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9.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여름호에 실릴 글 하나를 앞질러 옮겨 놓는다. 여러모로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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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적인 것과 메시아적인 것
가치는 메시아를 통해 노동으로 복귀한다―네그리
1. “삶”이라는 접두사
낯익은 말, 낯익다 못해 낡고 닳은 말, 그래서 낮아진 말. 낮아졌으므로 모든 것이 흘러드는 말, “삶(life)”. 이 ‘삶’을 위한 비평이란 무엇일까. 이 ‘삶’과 함께하는 문학의 속성은 어떤 것일까. 모두가 나름으로 답할 수 있는 이 물음들은 그러므로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읽고 썼던 것들의 내력과 이력에, 굴곡과 곡절에 뿌리내린 각자의 테제들이다. 이 글은 그 중 하나에 관한 것이다. 조정환, 그의 테제. 삶활력, 삶정치, 삶권력, 삶시간, 삶언어, 삶문화, 삶문학, 삶예술, 삶미학 등에서 드러나는 ‘삶’이라는 접두사의 힘과 의지, 그것의 방향과 향배. 조정환에게 비평가는 예술가로 변신해가는 이행의 길 위에 있는 자다. 예술가로서의 비평가는 지구적 주권과 변환하는 자본에 맞서 특이한 욕망들과 힘들을 표현함으로써 내전을 치르고 있는 투사이다. 그는 다른 ‘삶’ 그래서 새로운 ‘삶’을 돌출시키고 개시하고 표현하려는 이들, 곧 삶예술가들 중 하나이며 그들의 반려이자 우정 어린 친구이다. 조정환에게, 연합하고 공통화된 예술가들인 그들 비평가들의 창조적 내전 수행은 플럭서스 예술운동의 재정의이며 그것의 전진이었다. 비평은 ‘삶’을 싸그리 포획하는 폭식의 삶권력(pouvoir)에 맞선 투쟁의 예술이며 예술의 투쟁이고 그런 한에서 그것은 ‘삶’을 위한 해방의 정치, 줄여 말해 삶정치에 다름 아니다. 조정환이 말하는 비평은 삶정치적 활력(puissance)의 지속 시간을 표현하고 예술화한다. 그것은 범람하고 초과한다. 분과와 경계를 넘어간다.
‘삶’은 활력의 다른 말이다. 활력은 분산하고 이탈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능력이다. 이 삶활력을 어떻게 증대시키는가 혹은 어떻게 봉쇄하는가가 조정환의 문학비평이 삶정치적 비평으로 드러나는 순간과 맥락을 집약하고 있다. 조정환은 말한다. 개념과 용어를 둘러싼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삶’이라는 개념이 그 적나라한 예다. ‘삶’을 둘러싼 문학의 투쟁에서 조정환의 입장은 이른바 ‘리얼리즘 에피스테메’를 끝장내려는 의지를 따라, 그것에 조종을 울리며 죽음을 선포하려는 힘을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어떤 장관을 연출했지만, 반향 없이 묵살되었다. 왜 그는 비평가 백낙청과 황종연을 전면적으로 기각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비평이 ‘삶’을 억제하고 활력을 제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말하는 ‘삶’의 문제에서 그들 사이의 첨예한 입장차가 미세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렌스는 백낙청의 근간 중 하나다. 리얼리즘의 수세를 공세로 역전시키기 위한 백낙청의 전장이 바로 로렌스였다. 고흐와 세잔의 그림 앞에 섰던 로렌스. 해바라기와 사과는 여러 존재자로서의 해바라기와 사과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열림이라는 것. 로렌스는 자기 자신과 존재로서의 해바라기 사이의 ‘생생한 관계를 시간 속의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고 또 성취한다.’라고 썼다. 백낙청은 그런 로렌스의 또 다른 한 문장에 주목한다. ‘세잔 자신이 원한 것은 다름 아닌 재현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근간으로서의 ‘재현’은 로렌스 재현론의 전유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자신이 말하는 재현이라는 것이 ‘삶에 더 충실하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못 박음으로써, 조정환에 따르면, “재현의 위상을 삶의 지평으로 가져간다.”[조정환,『카이로스의 문학』, 갈무리, 2006, 57쪽. 이하『카이로스』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조정환은 백낙청이 로렌스의 다음 문장, ‘그[세잔]는 현실[life]에 충실한 재현을 실제로 원했다. 다만 그것이 현실[life]에 더욱 충실하기를[more true-to-life] 원했을 뿐이다.’에 들어 있는 ‘life’를 ‘삶’이 아니라 ‘현실’로 번역함으로써 로렌스 고유의 ‘삶’ 개념을 리얼리즘론의 재현을 보증하는 것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한다. 조정환은 ‘삶(life)’을 ‘현실’로 번역한 것이 백낙청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리얼리즘론의 구축과 재구축을 위한 의식적 조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문 밖으로 뺀 각주 속에서 조정환이 백낙청을 기각하는 이유와 근거를, 달리 말해 그 두 비평가의 확연한 분기를 다시 한 번 확인케 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인용 ‘Ce'zanne was a realist, and he wanted to be true to life’에서도 ‘life’를 ‘현실’로 새겨 ‘세잔은 리얼리스트였고 현실에 충실하게 그리기를 원했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바꿔치기는 부주의의 산물이기보다 의식적인 조작으로 보인다. 이 조작을 통해서 현실 재현을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로렌스의 ‘삶’ 개념과 ‘삶에의 충실성으로서의 재현’ 개념이 리얼리즘론을 뒷받침하기에 적절한 ‘현실’과 ‘현실 재현’의 개념으로 둔갑하는 것이다.(『카이로스』, 57)
내게 위의 문장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백낙청을 향한 조정환의 투쟁의 줄기찬 지속으로 다가온다. 1980년대 후반 조정환은 당대의 문학판을 부르주아 문학의 경향적 우세로 추상하면서 노동해방의 기관차로 90년대를 민중의 시대로 만들어 가야한다고 처방했다. 월간『노동해방문학』(1989)에 실린 노동자 ‘전위’ 조정환의「‘민족문학주체논쟁’의 종식과 노동해방문학운동의 출발점」은 당시 문학 담론의 주류였던 백낙청 민족문학론의 민족주의적 우편향을 비판하는 글이었다.[조정환,『노동해방문학의 논리』, 노동문학사, 1990, 47~87쪽 참조.] 이 글이 흘러간 옛일의 회고담이 아니라, 1990년대 중반 네그리/가타리의『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번역함으로써 이뤄진 자율주의로의 전회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 달리 말해 1980년대 후반의 백낙청 비판이 다시 다르게 단절, 반복, 전변되고 있음을 위의 한 대목은 오롯이 보여준다(이는 백낙청이 제안한 거버넌스론, 이른바 창비 거버넌스론을 다중의 거버넌스로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떤 비평의 궤적에서 한 결로 된 오랜 시간의 지속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비평은 존엄하다. 문제는 언제나 주체의 ‘삶’이었다. 잠재적 활력으로 충만한 ‘삶’의 관점, 그것이 조정환의 입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의 충실성’이라는 로렌스의 관점과 공통된다. ‘삶’을 현실로, ‘삶에의 충실’을 현실 재현에의 충실로 번역/전유한 백낙청의 관점을 기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삶’은 활력의 다른 말이고, 활력은 늘 잠재성의 표현과 합성된 말이다. 백낙청에 대한 조정환의 결론. “백낙청은 재현이 현실 재현을 넘어서야 함을 주목했지만 현실을 넘어서는 잠재의 평면과, 현실과 잠재를 포괄하는 전체의 열림인 역동적 표현의 차원[곧, ‘삶’의 관점]을 보지 못했다.”(『카이로스』, 66) 이 결론 혹은 선고의 근거로 조정환은 작가 신경숙의 『외딴 방』에 대한 백낙청의 평가를 든다.『외딴 방』이 스러지고 잊혀져간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리고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했으며 우리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부여’하는 엄청난 일을 했다는 백낙청의 평가에 대해, 조정환은 신경숙의 동일한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작가는 결코 작가 바깥에 있는 그들 노동자들을 대상화해 위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것, ‘삶’의 위엄과 활력은 작가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마저도 포함되어 있는 그들 속에 항상-이미 잠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 그런 그들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작가는 꾸민 이야기의 ‘재현’을 통해 그들의 삶활력과 위엄을 재생산하고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민중의 창조 작업에 다름없다는 것을 말한다. 재현을 넘어서는 이른바 ‘되기’의 연쇄. 창조자-되기, 친구-되기, 줄여 말해 공통-되기의 창조적 실천 혹은 창조적 내전의 수행.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외딴 방』에 호남 사람이 당하는 서울에서의 차별과 노동자들의 생활 속에 흔히 있을법한 상스런 모습들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백낙청의 평가는 잠재적(virtual) 활력과는 아무런 긴장 관계를 맺지 못한 사실성 혹은 현실성(actual)에 매몰된 채로 기존의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척도를 뒷문으로 다시 도입하고 있는 예증이 된다. 그때 ‘삶’은 억제된다.
