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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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이름으로 선언된 역사의 종말

 

스티븐 핑커 , 빈 서판 (사이언스 북스, 2004).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도살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자들의 직계 후손인 우리는, 아무리 평화로운 미덕을 소유했을지라도 여전히 어느 한 순간에 화염처럼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학살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휘둘렀던 음울하고 불길한 본질적 특성이다.  -윌리엄 제임스-

 

지난 주 대부분의 신문 북섹션의 첫머리를 장식한 책은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이었다. 사실 각 신문들의 북섹션의 이런 천편일률적인 책 선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 그러나 한국 출판 시장의 협소함과 각 신문사들의 북섹션 기자들의 지적 배경(대개 인문, 사회 쪽)을 고려해볼 때 이런 비판은 그다지 옳다고는 볼 수 없다. 독서계의 아마추어에 불과한 나도 매 주 목요일 대형서점의 신간 코너를 두 세시간 둘러보면, 그 주 북섹션에서 소개될 책의 50%이상은 맞출 수 있다. 어쨌든 좋은 책은 누가 봐도 좋은 책이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은 지난 주 신문들의 북섹션의 첫 머리를 장식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책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이 책을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것이 지난 주 수요일(인터넷 서점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생물학과 심리학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에다 이리저리 일이 있어 단시간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저자의 주를 후주로 해서 순수한 내용만 760페이지, 참고문헌을 포함해 870페이지에 넘는 이 책을 읽는데만 해도 꼬박 10시간 가까이를 소모했다. 그나마 사회생물학에 대해 기본적인 독서가 되있는 상황이어서 이 정도 였지,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사회생물학계의 저자들의 저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그 시간은 더욱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각 신문사들의 쓴 이 책의 서평을 보자면 출판사 리뷰만 읽어도 쓸 수 있는(정확히는 출판사 리뷰만 보고) 추상적인 용어로 씌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책이다. 적어도 조중동이라면 외부필자라도 동원해서라도 제대로 보도했어야 될 책이다.(한겨레는 생물학과 교수가 썼다만) 하기야 바쁜 교수들이 이렇게 두꺼운 책 읽을 시간이 어디있으랴만은 게다가 이런 책에 대해 정확한 분석과 비판,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해줄 수 있을 사회생물학을 전공한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알기로는 거의 확실하게,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서울대 최재천 교수님 밖에 없다.

 

그럼 나는 이 책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인간 본성론이다. 특히 이 책은 그 제목이기도 한 빈 서판(blank slate, 로크의 tabula rasa의 영역)이라는 인간의 본성이론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성격과 행동성향은 빈 서판으로 태어나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전자 내에 어느정도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의 본성이 중요한가? 인간 본성과 관련된 사상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종류의 사회 그리고 우리가 살고자 하는 종류의 사회에 대해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사회를 필요로 하는가? 화려한 고독 속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본성상 우리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타인과 협동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본성상 공동선을 달성하려고 타인과 협동하고자 하는 사회적 존재인가? 우리의 정치적 견해, 대부분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답변에 달려 있다.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 본성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정치적 변화의 효율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혁명론에 기울어지기 쉽다. 반대로 인간 본성이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활동의 효율성에 대해 냉소적일 것이며, 현재 상태를 묵인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정치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는 더 나아가 인간 삶 속에서 그 무엇보다 관습과 전통이 중요하다는 확신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인간 본질에 관한 사상은 이렇듯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이 책 20장에서 핑커가 이야기 하듯이 예술과 인문학을 이루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특히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등은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들에 의해 전개된다. 이 책의 제목(tabula rasa)을 만들어내기도 한 존 로크의 말을 인용하자면 인간 본성에 관한 우리의 이론은 삶의 많은 측면을 분출해 내는 샘이다.

