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12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재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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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참 신기한 작가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나는 그가 위대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딱히 그의 작품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의 수다스러운, 끊임없이 지껄이는 서술 방법은 때때로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점은 시간이 좀 지나면- 즉 그의 작품을 읽은 지가 좀 되면- 그 미친 듯한 지껄임, 수다가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언젠가는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을 것 같다. 늘 느끼는 점이지만, 읽고 나면 정말 아, 이런 미치광이 같은 작자를 봤나, 아, 이런 도스토예프스키! 하고는 감탄해마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마치 내가 체호프 작품을 사랑하듯이 아끼지는 않지만 그의 재능, 그의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다.

이번에 읽은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또한 그랬다. 이 작품은 사실 잘 몰랐다면 아주 나중에 읽었을 법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크게 알려진 것은 아니고, 더욱이 미완성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함께 사두었던 <악령>이나 <백치>보다도 먼저 읽게 된 이유는 순전히 알라딘 이웃의 책 소개 때문이었다. 요즘 나는 그분 블로그에서 좋은 책을 많이 소개받는다. 엄청나게 책을 읽는(그것도 내 취향 세계문학) 분이라서 요즘 책을 선택할 때 그분 포스팅을 많이 참고한다. 암튼 그분이 소개하기를,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을 1인칭 화자로 삼았다는 점, 그리고 미완성이라는 점 등등. 나는 여기에 솔깃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인칭 소녀 시점으로 빙의하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무척 궁금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처럼 도스토예프스키도 여학생, 소녀에 완전히 빙의할 수 있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고도 나는 이미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수다, 그의 지껄임,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미치광이 같은 이들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예민함, 신경증에 시달리는 듯한 이 나약하고 가련한 병적인 인물들. 아, 역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들어왔구나 단박에 알 수 있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일들의 나열일 뿐인데 다음 장이 너무나도 궁금해지는 이 흥미진진함! 그러다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쳤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 웃어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인간, 천재야 정말. 소녀 빙의 제대로 하네!

책을 덮을 즈음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매우 궁금해서, 이 작품을 그냥 이대로 미완성으로 끝내버린 도스토예프스키를 저주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다음 편이 몹시 궁금한데 더 이상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 웹툰에 악플을 달고 싶은 심정이랄까. 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의 다음 이야기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해서, 뒤늦게라도 발견되어 세상에 짠! 나타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라보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크게 3부로 나뉜다. 첫 번째 이야기는 화자인 나, 즉 '네또츠까'가 부모와 함께 살던 시절 이야기로, 그녀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사실 이 첫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네또츠까의 계부인 음악가 ‘예피모프’라고 볼 수 있다. 이 인물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인물들이 거의 그러하듯이 어딘가 비뚤어졌고 일그러졌다. 재능은 좀 있는 음악가이지만 자기 재능을 지나치게 믿는지 오만방자하고 턱없이 게으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재능을 의심한다 싶으면 자존심이 뒤틀려 어쩔 줄을 몰라한다. 네또츠까의 엄마와 결혼하게 된 이유도 그녀가 갖고 있던 얼마간의 돈을 노렸기 때문이었고, 그 돈을 탕진하자 그는 아내를 구박하고 못살게 군다. 자기 재능을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도 아내 탓이며, 아내와 함께 하는 구질구질한 삶이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고 있다고 모든 것을 아내 탓으로 돌린다. 네또츠까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며 때로는 단순한 관찰자로, 때로는 그 자신도 그런 분위기 속의 피해자로, 또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함께 지낸다. 그러면서 서서히 계부를 향한 사랑이 싹트는데 이 애정은 어딘가 병적이다. 금세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아이처럼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2부에서는 드디어 네또츠까가 주인공으로서 전면으로 등장한다. 어느 공작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 그녀는 이번에는 공작의 딸 '까쨔'와 기이한 애정을 나누게 된다. 수줍음 많고 조용하며 어딘가 억압된 듯한(그럴 수밖에 없는) 네또츠까에 비해 까쨔는 도도함과 오만함, 철없는 아름다움으로 똘똘 무장한 소녀이다. 네또츠까는 이 작은 악마 같은 까쟈를 보는 순간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무장해제 되어버리고 까쨔의 포로와도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까쨔는 그런 네또츠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완전히 ‘밀당’의 선수가 아닌가!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애달픔, 그것을 즐기듯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하는 또 다른 한 소녀. 2부에서는 이 두 소녀에 완전히 빙의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 사춘기 소녀들의 불안한 심리와 격정 어린 애정 또는 우정이 무척 실감 나게 그려진다. 그런데 2부에서도 네또츠까의 애정은 어딘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기묘하다.

그 기이한 애정은 3부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옮아간다. 까쨔의 언니이자, 공작 부인의 큰 딸인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공작 부인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까쨔와는 아버지가 다른 셈이다. 또한 까쨔와는 정반대 성격으로 조용하고 세심하며 온화하다. 네또츠까는 알렉산드라의 보호 아래 8년을 지내면서 10대 후반의 나이에 이르도록 성장한다. 알렉산드라와의 관계도 조금은 병적이지만 그럼에도 까쨔와의 관계처럼 광적이지는 않다. 알렉산드라의 따뜻한 애정 아래 엄마로부터 채우지 못한 애정을 섭취하듯 네또츠까는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해간다. 그런데 이 3부의 큰 사건은 알렉산드라의 비밀을 네또츠까가 우연히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1849년에 나온 판본에는 1, 2, 3부에 저마다 <유년 시절>, <새로운 인생>, <비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고 하니, 3부에서 그 ‘비밀’은 매우 중요한 소재임이 틀림없다. 실제로 네또츠까가 이 비밀을 알고부터 그녀의 병적인 증상은 한층 심화된다. 이 ‘비밀’이 조금씩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끝난다. 때문에 그 다음이 몹시 궁금하지만, 궁금증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살리지 않는 한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모든 인물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으뜸인 인물은 네또츠까와 그녀의 계부 예피모프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재능을 망쳐버릴 만큼 병적이고 예민하다. 특히 우울하고 조용한 소녀로만 보이는 네또츠까가 어느 상대에게 애정이 꽂혀버리면 그 열정에는 누구라도 뜨겁게 데여서 다쳐버릴 것만 같다. 그럴 정도로 위태해 보인다. 이 소녀는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되어버린 것일까? 책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네또츠까의 인생을 돌아보면 ‘결핍’과 ‘공허’가 주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도 없이, 엄마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예피모프를 만난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 그의 인정을 받는 순간 네또츠까는 새로운 애정에 눈을 뜨고 거의 집착적으로 그 사랑에 매달린다. 이 과정은 2부와 3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진 상태에서(결핍) 까쨔를 만나고, 그 새로운 애정의 대상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그런 까쨔가 사라진 상태(또 다시 결핍)에서 이번에는 또 다른 애정의 대상 알렉산드라를 만나는 것이다. 공허함이 그 불쌍한 소녀를 그토록 광기어린 열정의 상태로 몰아간 것은 아닐까? 네또츠까가 이런 결핌과 채움의 반복 과정에서 어떻게 자라났을지 끝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쉽지만, 도스예프스키는 인간에게 결핍이나 열등감 또는 자기기만이 어떤 광적인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탁월하게 그려나간다. 그렇기에 미완성일지라도 이 작품은 이 자체로도 대단하다. 그리고 네또츠까는 문학 작품 속 어떤 여성 인물보다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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