백낙청이 ‘삶에의 충실성’이라는 로렌스의 관점을 ‘현실 재현에의 충실성’으로 전유했었다면, 백낙청에 대한 비판을 조정환과는 다르게 수행했었던 황종연에게는 ‘개인에의 충실성’이 중요했다. 조정환은 백낙청과 황종연의 관계를 두고 “민족문학의 편집증적 코드와 대립하는 일종의 분열증적 코드”(『카이로스』, 35)라고 평한다. 황종연이 강조하는 진정성은 개인의 자아, 감정, 신념에 일치하는 진실된 삶을 살려는 의지이자 파토스이다. 이와 같은 진정성에 대한 강조는 연대하고 연합하는 삶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언제든 틈입하고 들러붙을 수 있는 파시즘의 유령성을 회피하고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민족에의 충실성, 민중에의 충실성, 계급에의 충실성, 당에의 충실성이 아니라 개인의 진정성에의 충실성은 그러나 모든 사회 윤리들을 규제하는 척도로 기능함으로써 민족, 민중, 계급 같은 동일성을 강제하는 시스템에 갇혀 있었던 자아를 자유의 이름 아래 카오스 상태로 방치하게 된다. 백낙청을 비판했던 황종연은 백낙청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로렌스적 ‘삶에의 충실성’을 폐기하거나 포기한다.
이렇게 하여 진정성이 로렌스적 의미의 ‘삶에의 충실성’으로 발전될 가능성은 차단된다. 1990년에 부상한 사회적 주체성의 새로운 덕성은 ‘개인’이라는 형틀에 따라 낱낱이 부서지고 파편화된다. 특이함(singularity)의 이름일 수 있는 진정성을 개인성(individuality)에 종속시킴으로써 진정성들의 공통성을 구축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된다.(『카이로스』, 38)
조정환에게 문제는 언제나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었다. 그에 따르면 황종연은 사회적 정상성의 영역에서 일탈하고 이탈하는 비루한 것들의 축제를 권력에 의해 허용된 일시적 균열과 난동으로 규정했고, 그것의 낭만적 미화를 거절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성과 진정성의 밀도를 ‘삶’의 척도로 설정했다. 조정환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인성에의 충실과 그것의 미학적 표현으로서의 진정성이라는 황종연의 두 기둥이 민중, 민족, 계급 같은 동일성에의 충실성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여러 동일성들에 개인의 진정성에의 충실이라는 또 하나의 동일성을 대립시키고 대치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일성들은 정치적으로는 대의를 미학적으로는 재현을, 달리 말해 리얼리즘의 주조음을 그 배면에 깔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예리하게 비판했었던 황종연이 개인의 진정성이라는 또 다른 동일성을 다른 동일성들에 단지 대치시키는 선에서 멈추고 말 때 그의 비평은 자신의 적들과 적대함으로써 공모하게 되며, 그렇게 적을 환대하게 될 때 동일성들의 연쇄적 자리바꿈은, 동일성들의 순번에 따른 주도권 나눠먹기는, 동일성들의 변증법적 합종과 연횡은, 줄여 말해 리얼리즘 에피스테메는 끝내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되뇌어야 하는 것은 저 로렌스/들뢰즈적 ‘삶’의 의미, 그것에의 충실성이다. 특이한 진정성들의 공통-되기, 그 창조적 내전의 실천인 것이다.
로렌스/조정환은 말한다. ‘삶’의 관점이란 주체와 세계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시간의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고 또 성취’하는 것이라고. 시간의 살아 있는 순간. 이 한 구절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로렌스가 말하는 살아 있는 ‘삶’의 시간, 삶시간, 그 잠재적 활력의 시간이야말로 조정환의 삶문학이 운행하는 터전이며 태반이기 때문이다. 삶문학은 삶시간의 지속을 위한 문학이며, 그런 한에서 시간의 화살을 뜻하는 ‘카이로스’의 문학이다. “그리스어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의 길이, 시간의 충족, 측정된 시간을 뜻함에 반해 카이로스(kairòs)는 시간의 순간, 시간의 도착, 사건 속의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위기 속에서의 선택과 결정을 함축한다.”(『카이로스』, 16) 크로노스는 축적하기 위해 분할한 시간이며, 분할하기 위해 측량가능하고 계산가능하게 변성된 시간이고, 산업자본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던 때의 시간이다. 그것은 재현의 시간, 착취의 시간, 소외의 시간, 죽음의 시간의 다른 말이다. 이와는 달리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시스템을 내리치는 파국의 시간이며, 파국과 신생의 동시적 사건이자 그것의 도래의 시간이다. ‘삶’이라는 접두사들의 이행과 변이로 드러나고 있는 조정환의 활력의 비평은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이뤄진 의지적 결단들과 함께 숨 쉬며 그것들에 틈입하고 있다. 그 위기와 틈입의 시간 속에 각인된 결단의 순간들을 폭발 직전의 시간 속에서 다르게 지속하는 것. 그것이 수행해야할 남은 과제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간에 관한 비평으로, 카이로스를 위한 비평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는 것은 리얼리즘 에피스테메에 대한 비판의 근거였던 ‘삶’의 관점 곧 카이로스의 시간을 통해 산업자본주의에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다시 다르게 비판한다는 뜻이다. 이를 조정환의 조어법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에 대한 비판으로 압축된다.
