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9.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여름호에 실릴 글 하나를 앞질러 옮겨 놓는다. 여러모로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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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적인 것과 메시아적인 것

 

   가치는 메시아를 통해 노동으로 복귀한다네그리

 

 

1.이라는 접두사

 

낯익은 말, 낯익다 못해 낡고 닳은 말, 그래서 낮아진 말. 낮아졌으므로 모든 것이 흘러드는 말, “(life)”. 을 위한 비평이란 무엇일까. 과 함께하는 문학의 속성은 어떤 것일까. 모두가 나름으로 답할 수 있는 이 물음들은 그러므로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읽고 썼던 것들의 내력과 이력에, 굴곡과 곡절에 뿌리내린 각자의 테제들이다. 이 글은 그 중 하나에 관한 것이다. 조정환, 그의 테제. 삶활력, 삶정치, 삶권력, 삶시간, 삶언어, 삶문화, 삶문학, 삶예술, 삶미학 등에서 드러나는 이라는 접두사의 힘과 의지, 그것의 방향과 향배. 조정환에게 비평가는 예술가로 변신해가는 이행의 길 위에 있는 자다. 예술가로서의 비평가는 지구적 주권과 변환하는 자본에 맞서 특이한 욕망들과 힘들을 표현함으로써 내전을 치르고 있는 투사이다. 그는 다른 그래서 새로운 을 돌출시키고 개시하고 표현하려는 이들, 곧 삶예술가들 중 하나이며 그들의 반려이자 우정 어린 친구이다. 조정환에게, 연합하고 공통화된 예술가들인 그들 비평가들의 창조적 내전 수행은 플럭서스 예술운동의 재정의이며 그것의 전진이었다. 비평은 을 싸그리 포획하는 폭식의 삶권력(pouvoir)에 맞선 투쟁의 예술이며 예술의 투쟁이고 그런 한에서 그것은 을 위한 해방의 정치, 줄여 말해 삶정치에 다름 아니다. 조정환이 말하는 비평은 삶정치적 활력(puissance)의 지속 시간을 표현하고 예술화한다. 그것은 범람하고 초과한다. 분과와 경계를 넘어간다.

 

은 활력의 다른 말이다. 활력은 분산하고 이탈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능력이다. 이 삶활력을 어떻게 증대시키는가 혹은 어떻게 봉쇄하는가가 조정환의 문학비평이 삶정치적 비평으로 드러나는 순간과 맥락을 집약하고 있다. 조정환은 말한다. 개념과 용어를 둘러싼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라는 개념이 그 적나라한 예다. ‘을 둘러싼 문학의 투쟁에서 조정환의 입장은 이른바 리얼리즘 에피스테메를 끝장내려는 의지를 따라, 그것에 조종을 울리며 죽음을 선포하려는 힘을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어떤 장관을 연출했지만, 반향 없이 묵살되었다. 왜 그는 비평가 백낙청과 황종연을 전면적으로 기각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비평이 을 억제하고 활력을 제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말하는 의 문제에서 그들 사이의 첨예한 입장차가 미세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렌스는 백낙청의 근간 중 하나다. 리얼리즘의 수세를 공세로 역전시키기 위한 백낙청의 전장이 바로 로렌스였다. 고흐와 세잔의 그림 앞에 섰던 로렌스. 해바라기와 사과는 여러 존재자로서의 해바라기와 사과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열림이라는 것. 로렌스는 자기 자신과 존재로서의 해바라기 사이의 생생한 관계를 시간 속의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고 또 성취한다.’라고 썼다. 백낙청은 그런 로렌스의 또 다른 한 문장에 주목한다. ‘세잔 자신이 원한 것은 다름 아닌 재현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근간으로서의 재현은 로렌스 재현론의 전유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자신이 말하는 재현이라는 것이 삶에 더 충실하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못 박음으로써, 조정환에 따르면, “재현의 위상을 삶의 지평으로 가져간다.”[조정환,카이로스의 문학, 갈무리, 2006, 57. 이하카이로스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조정환은 백낙청이 로렌스의 다음 문장, ‘[세잔]는 현실[life]에 충실한 재현을 실제로 원했다. 다만 그것이 현실[life]에 더욱 충실하기를[more true-to-life] 원했을 뿐이다.’에 들어 있는 ‘life’이 아니라 현실로 번역함으로써 로렌스 고유의 개념을 리얼리즘론의 재현을 보증하는 것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한다. 조정환은 (life)’현실로 번역한 것이 백낙청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리얼리즘론의 구축과 재구축을 위한 의식적 조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문 밖으로 뺀 각주 속에서 조정환이 백낙청을 기각하는 이유와 근거를, 달리 말해 그 두 비평가의 확연한 분기를 다시 한 번 확인케 된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인용 ‘Ce'zanne was a realist, and he wanted to be true to life’에서도 ‘life’현실로 새겨 세잔은 리얼리스트였고 현실에 충실하게 그리기를 원했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바꿔치기는 부주의의 산물이기보다 의식적인 조작으로 보인다. 이 조작을 통해서 현실 재현을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로렌스의 개념과 삶에의 충실성으로서의 재현개념이 리얼리즘론을 뒷받침하기에 적절한 현실현실 재현의 개념으로 둔갑하는 것이다.(카이로스, 57)

