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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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음이 꽃필 무렵 고약한 마음의 병에 걸렸던 나는 그 삼 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상처 입은 것이 나 혼자뿐이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 쓰련다. (<세기아의 고백>, 9쪽)


뮈세의 <세기아의 고백>은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린다. 재능 넘치는 시인이자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단 하나의 소설 <세기아의 고백>에서 열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광기 어린 사랑을 시적 언어로 절절히 고백한다. 뮈세의 소설을 ‘고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작품은 뮈세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서두에서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기아의 고백>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뮈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더욱이 그 절절한 애정의 대상은 조르주 상드임을.

<세기아의 고백>은 알프레드 뮈세와 조르주 상드, 이탈리아인 의사 파젤로와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4대 시인으로 꼽히는 뮈세는 십대 시절부터 당대 최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천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열렬한 사랑을 꿈꾸던 그는 1833년 여름, 만찬 자리에서 상드를 처음 만난다. 뮈세는 스물세 살이 되기 전이었고, 서른의 상드는 이혼 뒤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함께 베네치아로 떠난다. 그러나 기대로 가득했던 여행에서 뮈세와 상드는 번갈아 병석에 눕게 된다. 먼저 상드가 몸져누워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파젤로의 간호를 받는다. 상드가 회복한 뒤에는 뮈세가 병이 나고 그사이 상드는 파젤로의 연인이 되고 만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홀로 귀국해, 거의 4개월 동안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화해하려는 노력에도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뮈세는 <세기아의 고백>으로 이 사랑의 내막을 폭로했고, 상드는 <그 여자와 그 남자>라는 책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렇다고 <세기아의 고백>이 뮈세와 상드의 사랑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르주 상드를 모델로 한 ‘브리지트 피에르송’은 상드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에서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사회 변동은, 붕괴하는 구세대에게는 환멸과 비애감을, 앞날을 모색하는 신세대에게는 불안과 초조감을 드리웠다. 이 무렵 청년들을 괴롭힌 우울증과 염세적 고독감을 뮈세는 이른바 세기병(世紀病)이라 말한다. <세기아의 고백>의 주인공 옥타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즉 ‘세기아’이다. 이제 막 꽃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인 그는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연인 사이가 아닌가! 믿었던 애인이 배신,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심지어 애인이 또 있다! 심하게 마음을 다친 옥타브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타락한다.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기에, 단 한순간도 그녀의 배신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배신은 더없이 치명적이다. 더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는 차라리 인간 사회를 믿지 않고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내 연인과 흡사한, 악과 위선의 소굴’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실연에 빠져 상심한 채 사회와 담쌓고 지내는 옥타브를 보다 못한 데주네는 선배로서 그에게 온갖 사랑의 충고를 한다. 그가 보기에 옥타브는 소설가들과 시인들이 그려낸 사랑, 이 세상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 같다. 그런 옥타브에게 데주네는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을 믿더라도 실제로 이루려고는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절도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듯 사랑을 마시게, 주정뱅이가 되지는 말게. 연인이 진실하고 충실하다면 그 이유로 사랑하게. 충실하진 않지만 젊고 아름답다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게. 상냥하고 재기발랄하다면, 더 사랑하게. 만일 그녀가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지만 오직 자네만 사랑한다면, 그녀를 더 사랑하게. 사람이 밤마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네. (<세기아의 고백>, 56쪽)


옥타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파리 근교 시골에 머물던 옥타브는 그곳에서 바로 운명의 여인, ‘브리지트 피에르송’을 만난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일찍 남편을 잃은 여인, 고결한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의 칭송받는 순수함의 결정체인 브리지트, 그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사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옥타브와 브리지트로 변형되어 뮈세와 상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했던 상드와 달리 브리지트는 더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뮈세가 상드에게 바랐던 여인상일까? 어쨌든 옥타브는 그녀와 단둘이서 걷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외친다. “신을 찬양하라! 너는 아직 젊고,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

그러나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그 진행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첫 번째 사랑에서 실패한 옥타브이기에, 그 사랑의 그림자가 쉽사리 걷어지지 않는다. 의심과 질투, 불안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다. 첫사랑 연인을 완벽하게 믿었으나 그 신뢰가 깨져버리자 두 번째 사랑에서는 연인을 100% 믿는다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녀를 믿다가도, 때때로 질투와 의심이라는 망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든다. 심지어 이 어리석은 남자는 브리지트가 자기에게 몸을 허락한 사실을 갖고도 자신을 괴롭힌다. 의심에 빠진 모든 사람들처럼 그 또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고는 사실과 다투고, 의미 없는 말에 집착’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지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수록 정말 이 여자가 그토록 순수하고 칭송받아 마땅한 여인일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물론 철저히 옥타브 관점에서 그려졌으므로 <세기아의 고백>에서 묘사된 브리지트의 모습을 100% 믿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끝부분에 이르러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는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브리지트의 말처럼 ‘사랑은 행복이거나 고통’이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의심과 질투와 망상으로 깨져버린 이 사랑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는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그들, 아니 옥타브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신뢰로써 사랑하는’ 그 행복을. 브리지트의 예언처럼 이 어리석은 청년은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완벽하게 믿고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사랑만’이 그에게 남겨지리라. 그런데, 이 모습은 오늘날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모습과 닮았다. 100% 완벽하게 연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데주네의 충고처럼 ‘완벽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기아의 고백>은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며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또 어떠한지.


사는 것, 그렇다. 존재하고,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임을 강하게, 깊이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첫 번째 혜택, 가장 커다란 혜택이다.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어떤 사슬로, 어떤 불행으로, 그리고 나는 세상이 어떤 혐오감으로까지 사랑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할 것인데, 사랑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편견의 산 아래 푹 파묻혀 있어, 사람들이 모든 추악함 너머로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사랑, 강인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하늘에 태양을 매달아 놓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하늘의 법칙이다. (<세기아의 고백>,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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