2. 포섭을 찢는 카이로스
산업자본주의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공장에서의 노동시간 덕분이다. 공장에서 노동시간은 둘로 나뉜다. 임금을 지불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과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는 잉여노동시간. 시간을 그렇게 길이와 양으로 분리하는 것은 법과 권력의 척도적 힘의 비호와 보증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분리는 법이 숨은 채로 드러나는 한 방식이다. 길이와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시간의 시스템으로 ‘삶’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 산업자본주의의 포섭 전략이었다. 곧, 형식적 포섭. 이는 시간이 공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훈육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시간의 공간화의 밑바탕에는 계산 가능한 시간에 근거해 가치를 산출하는 ‘가치법칙’과 위계화하고 구획하는 법에 근거한 ‘권력법칙’의 짜임이 있다. 이 짜임의 밀도와 강도와 속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시간이 그만큼 압축된다는 걸 뜻한다.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표상되는 경제적 기계화의 기술인 테일러주의 포드주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인 사회(민주)주의 케인즈주의와 결합하여 노동하는 시간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더 많은 잉여노동시간을 창출한다. 곧, 실제적 포섭. 과학기술을 생산에 응용한 자본은 시간의 압축을 통한 착취의 성취를 공장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넘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확장하려는 경향에 이끌린다. 공장 바깥에서 이뤄졌던, 그래서 전통적 가치법칙으로는 계산되지 않았던 협력적 ‘삶’의 여러 양상들인 가사, 보육, 치료, 연구, 교육, 놀이, 관광, 연예, 정보, 통신, 안전, 보험, 금융 등과 같은, 돌보고 나누고 아끼고 소통하고 인식하고 즐기는 직접적인 삶활력들을 비물질노동의 형태로 포섭하려는 것이다.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에 이어진 오늘날의 자본은 공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몸과 땀에만 눈독 들이는 것도 아니며, 노동자 없이 홀로 돌아가고 있는 자동화된 기계에만 군침 흘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지자본은 느낌과 표현을, 그것의 공감과 공유를, 감각과 인식과 판단과 의지에 의한 인지적 생명활동 전반을, 줄여 말해 ‘삶’ 그 자체를 겨냥한다. 곧, 가상실효적 포섭(virtual subsumption).
공장에서 기계들이 그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도 사실상 그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사회 전체이며, 모든 개인들이 통상적인 생산의 현장에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자신들을 연결접속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접합접속함으로써 그것을 공리화하는 사회체에 결합되어 있는 한, 연구하거나 소통하거나 봉사하거나 혹은 소비하는 삶의 모든 과정들에서 그들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이제 사회적 노동자가 가상실효적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조정환,『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5, 48쪽.]
조정환의 ‘가상실효적 포섭’은 네그리의 ‘총체적 포섭’을 갱신하고 전진시킨 개념으로, 시간의 실제적 포섭이 사회체 전체에, 생명 전체에 전면적으로 관철되고 완성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것은, 지각, 정서, 지성, 상상의 힘이자 무엇보다도 행동의 힘인 ‘뜻’을 포섭한다.”[조정환,『인지자본주의』, 갈무리, 2011, 285쪽. 이하『인지자본』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조정환이 말하는 ‘뜻’은 행동과 행위의 힘이자 ‘능력’이다. 그것은 구성능력/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과 겹친다. 그것은 삶활력/삶정치의 다른 말이며 ‘삶’이라는 접두사의 속엣말이다. ‘뜻’은 삶권력을 전복하는 힘이다. 풀어 말해 기존의 법이 부여하는 틀 안에서 힘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법을 보강하고 증대시키는 법들을 발의하고 입법하는 제정권력(pouvoir constitué)을 끝장내는 힘, 새로운 법과 다른 삶의 규준을 창출하는 힘이다. 인지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제헌적 활력은 노동시간에서 차지하는 잉여노동시간의 비중을 줄여 노동의 힘을 신장시키고 그 힘의 헤게모니를 확장시키려는 투쟁에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는다. 길이와 양으로 분할 가능한 공장에서의 노동시간 바깥에서 이뤄지는 비물질적 생산활동의 경향적 리드에 의해 전통적 가치법칙의 에피스테메가 교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조정환의 삶문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삶정치학은 합류한다.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의 교란은 문학에서의 리얼리즘 에피스테메의 교란 및 붕괴와 동시적이며, 한 배를 타고 함께 간다. 어디로 가는가. 그것의 끝으로, 죽음으로.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분할이 쉽지 않은 비물질적 생산이 역사적으로나 본성적으로 자본주의에 포획되기 어렵다고 했던 건 ‘노트’를 쓰고 있던 마르크스였다. 가치법칙의 붕괴가 ‘삶’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의 조건이라고 했던 건 ‘요강’을 쓰던 마르크스였다. 자본은 가치법칙에 근거한 기존의 축적 전략으로는 쉬 관리하고 축적할 수 없는 힘들, 곧 자본의 축적의 한계를 초과해 접속하고 소통하는 비물질적 생산의 힘들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의 유연화로 자신의 숨통을 틔우고, 자신의 금융화로 명령으로서의 비물질적 화폐의 힘을 강화하며, 기술을 에테르화함으로써 공통의 소통과 공감을 상품화하고, 핵을 통한 공포의 감정적 전염과 확산을 통해 자신을 군사적이고 심리적으로 옹립한다.[소통의 상품화에 관한 적나라한 예, 다시 말해 오늘날의 생산 전반에 경향적 파급력을 미치고 있는 예로는 ‘오늘날의 공장’으로서의 SNS 같은 사회연결망서비스, 구글 같은 통합검색엔진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다중들의 흩어진 생각들, 느낌들, 활동들, 곧 인지적인 것들을 집중시키기 위한 알고리즘을 제작하고, 이어 그것을 지적재산권 특허권에 근거해 독점함으로써 착취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인지적인 것들로 이뤄진 광대하고 무한한 인지토지를 구축하고 그 토지의 독점을 통해 ‘소통의 잉여가치’ ‘관계의 잉여가치’ ‘네트워크의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토지의 독점을 통한 이윤을 지대라고 한다. 인지토지의 독점을 통한 인지자본의 이윤은 지대로 전변하고 있다. 점자 사라져 가던 지대 개념이 오늘 그렇게 되살아나고 있다. 네그리/조정환이 ‘지대에 대항하는 절대민주주의’라는 테제를 내세우는 의지와 맥락이 그와 같다. 안토니오 네그리,「지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조정환 옮김,『아우또노마M』7호, 2010년 3분학기, 17~22쪽 참조.] 인지자본의 이와 같은 사활을 건 삶권력적 축적의 전략은 경계를 넘어 흘러넘치고 있는 인지화되고 공통화된 생산적 힘들, 곧 공통적인 것의 활력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공통적인 것은 ‘때들’의 생산물이며 새로운 ‘때들’이 생성되는 터전인 집단적 ‘뜻’이다.”(『인지자본』, 521) 앞서 ‘뜻’은 제헌권력과 삶정치의 다른 말이라고 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런 삶정치적 활력이 생산한 새로운 ‘때들’, 바로 저 카이로스의 시간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들을 생성시키는 터전이자 토양이다. 카이로스는 쏘아진 영원성의 화살이고, ‘영원’은 잠재적 활력의 저수지이며, ‘때’란 영원의 한 동적 단면이다. 그런 때들의 공통적인 힘은 집계하고 집적하는 시스템의 크로노스적 시간을 내리치고 절단하는 ‘단절들’ ‘틈들’의 힘이다. 다중이 가진 힘이 바로 그것이다. “다중은 시간의 화살들, ‘때들’이며 그 ‘때들’의 떼이다.”(『인지자본』, 289) 공통적인 것, 혹은 때들의 코뮨으로서의 다중은 잠재적인 것 속에서 생성되는 구성의 힘이자 제헌의 힘이며, 카이로스적 파국의 힘이다. 그 힘은 메시아적이다. 무슨 말인가. 튀니지에서 촉발된 아랍혁명이라는 일례, 또는 일즉다(一卽多)의 사례.
폭력을 오직 방어에만 제한하는 운동의 반폭력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이 운동에 높은 윤리성을 부여하면서 운동참여자들을 ‘자유의 카라반(caraban)’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 카라반의 정동적 움직임이 메시아적 참여의지를 불러일으키면서 중심지도부 혹은 명확한 지도강령의 부재라는 조건 하에서도 운동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아랍혁명의 새로움이자 특징이며 21세기 혁명의 진화방향 중의 하나를 제시한다.[조정환,「아랍혁명, 존엄의 카라반, 그리고 다중의 전지구적 대장정」,『오늘의문예비평』81호, 2011년 여름, 169쪽.]
