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사울 레이터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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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 한 장은 때로 기나긴 문장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그렇다. 몇 마디 말보다도 어떤 시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면서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몽글몽글 물기를 맺혀준다. 사울 레이터를 잘 몰랐음에도 단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이 끌려 그의 사진집까지 구매하게 되었다. 책 표지를 장식한 사진. 눈 내린 길, 빨간 우산을 들고 걷는 한 사람의 이미지. 그 사진에 홀려 책 정보를 살펴본다. 몇 장의 사진이 더 눈에 들어온다. 아, 이 책을 갖고 싶다. 

어느 날 들른 서점에서도 검은 코트 차림에 빨간 우산을 든 이 여인의 사진 한 장은 줄곧 내 눈을 사로잡는다. 책을 펼쳐들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아, 이 책을 사서 두고두고 보고 싶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는데, 그의 사진과 함께 비는 촉촉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흰색과 검은색, 빨강의 단순한 조화. 눈 위에 찍힌 발자국. 무엇이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을까. 

오래전 나는, 사진작가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보통 그들은 ‘빨강’이 있을 때 사진이 한결 좋아진다고 믿었다. 실제로 찍은 결과물을 보면 그랬다. 빨강은 사진을 살려주는 마법과도 같은 색이었다. 사진작가들에게 ‘빨강’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레이터의 빨간 우산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의심했었다. 어쩌면 그 또한 ‘빨강’이 사진을 살려준다는 사실을 아는, 그래서 어쩌면 그런 흔한 기교로 사람들의 눈을 홀린 건 아닐까. 

그런데 그 비오는 날, 레이터 사진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사진에는 ‘빨강’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 그날 이후,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을 머리맡에 두고 주로 잠들기 전에 몇 페이지씩 넘겨본다. 사진만 쭉 훑어보고 나서는 곳곳에 적혀 있는 그가 남긴 말들을 읽어본다. 그래, 그래서 이런 사진이 나왔구나. 나는 이 한 권만으로 사울 레이터의 팬이 되고 만다. 이 땅에서도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런 꿈을 꾸면 좋겠어.’ 잠들기 전, 그의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빗방울 흐르는 창, 수증기 맺힌 창, 빨강 우산, 노랑 스쿨버스, 노랑 택시,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초록 가게, 꿈꾸듯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 카페 구석에서 글을 쓰는 여인……. 틀림없이 자고 나면 기분 좋을 그런 꿈이다. 아니, 이미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그렇다. 어렴풋한 수증기와 빗방울, 왠지 따뜻할 것만 같은 하얀 눈, 꿈꾸는 사람들의 눈빛으로 인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꿈속 어딘가를 거니는 것 같다.  
   
지나간 시절, 1950년대나 60년대로 짐작되는 한때. 그 무렵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포착한 레이터의 사진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이 꼭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찍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그 외로움은 희석된다. 물기 어린 창이나 부옇게 흐려진 거울이 필터처럼 외로움과 고독감을 걸러준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사울 레이터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담담하게 전한다. 

때로 화려한 모델을 피사체 삼기도 했지만 그는 하퍼스 바자와 같은 잡지 사진을 찍기보다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담기를 원했다. 함박눈 맞으며 우편배달 하는 사람, 카페 웨이터, 구두닦이의 구두, 공사현장에서 나무판자를 옮기는 인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남자, 간판을 그리는 사람, 기다리는 노인, 버스에 앉은 신사, 개와 산책중인 여인,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 카메라가 신기한 아이들, 풀쩍 뛰어내린 고양이, 볕을 쬐는 개, 창밖으로 나가고 싶은 듯한 마네킹까지…….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가가 주는 선물은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일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 사울 레이터의 말처럼 그가 찍은 사진들은 모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한다. 쉽게 지나치기에 그러고 나면 더욱 그리워질 사소한 것들.

브레송이나 윌리 로니스, 카쉬의 사진을 나는 좋아했다. 잘 찍은 사진은 모두 흑백 사진이라고 여겼다.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한 브레송의 말처럼 사진은 순간 포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그 모든 생각을 뒤흔든다. ‘목적 없이 그저 세상을 바라본다’는 태도로 찍은 그의 소박하면서도 아련한 사진은 빨강 노랑 초록으로 빛난다. 모두가 흑백 사진을 고집하던 1950년대에 그는 컬러를 담는다. ‘미술의 역사는 색채의 역사다.’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의 믿음은 옳았다. 그의 렌즈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온 ‘색깔’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이제 사울 레이터만의 ‘컬러’가 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이루어진 세계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색채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울 레이터의 예민한 감각은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진만큼 그림 또한 무척 아름다워 몇 점이든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진, 그림 모두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을 담았지만 그만의 남다른 시선과 색채 감각 때문에 세상 유일한 사진이,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라는 그의 말은 그래서 인상 깊다. ‘인생에서는 무엇을 얻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내놓는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사울 레이터. 그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그 무언가를 남겨놓은 셈이다. 늘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어느 페이지든 펼쳐서 보고 느끼고 싶은,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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