 반대로 말하면서 생기는 모순과 애매함은 정치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란 타협의 기술이니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에게 부여되는 권력은 내 의견을 다른 의견과 ‘타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의 애매함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에게 애매함이란 미덕이 될 수 없다. 그가 지식인이라면 일상에서의 다른 경우에서라면 몰라도, 대문자 '비판'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지식인이 비판을 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 유연한, 혹은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 니체에게 붙은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은 그가 비판의 명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니체에게 도대체 어떤 애매함이 있는가. 알만한 사람은 다 알테지만, 데리다의 해체 일반 전략도 비판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번역상 야기되는 문제가 있을지언정) 데리다의 비판은 결코 난해하지 않고, 애매함과도 거리가 멀다. 데리다의 해체전략은 명료하다. 어쩌면 지식인들에게서 가끔 보이는 ‘전회’를 들어 발전하는 지식인이라면 유연성을 가졌다는 말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사유 자체가 유도하는 자기 전개로 인해 발생하는 사유의 전회는 있을지언정 '현실적' 이유로, '정략적' 이유로, 정치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유연성을 갖게 되는 경우는 없다. 후기 하이데거의 전회는 사유의 도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발생적 현상학으로의 전회는 후설 자신에게는 발전이었고 사유 자체의 전회가 아니었다.

2. 지식인은 현실을 옹호하거나, 현실 자체의 불가피한 한계 때문에, 부당한 현실 자체를 당위로 삼는 사람이 아니다. 이청준은 <지배와 해방>(1977)이라는 작품에서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 에 대한 물음에 이정훈이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조금 긴 인용이다.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소설로써 고발하는 것, 의롭지 못한 일을 증언하는 것, 우리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해 오거나 병들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비인간적인 제도와 억압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것들을 이겨나갈 용기를 모색하는 것,소위 새로운 영혼의 영토를 획득해 나가고 획득된 영토를 수호해 나가려는 데 기여하는 모든 문학적 노력이 종국에는 다 우리의 삶을 보다 더 윤택하고 행복스럽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삶의 진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가장 깊고 큰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가장 삶다운 삶으로 돌아가 살게 하는 옳은 질서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의 어떤 평론가 한 사람은 우리의 삶을 삶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비인간적인 풍습과제도와 문물과 사고를 통틀어 우리 삶을 ‘억압’하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 삶이 그 억누름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삶, 본래의 자유롭고 화창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질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의 질서입니다. 이 자유의 질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크고 깊은 삶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의롭지 못한 현실을 불가피한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정치인의 역할이다. 지식인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만큼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의 역할은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진리와 현실적 부당성을 적절히 타협해내는 정치인의 유연함과 애매함을 버리고 진리를 거울삼아 현실이라는 무게가 만들어내는 거짓된 당위를 철저히 비판하기로 한 자다. 그러니까, “당신이 현실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라는 말 다음에 “그건 결론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런 듣기 좋은 말, 힐링을 위한 말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말일 수는 있어도 지식인의 말이 아니다. 지식인은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을 꺼내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이 전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지요”라고 말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 오래된 진리에 매달리는 사람은 보통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인기가 없고 외롭지만 지식인이 옳음, 진리, 진실, 자유의 자리에 서서, 손해를 보고 고립을 자초한다고 해도 권력에 대해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좁은 전공분야에 자리한 전문가일 뿐이다.


3. 위안부 합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이런 긴 이야기를 썼다. 현실적으로 일본정부에게 법적 책임을 지게 하기는 힘들다, 현실적으로 이번 합의를 뒤집기는 힘들다, 현실적으로 일본 국민들의 정서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정치인이라면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늘 그런 ‘현실적으로’라는 식의 클리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지식인이 아니다. 운동을 해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또 현실적인 이유로 이 문제가 안고 있는 물러설 수 없는 ‘진실’까지 양보했다면 그건 정치일 수는 있어도 결코 ‘비판’이 될 수는 없다.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2017)에서 서경식이 와다 하루키를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박유하는 와다 하루키에 대한 서경식의 옳지 않은 일을 두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시종일관 말하는 것을 두고 사고의 경직이라고, 운동 논리라고 한다. 이런 폄훼하는 식의 이야기는 정치인이라면 지식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지식인이 지식인에게 할 수 있는 비판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다. 지식인이 지식인에게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지식인이 받아들이는 옳음, 진리의 결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어야지 그 사고의 '시종일관'을 향한 것이어선 안된다. 지식인은 완고하다.



4. 박유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경식 책의 출간 보도에 맞춰 이렇게 쓴다.