튀니지와 이집트의 다중들은 각종 총기류, 탱크, 전투기, 국영방송, 감옥 등으로 표상되는 지배집단의 압도적인 치안기계들을 상대로 화염병, 몽둥이, 부엌칼로 대응하면서, 수적 우세 속에서 SNS를 통한 소통과 협력, 함성, 긍지, 분노, 사랑의 키스와 꽃 같은 정동적인 무기로 응전했다. 그들의 잠재적이고 공통적인 활력은 지배집단의 곪은 신체를 파열하고 새로운 신체의 법을 구성하는 제헌적 살(chair), ‘공통의 살들’이었고, 그 살은 쏘아진 카이로스의 살[矢]이었다. 그들은 제헌의 새살을 돋게 하는 질(膣)의 연합, 질들의 공통체였다. 그 공통되기의 과정 속에서 공통적인 것은 메시아적인 것과 동시적이며, 한 배를 타고 함께 간다. 어디로 가는가. “삶 내재적 코뮤니즘의 시간으로”(『인지자본』, 294) 간다. 크로노스적 통합의 시간에 파국의 빗장을 내리지르고, 삶권력적 관리의 시간의 이음매를 거듭 탈구시키며 기쁘게 간다. 그것은 주권적 제정권력의 폭력을 정지시키는 메시아적 힘의 시간에 다름 아니다. “존재론적 네트워크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 없는 과정도 아니다. 심연의 경험이 야기한 심오함과 존재론적 몰입은 이번에는 신성에 대한 경험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비상사태를 통해 주체 구성으로 전화한다.”[네그리,『욥의 노동』, 박영기 옮김, 논밭출판사, 2011, 185쪽. 이하『욥』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이 문장은 벤야민의 것이 아니라 네그리의 것이다. 그것은 네그리의 존재론, 정확히 말해 어떤 메시아적 존재론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존재론적 네트워크로서의 다중에 내장된 진정한 주권의 힘을 메시아적 경험에의 몰입을 거쳐 전화한 신성의 주체성에서 확증하고 있다(그리고 이는 네그리의 관점의 진화 속에서도 폐기되거나 포기되지 않는 어떤 주조저음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아랍혁명의 특이성에 관한 조정환의 문장들은 네그리가 말하는 비상사태의 선포, 바로 그 메시아적 경험과 몰입에 이은 주체재구성의 조건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셈인데, 지도부의 부재 혹은 위로부터 부과된 강령의 부재가 그것이다. 지배집단의 시선에서 중심적인 지도자와 조직이 없다는 것은 ‘약함’의 증거로 읽혔겠지만, 이미 그 약함은 메시아적 참여라는 절대적 힘의 근거였다. 약함의 메시아적 잠재성. 그러므로 지도자의 부재는 힘의 부재가 아니었는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공통의 순간들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조정환이 말하는 ‘각자의 지도자 되기’ ‘순교자 되기’의 시간은 제국의 3항 고리를 향해 날아가는 메시아적 시간의 카이로스에 다름 아니다. 그는 새살로 된 화살로서의 그들 다중에게서, 권리의 어떠한 양도도 없이 스스로 독재자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지도력의 빅뱅’을, 제국을 붕괴시킬 잠재성의 영토를 확인하고 그것의 지속을 기대한다. 이 기대는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 “그때그때의 삶시간의 완성과 ‘장차 올 것’의 열림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의 관점”(『카이로스』, 90). 조정환은 어디에 있는가. 두 개의 카이로스, 두 개의 시간 사이에 있다. 하나는 잠재력의 촉발들이 지속되는 삶시간의 순간적 완성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와 버린 것이 아니라 늘 ‘장차 올 것’으로서 도래하고 있는 메시아적 시간이다. 그 두 시간 사이에, 그 열림 안에 조정환은 있다. 두 시간의 열린 사이에서 그는 무얼 하는가. 두 가지 동시적인 과업을, 그래서 궁극에는 하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하나는 그가 늘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긴장 속에서 뒤의 시간이 앞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이끌게 함으로써 이미 구축된 자신의 자리를 허물고 다시 구축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쉬지 않는 이론적 분투와 유물론적 변신의 힘이 바로 그 사이의 열림에서 나온다. 언젠가 그는 시인 박영근을 읽으면서 실재적인 것(the real)을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실적인 것(the actual) 사이의 열린 긴장 속에서 탐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런 한에서, 내게 그는 리얼리스트(real-ist)다. 리얼리즘 에피스테메와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의 강고한 결합을 폐(廢)하기 위해 ‘사선’을 내리긋는 리얼리스트, 메시아적 실재주의자. 이 개념을 더 단련해야할 필요, 이 개념으로 더 수련해야 할 필요. 이 두 개의 필요와 마주한다.
3. 발생사와 메시아적 힘
‘민중은 메시아인가’와 같은 민중신학의 급진적인 연혁과 주름을 가진 물음이 세속의 억압을 뚫고 나가는 힘으로서의 신학에 방점을 좀 더 세게 찍은 것이라면, 이 글이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은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 안에서 그것과 대항해 싸우며 그것의 너머로 넘어가는 초과와 이탈의 잠재적 활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양상 혹은 그 힘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것은 유물론적 변신으로 이어지는 주체구성의 경로와 방법의 탐구에 방점이 찍혀 있다. 메시아적인 것은 인지자본으로의 변형을 강제했던 인지노동의 생산력과 함께 간다. 그것은 인지적 소통의 증대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중의 공통되기의 잠재력과 접맥된 채로, 신성에의 몰입과 관계 맺고 있는 유물론적 ‘비판’의 의지, 지성, 미감 같은 메시아적 정동(affect)에 관한 탐구이다. 유일한 문제는 정동되는 능력이며 정동은 힘의 실행이라고 했던 건 들뢰즈였다. 정동이라는 기초 위에서 적은 파괴되어야 하지만 정동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고 했던 건 네그리였다. “메시아운동은 정상적인 사회적 사실이다. 특정 유형의 사회에 특유한 그 운동은 그 사회에 내재하는 논리로부터 나온다.”[페레이라 데 케이로즈,『세계의 메시아운동―메시아운동의 사회학』, 이상률 옮김, 청아출판사, 1992, 333쪽.]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회의 ‘내재적 논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운동하는가라는 질문이며, 그 질문이 놓인 배치의 전환과 이행의 수준이다.
『인지자본주의』의 가치법칙 비판에 대한 문제제기로 제출된『마르크스주의 연구』(2012년 봄호)의 몇몇 글들에 관해 말함으로써 더 나아가자. 그들의 비판, 곧 그들의 가치법칙 옹립론은『제국』을 둘러싼 논쟁의 차이 없는 반복이며, 그러므로 죽은 비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 죽은 비판은, 제국주의와 제국, 마르크스의 ‘명제’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 마르크스의 ‘설명’과 마르크스의 ‘변화’,『자본』과『요강』, 가치형태에 관한 규명적 ‘인식론’과 노동과정에 관한 주체 구성적 ‘존재론’, 현실성과 잠재성 등등의 구도 속에서 앞의 것들에 매몰된 결과이며, 그렇게 매장된 터널 속에서 뒤의 것들을 바라보는 인지협착(tunnel vision)의 결과이다. 가치법칙에 관한 비판이『인지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은 맞지만『인지자본주의』의 총체적 표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터널 속에서, 계급구성, 주권합성, 시간, 공간, 메트로폴리스, 지성, 정치적인 것, 윤리적인 것(그들은 왜 ‘것’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다.) 등 가치법칙 비판과 관계 맺는 다양한 흐름들을, 그 흐름들 간의 대리보충하는 관계를, 가치법칙 비판이라는 단일한 목표에 따라 일괄적으로 차렷하지 않는 그 흐름들 각각의 고유성을 가치법칙 안으로 환원하고 회수하고 감금한다. 그들은 가치법칙으로 그 흐름들 모두를 대표하고 재현하고 대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정통도 전통도 아니다. 그것은 도그마이며 그런 한에서 폭력적이다. 앞서 가치법칙 에피스테메라고 했던 건 바로 그 도그마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환의 좌표는 위에 나열한 구도들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그 실재(the real) 속에서 뒤의 것들에 의해 이끌리며 거듭 수정되고 있다. 내게 그 수정은 차이를 생산하는 수정, 차이의 수정이다. 차이가 실재를 전진시킨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유산을 사산시키지 않는 방법이자 태도이다. 다중(multitude)은 바로 그런 태도(attitude)이며, 그런 태도에의 동참과 참여에 대한 호소이자 요청이며 서약이자 촉구이다.
