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를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이 든 사람들이(물론 비단 나이 든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혼자 있는 젊은 사람을 보면 꼭 누군가와 짝을 지어주지 못해 안달이 나는 상황, ‘짝짓기’를 그들 인생의 가장 큰 취미생활로 삼는 일은 결국 그들이 젊음을 시기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솔로’로 추정되는 남과 여가 있다, 그런 이들이 나이든 사람 눈에 포착되면 그들은 이 젊은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줄 생각에 들뜬다. 짝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을 진정한 ‘어른’의 세계, 곧 추하게 늙어갈 그 세계로 편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짝을 만나지 못한 젊은이들은 아직 ‘미성숙한’ ‘덩치만 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그 젊음이 못내 부럽기도 하다. 시기심도 든다. 게다가 그렇게 둘을 짝지어 주면서 그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갖고 놀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한 사람의 운명과 또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경험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진짜 ‘성인’이 되어 이제 추하게 늙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그들은 심하게 무료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 이 무료함을 극복하고자 그들은 짝짓기 로맨스 드라마의 연출가 겸 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다!

<포르노그라피아>에 바로 그런 인물들이 나온다. ‘프레데릭’과 ‘나’(비톨트 곰브로비치)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지배하에 놓인 폴란드의 두 지식인이다. ‘나’는 어느 날 친구의 초대를 받아 프레데릭과 함께 한 시골 마을을 찾는다. 친구에게는 열여섯 살이 된 딸 ‘헤니아’가 있다. 헤니아 주변에는 그녀의 소꿉친구인 ‘카롤’이 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황량한 시골, 할 일 없이 마을 산책이나 하던 이 두 남자에게 헤니아와 카롤의 발견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들은 젊고, 싱그럽고, 아직 그들처럼 늙어, 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적으로 묘한 기운까지 뿜어져 나오는 십대 후반의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라니! 이 무료한 두 남자의 머릿속에는 슬금슬금 기묘한 상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두 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른이라 할 수도 없는)를 상대로 그들만의 ‘포르노그라피아’가 시작된다.

그저 소꿉동무일 뿐이라는 덤덤한 두 아이를 상대로 ‘너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너희들이 서로 짝일 것’이라는 등의 암시를 주고, 이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뱉는다. ‘헤니아’에게는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다. 그러나 이 두 남자에게 ‘알베르트’는 ‘헤니아’의 짝이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알베르트 역시 이 두 남자들처럼 이미 늙어가고 있는, 성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싱그러운 젊음에게는 그에 걸맞은 젊음이 제격이다. 그래야 그들의 ‘포르노그라피아’가 완성된다. 이 짓궂은 두 남자들은 그래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꾸미게 된다. 헤니아와 카롤 사이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는 듯 ‘연출’을 하게 되고 이를 알베르트가 교묘하게 알게 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헤니아-카롤-알베르트의 관계는 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파멸과 타락으로. 이런 그들을 보며 만족의 웃음을 짓는 징그러운 두 남자. 이런 두 남자의 심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그 무엇, 어른들은 짐작할 수 없는 그것……. 그건 아마도 일종의 절제, 어떤 도덕심, 두 사람이 지키고자 하는 어떤 법칙, 금지였다. 그러므로 프레데릭의 생각은 분명 옳았다. 두 사람은 알베르트를 함께 짓밟고 그의 몸 위에서 뒹굴면서부터 이런 모든 구속들을 거침없이 벗어던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알베르트에게 보여주고자 연인이 되는 순간…….그들은 진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들에게 색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이 죄악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죄악에 몸을 담그게 되면, 그때는 기대할 수 있다. 우리와 그들이 뒤섞이게 되리라고. 그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나는 이해했다. 또한 이 죄악으로 인해 그들이 추악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들의 젊음, 그 싱싱함은, 비록 죄의 빛깔을 띠게 될 지라도, 우리의 시든 손에 이끌려 타락으로 인도될지라도, 그리하여 우리와 뒤섞여 혼탁해질지라도, 그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풍요하고 충만해지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렴! 나는 알고 있었다! 온순하게 말 잘 듣는, 그저 귀엽기 만한 젊음 따위가 무슨 재미가 있는가! 중요한 건 그런 젊음을 재료로 또 다른 젊음, 우리 어른들과 비극적으로 얽힌 젊음을 제조해 내는 일이었다.'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187쪽)


'우리의 난잡함, 추잡함에 있어서는 개도, 말도 이만큼 따라올 수 없었다. 아! 아! 서른이 넘으면 인간들은 흉하게 시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들, 젊은이들로부터 나온다.'(같은 책, 278쪽) 이렇게 소설 속의 ‘나’(비톨트 곰브로비치)는 프레데릭과 함께 성숙함, 늙음, 성인이 되어버린 것을 추하게 여기며, 젊음을 부러워하고 시기한다. 그러나 다시 소유할 수 없는 그 젊음이기에 어차피 갖지 못할 것이라면, 망쳐버리자는, 똑같이 타락의 세계로 끌어들이자는, 생각을 품고 그리하여 그들이 빨리 ‘성숙’ 혹은 ‘늙어’버리기를 욕망한다.

물론 이 작품에서 헤니아와 카롤 역시 그저 순수한 젊음으로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그들 또한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고 싶어 하고, 자신들을 향한 이 두 남자의 관심을 은근히 즐긴다. 어쩌면 그렇기에 프레데릭과 곰브로비치가 원하는 방향대로 ‘연극’이 흘러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포르노그라피아> 속 프레데릭과 곰브로비치의 망령은 현실 세계에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현실의 프레데릭과 곰브로비치는 그들처럼 그렇게 추하게 늙어가고, 똑같이 추한 늙음의 세계로 미성숙한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짝짓기’라는 형태로 계속 계속……. 이런 추한 욕망 자체가 바로 ‘포르노그라피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