 “냉전붕괴이후 일본의 진보좌파들은, 곧바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40년전 학생운동시절의 급진/온건파의 싸움이 있다. 90년대 이후에도, 급진파는 오래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해 왔고, 온건파는 눈앞에 놓인 새로운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필요하면 그때까지의 생각을 수정했다. 와다 선생이나 우에노 선생과 서경식 교수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고, 그런 식의 태도의 차이를 만든 건 내가 보기엔 사고의 유연성이다.” 

덧붙여 이런 말도 썼다.

 “와다 교수의 선택이 가장 옳았는지 여부는 얼마든지 검토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와다 교수는 늘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위안부할머니와 모두를 위한 최선이 뭔지 늘 고민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와다 교수를 비난했던 이들은 이질적인 의견에는 귀를 닫았고,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지금의 북한처럼. ” (강조는 인용자)


학생운동에서라면 온건파와 급진파로 얼마든지 나뉘어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도외시하는 급진파 운동권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그리고 그런 식의 태도 때문에 언제나 온건파가 현실정치에 더 잘 적응했고, 더 쉽게 뿌리내렸다. 나는 와다 하루키나 우에노 치즈코를 지식인이 아니라 운동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로만 분류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정치인’과 같은 전략을 갖는 것을 얼마든지 칭찬할 수 있다고도 본다. 그런데 와다 하루키는 '지식인' 중의 '지식인'으로 존경 받는 학자가 아닌가. 지식인 와다는 비판해야 할 것에 대해 현실을 등지고 진리에 입각해 비판하고 있는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도대체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에 있는 리버럴 지식인들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왜 고민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모두'는 누구인가? 거기에는 일본정부도 포함된 것인가? 와다는 위안부할머니와 일본정부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늘 고민해왔던 것인가? 와다와 박유하는 이 문제 해결의 최선은 위안부할머니들의 시종일관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인가? 그것이 피해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불가역적 합의 혹은 그저 돈이었던 것인가? 위안부할머니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준 자가 자신의 소송이 서경식, 정영환과 같은 이들이 구조적 폭력을 용인하는 사실 때문이라고 믿는 것을 ‘지적 퇴락’이라는 말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자신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제거욕망”으로 박유하는 생각한다고 썼는데, 여기에서 5공 시절 안기부가 즐겨 쓰던 방식의 지식인 죽이기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기묘한 도치, 해괴한 이어붙이기의 방식은 정치인의 것이라기보다 공안의 방식이 아니던가. 내가 가져온 인용구의 마지막 문구,
'지금의 북한처럼'이라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말은 왜 붙여둔 것일까? 이런 식의 배치를 통해 어떤 의미 효과를 기대했던 것일까? 재일'교포'라는 말과 '북한'을 나란히 위치시켜, 보통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기묘하게 오해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그런 악마적인 방식으로 이어붙이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 공안은 우리 상상보다 언제나 더 지나쳤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5. 오에 겐자부로는 “‘자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일본인을 ‘애매한’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고, 그러한 고립상황에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이 행해졌다”고 썼다. 이런 말을 오에가 쓴 것을 보니 박유하는 오에에게도 퍽 사고가 유연하지 않다고 할 것 같다. 오에에게도 '지적퇴락'이라고 박유하는 쓸 것인가? 자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자신의 소송 외에는 어떤 폭력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사고가 '유연하신' 존재인지라 '당신은 애매한 존재'라고 밖에 돌려줄 말이 없다.


 "단언컨대, 이들은 서경식교수 정도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루어져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말도 박유하가 같은 글에서 한 말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박유하의 언설과 달리 서경식은 공개서한에서 와다를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서경식이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을 비판할 때도 결코 가볍게 다룬 적이 없다. 그건 박유하가 재일조선인 지식인의 습관이라고 했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확인 없이 옮겨 쓰는 P 본인의 오래된 습관'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왜 비판은 사랑과 존경으로 하는 것임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지식인이 공화국에 대한 존경이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 국가와 정부를 비판하겠는가? 와다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비판이 있겠는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법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박유하에 대해서 대꾸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그녀에 대한 일말의 존경은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식인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당위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현실을 당위로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대문자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성한 공간은 없다. 일본 리버럴을 비판했다고 가볍게 다뤘다고 한다면, 일본 리버럴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는가. 하는 말마다 실수를 하는데, 그녀의 기사단은 그녀 역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어서 비판하면 몰아세우기 바쁜가보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을 두고 비판을 결의하기까지의 고뇌의 무게와 용기를 생각하기 전에 그 누군가를 ‘가볍게 대한다’고 생각했다면 비판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거나, 정치인이 경박스럽게 다른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본 적이 없다는 증거다. 참으로 공안적 지식인다운 경박한 왜곡이라고 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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