자리의 구축과 재구축, 좌표의 설정과 재설정의 반복 속에서 차이가 생산되고 그 차이가 실재를 전진시킨다고 썼는데, 그때 그 차이란 마르크스의 유산에 관해 말하고 있는 데리다의 ‘차이(différance, 差移)’다. 차이는 어떤 시간과 공간을 개시한다. “억제할 수 없는 차이 안에서 지금-여기가 펼쳐진다.”[자크 데리다,『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76쪽. 이하『유령들』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어떤 시공간이 어떻게 열리는가. “법 이전의, 의미 이전의 법의 폭력, 시간을 중지시키고, 탈구시키고, 이음매에서 빠지게 만들고, 자연적인 거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폭력, 곧 ‘이음매가 어긋나out of joint’ 있음.”(『유령들』, 76) 차이는 무엇보다 폭력인데, 기존의 법이 만든 의미의 체계, 기존의 법에 의해 자연화된 규약과 규준, 규범과 규칙을 찢고 깨는 폭력이다. 이음매의 연결을 통해 지속되는 법의 시간, 시스템의 시간이란 길이로 재현되고 양적으로 계산되도록 가공되고 재편된 시간, 이른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척도이며 그 척도의 힘을 옹립하는 정치적 사회적 합의의 시간들이다. 차이라는 폭력은 법의 시간의 연장을 중지시키고 시스템의 시간의 이음매를 탈구시켜 틈(闖)을 내고 틈새를 벌리고 간극을 만든다. 차이라는 폭력은 집계하고 계측하는 법의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것을 정지시키고 단절시키는 힘인데, “그것이 지닌 단절의 힘이 제도나 헌법constitution, 법 자체를 생산한다.”(『유령들』, 76) 차이라는 폭력(Gewalt)은 합의된 합법의 시스템을 부수고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구성적 힘(Gewalt), 제헌적 힘이다. 그 힘, 중단의 힘은 메시아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메시아성은 지금 여기서 사태, 시간, 역사의 통상적인 경로를 중단시킨다. 그것은 타자성 및 정의에 대한 긍정과 분리될 수 없다.”[데리다,「마르크스와 아들들」,『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진태원 한형식 옮김, 길, 2009, 215쪽.]
차이라는 폭력, 그 메시아적 제헌의 힘은 카이로스의 제헌적/구성적 힘과 함께 간다. 조정환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틈과 단절이며 새로움의 구성인 ‘때’”라고 표현할 때, 그것을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파열시키는 틈이자 미분의 힘(…),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구성의 힘”(『인지자본』, 280, 294)으로 다시 설명할 때, 카이로스의 시간이 양으로 집적되는 통합적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의 연속을 정지시키는 제헌적 폭력의 시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적분의 시간에 파국을 도래시키는 미분의 힘이다. 잘려도 잘려도 새살로 다시 돋고 돋는 히드라의 힘, 양적 분할의 질긴 연장 속에서 끝내 분할되지 않고 남는 미세한 차이들의 초과하고 범람하는 힘. 그것이 미분의 힘이다. 그것은 “절대적 독특성의 촉구/서두름이다.”(『유령들』, 77) 아랍혁명의 동력이었던 독특성들의 지도자-되기와 순교자-되기에서,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에서 메시아적 제헌의 힘을 본 조정환은 그들을 ‘자유의 카라반(caravan)’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사막’을 횡단하며 성지순례와 상업을 겸했던 카라반들의 여행에서 제국에서의 삶을 초과하는 다중의 대장정을 본다. 카라반은 자유(自由)다. 자기에게서 말미암는 한, 자유는 자기통치(self-government)이며 자기창조(autopoiesis)의 다른 말이다. 사막의 순례자들인 카라반은 “사막의 메시아주의의 기회”(『유령들』, 72)를 놓치지 않는다. 사막에서의 신성의 경험이라는 절호의 비상사태 속에서 새로이 거듭난 그들, 제헌적 카이로스들, 때들. 조정환은 카이로스의 때들을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며 잠재성의 광대한 토지를 늘 새롭게 일구고 재구성한다는 뜻에서의 ‘발생적 역사(Geschichte)’라고 말한다. 이는 달리 표현될 수 있다. 카이로스는 발생적 힘의 역사, 발생사 속에서 잠재성의 대지를 갈아 새로운 가치를 수확하는 노동의 시간이다. 발생사가 그렇게 노동하는 자로의 변신과 재구성의 순간에 맞닿은 것이며 그 순간의 최고도의 지속인 한에서, 발생사는 노동과 가치의 개념을 혁신한다. “가치는 메시아를 통해 노동으로 복귀한다.”(『욥』, 138) 이 문장은 네그리에 의한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의 파열을 뜻한다. 메시아적 제헌의 시간에 깃든 카이로스의 노동은 가치법칙에 의해 측정될 수 없는 가치, 공통가치의 다른 말이다. 이와 같은 가치의 재발명, 가치의 역사적 이행 속에서 신성의 경험과 유물론적 입장은 혁명적 순간을 통해 합수한다. 메시아적 유물론자로서 말하는 네그리, 그의 문장들.