 

이 책에서 스티븐 핑커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우리를 포함해 대부분의 인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빈 서판 이론이다. 이런 생각은 서구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미 2300여년 전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은 같으나 그 배운 바가 다르다라며(몇 편인지 기억 안 난다) 빈 서판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빈 서판 이론은 근대의 교육과 사회제도의 근간이며,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비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다. 또한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유토피아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근대 자체가 어떻게 보면 유토피아다)

 

그러나 핑커는 이런 빈 서판 이론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한다. 물론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라는 해묵은 논쟁에서 진리는 분명히 그 가운데 어딘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핑커는 말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맞다. 그러나 핑커는 이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지만, 완고한 빈 서판 이론을 비판하다보니 본성, 나아가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니라고 하니 믿어줄 수 있다. 하지만 핑커는 이 글 첫머리에서 인용한 글귀에서 보여지듯이 결정적으로 인간을 기본적으로 춥고 차가운 야수로 보고 있다. 따라서 당연한 결과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에 대해 핑커는 인간들이 그 본성을 바탕으로 시간을 통해 발전시켜 이룩해낸 완벽한 제도라고 보고 있다.(이를 사회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구조기능주의쯤 되겠다. 역사학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진화론이고) 대부분의 제도분석가들이 이야기하듯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인간(정확히는 타인)에 대한 불신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제도 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저자 스티븐 핑커는 후쿠야마가 온갖 욕(비판보다는 욕을 더 먹었다)을 얻어먹어가며 선언했던 역사의 종말, 보다 우아하게 그리고 욕도 덜 먹어가며 위대한 과학의 이름으로 현재의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완벽한 제도라고 증명해낸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조중동이 대서특필 하지 않은 것을 이상할 수 여길 수 밖에… 책을 팔기 위한 출판사 리뷰나 서점 리뷰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문 리뷰들은 너무 부실했다.

 

물론 내 비판이 과도하다고 여길 사람도 있다. 스티븐 핑커가 과학적으로 연구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지, 그걸 꼭 정치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은 불가분 정치적 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아직 원서를 확인해보지 못해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저자가 홉스와 로버트 노직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존 롤스를 좌파라고 부르는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핑커의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정치적 관점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롤스가 부의 재분배를 비교적 강력하게 주장한 철학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좌파라고 불릴 정도는, 여기 한국에서도 확실히 아니다. 롤스가 좌파면 정형근, 김용갑도 빨갱이다.)

 

나 역시 한 때 과학자를 꿈꾸었고(국민학교 때 말고) 과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써 과학적 사실에 대한 사회구성주의를 전면적으로 반대한다. 하지만 과학자가 같은 연구를 하는 과학자나 과학도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는 두배, 세배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들이 잘 사용하는 수학의 언어와는 달리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중 삼중으로 정치적 중의적인 의미로 오염되어 있고 따라서 과학적 사실이 특정한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고 오해될 수도 있다. (대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한 서평자의 말 처럼 핑커는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아직 기초적인 단계에 있는 언어심리학, 진화심리학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 연구성과로 사회전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책에서 배울 좋은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핑커는 19장 어린이에서 아이들의 지능은 대부분 부모에 의해 결정되며 부모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가르칠려고 노력하지 말고 잘 놀아주라고 이야기 한다. 물론 아예 교육시키지 말란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의 성적을 부모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란 이야기다. 아이의 지능은 부모의 유전자와 80% 가까이 연관성이 있다. 대치족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겠지만, 과도한 사교육과(뭐 그것도 있는 사람들 이야기라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이만한 희망의 메시지도 없으리라.

 

앞에서 많은 비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꼭 한 번 독서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비록 수상까지는 못했지만 퓰리처 상 후보에 올랐던 이 책은 사회를 바라볼 때 인문,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결여하기 쉬운 자연과학적 관점을 보완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두께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교양을 쌓는데도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이란 이런 책 한 권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 대개 그 자신이 처한 사회 경제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에 한국의 독자들이 주지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책이 전체 인구의 80%를 넘는 사람들이 창조론을 믿는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씌여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슬람 사회를 제외하고(혹 더할지도) 근본주의적인 종교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씌여진 책이라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사실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좀 웃기고 너무 자세한게 아닌가 하고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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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07-2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책을 읽어서 신문 서평은 보지 못했지만, 출판사 리뷰로 서평을 대신했을 상황이 당연히 예상되네요 일단 두께도 두껍지만, 가끔 책을 읽지 않은 듯한 서평이 눈에 띄어 씁쓰름 할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