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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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돈에 사로잡힌 돈돌이 계급’이었다. 돈돌이 사내와 돈돌이 계집. 차이가 있다면 오직,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와 돈을 얼마나 많이 바라느냐일 뿐이다. (1권 231쪽)

“어쨌든 그렇게 많이들 지껄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2권 315쪽)


위의 구절이 어떤 작품에서 나왔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글쎄…. 이 구절들을 보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굉장히 정치적인, 계급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작품을 떠올리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위 문장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나온다. 게다가 로렌스의 이 작품에는 이와 비슷한 구절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내게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구절만으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얼마나 왜곡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 깨달을 수 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에게서 성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하인이자 자신의 하인이기도 한 사냥터지기와 바람나 성(性)에 눈을 뜨는 한 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그런 부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자가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뜨면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돈밖에 모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물질 위주의 산업화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이 작품은 현대의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비판서로 읽히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돈을 그토록 많이 필요로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돈벌이에 급급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섹스는 뒷전이고 ‘경제’활동에 올인하는 섹스리스 부부. 코니와 그의 남편인 클리퍼드는 무늬만 부부인채로 살아가는 현대의 수많은 섹스리스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경제가 우선인 결혼제도에 얽혀 결혼생활을 유지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 식은 애정을 붙들고 결혼을 유지하고, 그러기에 불륜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사람들. 로렌스가 말한 ‘돈돌이 사내’와 ‘돈돌이 계집’의 허위에 찬 ‘결혼생활’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코니와 클리퍼드가 살던 그 시절보다 더 심하다.

이 작품은 코니의 남편 클리퍼드와 코니의 연인 멜러즈를 통해 두 세계를 끊임없이 대비해 보여준다. 클리퍼드로 상징되는 정신적, 물질적인 삶과 멜러즈로 상징되는 육체적, 인간적인 삶의 이분법적인 대비. 물질사회,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에 스스로 저항해 숲속에서 은둔자의 삶을 사는 사냥터지기 멜러즈와 이런 멜러즈를 사랑하게 되는 코니의 모습은 로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삶을 의미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애정을 나누는 삶이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고. 이런 작가의 생각이 멜러즈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고, 종종 지나치리만큼 이분법적인 도식과 명확한 주제의식이 오히려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외설’에 초점이 맞춰졌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어 진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물론 나 또한 그런 인식의 틀에 갇혀 그저 야한, 페미니즘 소설로만 알고 있었다면 무척 억울했을 뻔한 작품이다. 늦게라도 로렌스의 작품을 제대로 알게 되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작가의 지나친 계도의식(?)이 들어있어 로렌스의 다른 작품에 비해 작품성은 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추측하면서 <무지개> 같은 다른 작품도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길게 읽기 싫은 사람을 위한 한 줄 메모 : "이 소설은 외설이 아니었다!! 사회경제 비판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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