메시아는 두 번째 자연이다. [메시아는] 에너지를 생산 축적하는 기계이며, 에너지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에너지를 제1질료materia prima로 적용하는 기계이다. 그의 최초의 소진으로 인한 재들이 재탄생하는 힘이다. 강력한 혁신이다. 독창적이며, 모든 목적성 바깥에 있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존재와 물질성의 잉여이다. 이것이 메시아다. 그리고 세계의 척도는 늘 새롭게 창조된다.(『욥』, 195)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시민상태와 자연상태의 경계를 허물고 시민상태를 모조리 늑대들의 자연상태로 전변시키고 있다는 것은 독이면서 약이다.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는 어떤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늑대의 상태냐 새로운 시민상태로의 역전이냐가 그것이다. 네그리에게 메시아의 파루시아(parousia, 임재)는 그 어떤 권리도 양도하지 않는 절대적 민주주의로서의 새로운 자연, 두 번째 자연을 개시한다. 제헌적 메시아, 그 힘. 그것은 개념의 오랜 역사와 이력을 지닌 ‘제1질료’와 관계한다. 존재의 변신가능성의 저장고이자 잠재성의 무한한 총체, 아리스토텔레스적 ‘신(神)’으로서의 제1질료. 메시아적 힘을 유물론적 비판의 에너지로 변형시키기 위해 메시아의 임재의 순간은 제1질료로 불탄다. 그것은 연금술적이다. 타고 녹은 메시아의 임재의 순간은 재들로, 새로운 몸으로, 화살로, 카이로스로 재탄생한다. 네그리의 재는 데리다의 재와 겹친다. 차이라는 재. “재와 뒤섞여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대자의 탄각炭殼 속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일자Un 속에서는 그 유일성이 보장될 수 없는 차이”(『유령들』, 72). 네그리의 카이로스적 재들이 단일한 목적과 집계의 체계 바깥에 있는 혁신적 잉여이자 잔여이듯, 데리다의 차이는 메시아적인 것이 타고 녹은 뒤의 재들과 합성된 채로 절대적 동일성의 체계와 싸운다. 차이라는 폭력은 차이라는 재들의 일이다. 그것은 집중시키고 한데 모으는 시스템의 이음매를 내리쳐 탈궤시킨다. 지배자들의 눈알에 흩뿌려진 재들, ‘사막’의 모래들. 그 미세한 알갱이들(微粉)이야말로 미분(微分)의 힘, 제헌적 힘의 다른 말이다. 시간들이 미쳐 날뛴다. 불타는 카이로스의 화살들이 가로지른다. 데리다의 어떤 선포. “시간이 탈구되고 이음매가 빠지고 벗어나고 탈궤되어 있고, 시간이 탈이 나고 쫓기다가 탈이 나고 뒤틀리고, 고장이 난 동시에 미쳐 있다.”(『유령들』, 50)
4. 재[灰]의 유물론―견신 또는 코라
조정환이 자율주의로의 선회 이전의 자신에 관해 쓴 한 문장.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였고, 잃은 것은 지금시간(Jetzt Zeit)이었다.”(『카이로스』, 424) 이 문장은 조정환의 과거와 오늘을 관통하면서 그의 비평의 전 궤적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비평의 존재론적 벡터를, 그 힘과 방향의 전모를 직감하게 한다. 조정환의 한 단어 ‘지금시간’은 앞서 썼던 발생사적 힘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내게 그것은 벤야민의 인장이 새겨진 단어로 보인다. “이 지금[Jetzt] 속에서 진리에는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다.”[발터 벤야민,『아케이드 프로젝트 I』,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1056쪽.] 조정환이 아랍혁명의 메시아적 참여를 두고 종교의 권력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며 놀라워할 때, 그는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 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하며, 조정환이 그들의 메시아적 참여가 세속적인 삶의 존엄과 행복을 요구한 것이었다고 말할 때, 그는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철학적 과제의 중요성을, 곧 ‘행복’으로 정향된 세속적인 것의 질서와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 사이의 관계에 관한 탐구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파국과 몰락의 추구가 세계정치의 과제라고 했던 한에서, 벤야민의 한 단어 ‘지금시간’은 제헌적 파루시아의 시간이며, 발생적 힘의 시간이고, 타고 있는 재들의 떼이다. 그것은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 진리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 곁에 또 하나의 폭발을, 또 하나의 메시아적 사건을 가져다 놓자. 마르크스의 유산을 메시아적 단절과 폭발의 힘으로 상속 받으려 했던 자의 의지.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곧 그 궁극적인 사건(직접적 단절, 미증유의 폭발, 때맞지 않게 일어나는 무한한 놀라움, 완수 없는 이질성)이 노동과 생산 및 모든 역사적 목적과 같은 어떤 피지스의 최종적인 종점을 매 순간 초과할 수 있는 어떤 에스카톤eskhaton이 존재하지 않는가?(『유령들』, 88)
메시아적 임재의 매 순간은 권력적 역사, 혹은 역사적 권력의 지속과 연장을 중지시키고 단절시킨다. 파루시아의 순간은 자본주의적 노동과 생산의 목적을, 곧 이윤의 집적을 끝낸다. 이윤이라는 노모스(nomos)는 자연의 신진대사의 최종적 종점과 도달점에 자신의 표지를 각인하고 서명함으로써, 자신을 아무 거리낄 것 없는 매끄러운 자연의 군주로 만든다. 하지만 그 군주는 자신이 했던 서명과 동시에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되며 이내 균열과 교란이 뒤따른다. 서명은 서명자의 부재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명의 현전은 부재의 필연성 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파루시아의 순간은 그 군주를, 이미 소실되고 있는 그 군주를 완전히 폐하고 그 군주의 자연에 종언을 고지한다. 그것은 종말론(eschatology)의 어원이면서 ‘끝’ ‘마지막’을 뜻하는 에스카톤의 선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힘의 발생이며 돌발이다. 이 발생사적 힘은 ‘해체’의 정의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증여의 힘으로 드러난다. 해체는 “선물로부터, 곧 법과 계산, 교역을 넘어서 정의를 사고해야할 필연성”(『유령들』, 69)에 이끌린다. 선물은 목적 없는 교환, 목적 바깥으로 나가는 교환의 한 형식이다. 그것은 이윤이라는 최종목적에 따라 편성된 자연의 인위성을 혁파하는 힘을 지시한다. “선물의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 타자에 대한 비-경제적인 탈-정립ex-position의 독특성으로서의 정의”(『유령들』, 60). 선물의 증여는 이윤의 체계에 의해 집계되지 않는 초과의 시간들이다. 그것은 통념적 경제의 순환의 이음매들을 어긋나게 하고 오작동하게 한다. 그래서 비-경제적이다. 비-경제적이라는 것은 집계하고 계산하는 힘에 의해 부과된 포지션을 이탈하는 특이한 힘을 가리킨다. 해체의 정의는 일단 그런 얼굴로 드러난다.
무언가를 주는 행위는 그 줌의 행위에 언제든 연루될 수 있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위계 형성에 눈뜨고 있어야 한다. 데리다의 증여는 받은 자가 아예 받지 않은 자가 될 수 있도록 주어야함을,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줄 수 있는 방법과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계의 울타리를 초과하는 ‘일반경제’적인 증여는 억압적인 경제, 팍팍한 살림살이를 강제하는 합법들의 연쇄망을 찢는다. 해체가 말하는 타자성은 독특성을, 독특성은 지금-여기를, 지금-여기는 차이를, 차이는 타자성을 그 조건으로 한다. 타자성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조건들의 연쇄적 맞물림. 그것이 해체의 정의가 해체불가능한 구조적 원리이다. 그런 한에서 독특성 없이는 타자성이 없고, 지금-여기 없이는 독특성이 없으며, 차이 없이는 차이가 개시하는 지금-여기가 없고, 증여를 통한 타자성의 환대 없이는 차이가 없다. 기존의 사태와 시간의 통상적 진행을 내리쳐 정지시키는 억제할 수 없는 차이의 메시아적 폭력, 제헌적 힘은 바로 이런 연쇄적 맞물림을 따라 수행된다. 그 속에서 타자성의 환대에 관여하는 증여는 교환의 경제, 이윤의 자연에 선포된 에스카톤의 순간이자 파루시아의 순간이다.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을 정의의 이름으로 복원하고 수리해야만 했던, 그래서 끝내 불의의 나락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생적 운명을 저주했던 햄릿. 그의 바닥 모를 불행을 마주하면서 데리다는 운명적 저주에 맞서 처절한 고통을 무릅썼던 욥을 떠올린다. 그런 데리다 곁에서, 판단 기준의 실천적 전환이야말로 욥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했던 건 욥에 물든 이, 네그리였다.
네그리가 인용한 아퀴나스의 ‘사랑’은 늘 척도를 초과한다. ‘삶’은 늘 척도를 초과한다고 썼던 건 조정환이었다. 아퀴나스의 ‘자선(慈善)’. 그것은 신성과의 융합에 이어진 사랑의 행위이고 신의 명령에 근거하는 지고의 것이며 그런 한에서 정의와 주권의 문제에 걸린다. 자선은 창조의 힘에 참여하도록 만들기에 교환의 경제와 그것을 보존하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구조에 의해 측정되거나 계산되지 않는다. “힘이 권력에 맞설 때, 힘은 신적인 것이 된다. 힘은 삶의 원천이자, 자선의 넘침이다.”(『욥』, 145) 욥의 이야기를 메시아를 기다리는 은총과 예언의 담론으로 받아들이는 네그리에게 힘이 신적인 것이 된다는 말은 ‘견신(visione, 見神)’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이 했던 말,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네그리는 경탄하며 그 말과 합성된다. 하느님을 제 눈으로 직접 만나는 욥의 견신의 순간은 하느님이 절대적 초월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분리되는 순간이고, 그런 한에서 그것은 하느님의 죽음의 순간과 다름없다. 그 절대의 죽음 속에서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제헌하고 구성하는 신성과 구원의 힘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죽음이라는 장치’가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견신은 메시아의 죽음을 통한 주체의 재구성이며 재가 된 메시아의 탄각들 속에서 이뤄지는 주체의 활력의 급진화이다. 욥은 견신의 순간에 이어 곧바로 말한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43:6) 재 속에서의 회개는 통념적인 죄의 뉘우침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메시아적/유물론적 전회다. 네그리는 말한다.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장치는 바로 세계의 인간적 구성과 창조이다. 견신에 대한 유물론적 독해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존재론적 인간의 몰입이 지니는 창조적 계기를 포착하는 능력”(『욥』, 185)이라고. 이는 조정환이 구상하는 장치론, 다시 말해 인지적 포획장치로서의 자본에 대항하는 새로운 ‘행동인’과 새로운 ‘생명장치’의 구체적 양상이자 경로일 수 있다. 스피노자 독자로서의 조정환은 예언자들의 ‘상상력’을 다중의 상상력으로 끌어온다. 신의 법을 계시하기 위한 도구이며 그런 한에서 신의 정신과 동등한 예언자들의 상상력을 ‘누구나가 예언자일 수 있다는 의미’로 읽으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아랍혁명의 ‘누구나가 지도자일 수 있음’과 겹치는데, 다중의 상상력이 지니는 신성의 제헌적 힘이 군사장치와 의회장치라는 대의장치 일반의 구속력을 뚫고 나가는 새로운 행동인의 속성임을 암시한다.[조정환,「<신학정치론>에서의 상상력과 표상」, http://amelano.net/100102 참조.] 이런 사고 속에서 네그리가 말하는 ‘견신의 유물론적 독해’는 기왕의 법을 폐하고 다른 법을 제헌하는 힘의 계기들을, 곧 구성과 창조의 순간들을 신에의 존재론적 몰입 속에서 포착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지시한다. 그것은 공통적인 것을 공통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최근의 테제들로, 다시 말해 호헌과 제헌이 충돌하는 전장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를 재정복하기 위한 테제들로 예각화된다. “통제의 직선적 공간 속에서 사선을 긋기. 다이어그램에 사선을 대립시키기, 바둑판형에 간극을 대립시키기, 위치에 운동을 대립시키기, 정체성에 생성을 대립시키기, 단순한 자연에 무한한 문화적 다양성을 대립시키기, 기원의 참칭에 인공물을 대립시키기.”[네그리 외,「인류의 공통적인 것을 발명하기」, 다지연 불어세미나팀 옮김,『아우또노마M』7호, 2010년 3분학기, 16쪽. 이 한 대목의 인용은『인지자본주의』, 426쪽에서의 재인용이기도 하다. 인용이면서 동시에 재인용이라는 것은 인지장치를 폐지하는 네그리의 ‘사선(diagonal)’의 힘을 공통재로 어떤 인용의 연대를 상상하고 우발적인 마주침의 상태를 넘어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감옥에서 작성된『욥의 노동』서문(1988)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의 네그리가 말하는 사선(斜線)의 힘, 곧 인지장치의 알고리즘들을 향해 내리그어지는 폐절(廢絶)의 힘은 저 견신의 유물론적 힘과 함께 간다. 지금, 그 힘이 구성되는 장소를 다시 한 번 상상하게 된다. ‘발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장소일 뿐’이라고 어떤 시인은 적었다. 발생사적 장소로서의 코라(khôra)가 바로 앞에 있다.
5. 메시아적 실재주의에 관하여
자신을 치도록 명령한 신에 항거했던 욥의 고행과 고통. 그것 없이 욥의 견신은 불가능했다. 고통이 견신의 조건이다. 견신은 신에 대한 절대적 환대이다. 환대는 정의의 조건이다. 데리다는 고통과 절망 없이는, 다시 말해 장래에 장차 올 것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계산에 의해 절망의 계기들이 삭제된다면 희망은 팍팍하고 빡빡한 프로그램의 일환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약속하는 환대와 정의는 국가의 법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메시아주의와 함께 간다. 계산되고 예측될 수 없으므로 믿기 어렵고, 불안하고, 가망 없으며, 그런 한에서 약한 메시아주의와 함께.
사람들은 이러한 절대적 환대의 약속을, 지극히 불가능하고 그 빈곤함 때문에 지극히 신뢰하기 어려운 어떤 경험에, 지극히 불안하고 취약하고 황폐화된 어떤 유사 “메시아주의”에, 항상 전제되어 있는 어떤 “메시아주의”에, 유사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실체 없는 유물론―가망 없는 “메시아주의”를 위한 코라의 유물론―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어떤 메시아주의에 일임하고 싶어 할 것이다.(『유령들』, 324)
개념의 오랜 이력을 지닌 코라. 그것은 애초에 형이상의 이데아에 가시적인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이데아와 현상계를 매개하는 텅 빈 고리로 설정된 것이며, 이후 역동적인 생성의 장, 잠재성의 리듬 등으로 전용되었다. 데리다에게 코라는 차이다. 차이가 그렇듯, 코라도 새로운 시공간을 개시하며 통상적인 사태와 시간의 이음매를 탈구시키고 중단시키는 메시아적 제헌의 힘이다. 코라의 유물론과 합성하는 어떤 약한 메시아주의. 견신의 유물론이 네그리의 메시아적 유물론을 압축하는 주요 술어였듯, 코라의 유물론은 데리다의 그것을 압축한다. 코라에서 자기조직화를 통해 변모하던 사람들의 활력과 잠재성의 긍정적 발현을 보았던 건 데리다를 추모하며 강연하던 철학자 이정우였다. 그런데 데리다의 차이는 ‘기쁜 만남’으로서의 들뢰즈의 리좀과 같지 않다.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메시아적 힘으로서의 차이/코라가 무엇보다 ‘메시아적 주저’ 또는 ‘메시아적 근심’ 같은 술어들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심과 주저를 통념적인 것으로, 곧 활력의 감소와 슬픔에의 침잠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데리다에게 그 메시아적 근심과 주저는 무엇보다 더 현실주의적이며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적 주저는 어떠한 결정이나 긍정, 책임도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이것은 그것들에게 그것들의 기초 조건을 선사해 준다.”(『유령들』, 327) 앞서 제헌적 힘으로서의 카이로스의 시간은 무엇보다 위기 속에서의 결정과 선택을 함축한다고 했었다.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 주저와 도래할 것에 관한 근심은 제헌적 힘의 결정과 책임성을 반감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기초 조건을 선물한다. 메시아적 주저와 근심 위에서 제헌의 힘은 폭발한다. 데리다는 차이/코라의 제헌적 힘을, 스스로가 메시아적 극단성이라고 했었던 어떤 극한까지 실험하고 밀고나가면서도 동시에 그 메시아적 힘이 극한의 한계에 이르러 어떻게 파쇄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 한계 지점에서 어떻게 질적이고 전면적인 전환의 계기들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재정의하고 재설계하려 한다. 기존의 법을 폐하고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메시아적 힘은 절대적이지만, 그것은 예측불가능하기에 쉬 믿을 수 없고 불안하며 가망 없는 약함 속에서만 절대적이다. 어떤 약한 메시아적 힘.
데리다는 공간과 시간의 가상화를 촉진하고 있는 원격기술의 발달이 현존과 그것의 표상을, 실시간과 지연된 시간을, 현실과 그 모상을 분리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원격기술에 의해 우리 시대가 탈장소화(dis-location)되고 있고, 거기가 메시아적인 것이 진동하는 장소이며, 그런 사실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다른 가능성을, 이른바 ‘도래할 민주주의’에 관한 사고를 강제한다고 쓴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생산에의 응용을, 그런 응용의 현대적 판본으로서의 자본의 인지화를, 다중의 대장정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서의 메트로폴리스를 하나로 꿰어 사고하고 있는 데리다의 방식이다. 시공간의 가상화와 탈장소화는 인지자본의 공장인 메트로폴리스의 일반적 특질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장차 올 것으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에 관해 사고하도록 한다. 탈장소화되고 인지화되고 있는 메트로폴리스를 재정복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네그리의 입장이기도 했다. 욥의 견신이 욥의 고통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네그리는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적 유물론의 힘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힘potenza은 고통 가운데서 만들어진다. 그 힘은 비-존재의 힘이자, 공동체의 힘이다. 힘은 이런 경로를 따라 주어지는 이행의 시간이자, 존재론적 변형의 시간이다. (…) 힘과 고통은 삶의 상보적 차원들이다. 이런 이유로, 힘과 고통은 공동체와 구원에로의 길을 연다.”(『욥』, 172) 햄릿의 고난에서 시작된 코라의 유물론과 욥의 비참에서 시작된 견신의 유물론은 도래할 것의 예측 불가능함에 따른 불안과 고통, 거듭된 좌초와 실패를 공통의 지반으로 삼고 있다. 네그리에게 힘은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다. 고통과 힘은 함께 증폭하고 함께 가중된다. 힘과 고통의 상호추동적인 공정을 통해 주체의 변신은 시작된다. 그 공정을 수행하는 이들은 비-존재이며, 그런 한에서 경계 위에서의 삶이며, 유령들이다. 그 공정은 구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주체구성의 공정으로서의 파루시아. 그 임재의 시간 속에 코라와 욥은 함께 있다. 욥이라는 코라, 코라의 욥. 이렇게 썼지만 욥은 코라를, 코라는 욥을 부정했다. 무슨 말인가.
네그리는『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변화하는 존재론적 요소를 포착하고서도 초월론적인 연속체의 시간 속에 매몰됨으로써 결국 존재론적 발견을 부적합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존재론을 무효로 만든 변화를 인정하고서도 왜 존재론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지를 따져 물으면서, 네그리의 존재론이 모든 것을 거대한 질서 속으로 집어넣을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고 재비판한다.[데리다, 네그리 외,『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중 네그리「유령의 미소」, 34쪽, 데리다「마르크스의 아들들」, 234쪽 참조.] 나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코라의 유물론이 개시한 시간은 초월론적 연속체를 보증함으로써 존재론적 변신의 계기와 요소를 부당하게 폐기했던가. 과연 견신의 유물론은 모든 것을 억압의 질서 안으로 유폐하는 거대한 존재론적 감옥에 불과했던가. 욥과 햄릿의 이 대결은 홈 패인 입장의 재생산이므로 생산적이지 않다. 이 대결은 단지 결렬의 확인일 뿐이므로,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김이 좀 빠지는 대결이다. 비판이 선물이 되고 자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들의 결렬 앞으로 또는 그들의 주소 앞으로 배송될(혹은 수취인불명으로 반송될, 하지만 반송될 땐 이미 받을 주소가 변경되었을) 나의 선물은 이런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 기왕의 제정권력을 내리치며 종언을 선포하는 제헌의 힘에 관해 조정환은 이렇게 쓴다. “제헌하는 능력의 운동형식은 제정된 권력의 운동형식과는 다르다. 제정권력에게 승리와 패배는 뚜렷한 경계를 갖지만 제헌권력에게 그 양자는 서로 뒤섞이며 때로는 상승작용한다.”[조정환,『공통도시』, 갈무리, 2010, 26쪽.] 이는 광주라는 도시 속에서 구성되었던 제헌권력에 대한 분석 중 한 대목이다. 내게 차이와 견신은 메시아적 제헌권력을 공통의 토양으로 서로 연합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제정권력과는 달리 승리와 패배의 선명한 구획을 동력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승리와 패배의 시간들은 뒤섞이며 서로를 강화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난국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동시에 혼재하는 시간, 가능한 이유와 불가능한 이유가 동일해지는 시간. 그 곤혹스런 난국의 시간이 메시아적 제헌권력의 동력이다. 조정환의 한 대목은 대립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신을 최대치로 밀어붙여갈 때 어떻게 적대적인 다른 하나와 긴밀하게 관계 맺게 되는지에 대해, 곧 해체적 오염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한에서 조정환의 문장은 데리다적이다. 네그리와 맞서고 있는 데리다는 데리다적이지 않다. 이는 다시 한 번 조정환의 자리에 관해 사고하게 한다. 앞서 조정환은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긴장으로서의 실재적인 것(the real) 안에 있다고 했다. 풀어 말해, 현실성으로 드러나는 삶시간의 순간적 완성과 장차 올 것/도래할 것으로서의 잠재성 사이의 긴장 속에 조정환은 있다. 현재성이 메시아적 잠재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끌리는 과정에서 조정환의 자리와 좌표는 늘 구축과 재구축, 설정과 재설정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생산한다고 했다. 조정환은 실재주의(real-ism)에 관해, 정확하게는 메시아적 실재주의에 관해 사고하도록 한다. 그 개념이 최고도로 추상된 채로 드러나고 있는 한 대목. “‘발생적 역사’ 속에서 사고할 때 우리는 근대 속에서 그것을 규정하고 근대와의 대항을 통해 근대를 밀어붙이며 궁극적으로는 근대의 시간을 넘어서 나아가는 탈근대성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조정환,「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상허학보』19집, 2007, 161쪽.] 말을 바꿔, 제국이라는 현실성과 다중이라는 잠재성 사이. 그 사이에서의 긴장 속에서 도래하고 있는 메시아적 제헌권력으로서의 다중에 의해 제국의 조종이 울려 퍼진다. 제국의 시간 너머는 다시 또 하나의 현실성으로 되며, 그 속에서 그것을 규정하고 그것과 싸우면서 그 너머로 나아가는 메시아적 잠재력은 다시 또 도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 힘은 매번 그렇게 도래할 뿐이지 결코 도래의 완료나 완성이 아니다. 누차에 걸쳐 도래할 뿐인, 그래서 늘 아직 오지 않은 미-래(未-來)의 시간이 메시아적 힘의 자리다. 내겐 그것이 발생사이며, 발생사의 주름이다. 발생사는 잔여와 잉여를 남긴 채로 메시아적 실재주의로 거듭 번역될 수 있는 잠재적 힘의 지속 시간이다. ‘삶’이라는 접두사를 붙인 카이로스의 비평, 조정환의 삶비평은 바로 그 메시아적 실재주의 안에서 그것과 싸우며 그 싸움을 통해 그것을 밀어붙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 너머로 전진하며 이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