 

내게 위의 문장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백낙청을 향한 조정환의 투쟁의 줄기찬 지속으로 다가온다. 1980년대 후반 조정환은 당대의 문학판을 부르주아 문학의 경향적 우세로 추상하면서 노동해방의 기관차로 90년대를 민중의 시대로 만들어 가야한다고 처방했다. 월간노동해방문학(1989)에 실린 노동자 전위조정환의민족문학주체논쟁의 종식과 노동해방문학운동의 출발점은 당시 문학 담론의 주류였던 백낙청 민족문학론의 민족주의적 우편향을 비판하는 글이었다.[조정환,노동해방문학의 논리, 노동문학사, 1990, 47~87쪽 참조.] 이 글이 흘러간 옛일의 회고담이 아니라, 1990년대 중반 네그리/가타리의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번역함으로써 이뤄진 자율주의로의 전회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 달리 말해 1980년대 후반의 백낙청 비판이 다시 다르게 단절, 반복, 전변되고 있음을 위의 한 대목은 오롯이 보여준다(이는 백낙청이 제안한 거버넌스론, 이른바 창비 거버넌스론을 다중의 거버넌스로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떤 비평의 궤적에서 한 결로 된 오랜 시간의 지속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비평은 존엄하다. 문제는 언제나 주체의 이었다. 잠재적 활력으로 충만한 의 관점, 그것이 조정환의 입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의 충실성이라는 로렌스의 관점과 공통된다. ‘을 현실로, ‘삶에의 충실을 현실 재현에의 충실로 번역/전유한 백낙청의 관점을 기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은 활력의 다른 말이고, 활력은 늘 잠재성의 표현과 합성된 말이다. 백낙청에 대한 조정환의 결론. “백낙청은 재현이 현실 재현을 넘어서야 함을 주목했지만 현실을 넘어서는 잠재의 평면과, 현실과 잠재를 포괄하는 전체의 열림인 역동적 표현의 차원[, ‘의 관점]을 보지 못했다.”(카이로스, 66) 이 결론 혹은 선고의 근거로 조정환은 작가 신경숙의 외딴 방에 대한 백낙청의 평가를 든다.외딴 방이 스러지고 잊혀져간 노동자들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리고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했으며 우리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부여하는 엄청난 일을 했다는 백낙청의 평가에 대해, 조정환은 신경숙의 동일한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작가는 결코 작가 바깥에 있는 그들 노동자들을 대상화해 위엄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의 위엄과 활력은 작가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마저도 포함되어 있는 그들 속에 항상-이미 잠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 그런 그들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작가는 꾸민 이야기의 재현을 통해 그들의 삶활력과 위엄을 재생산하고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민중의 창조 작업에 다름없다는 것을 말한다. 재현을 넘어서는 이른바 되기의 연쇄. 창조자-되기, 친구-되기, 줄여 말해 공통-되기의 창조적 실천 혹은 창조적 내전의 수행.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외딴 방에 호남 사람이 당하는 서울에서의 차별과 노동자들의 생활 속에 흔히 있을법한 상스런 모습들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백낙청의 평가는 잠재적(virtual) 활력과는 아무런 긴장 관계를 맺지 못한 사실성 혹은 현실성(actual)에 매몰된 채로 기존의 리얼리즘적 재현이라는 척도를 뒷문으로 다시 도입하고 있는 예증이 된다. 그때 은 억제된다.

 

백낙청이 삶에의 충실성이라는 로렌스의 관점을 현실 재현에의 충실성으로 전유했었다면, 백낙청에 대한 비판을 조정환과는 다르게 수행했었던 황종연에게는 개인에의 충실성이 중요했다. 조정환은 백낙청과 황종연의 관계를 두고 민족문학의 편집증적 코드와 대립하는 일종의 분열증적 코드”(카이로스, 35)라고 평한다. 황종연이 강조하는 진정성은 개인의 자아, 감정, 신념에 일치하는 진실된 삶을 살려는 의지이자 파토스이다. 이와 같은 진정성에 대한 강조는 연대하고 연합하는 삶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언제든 틈입하고 들러붙을 수 있는 파시즘의 유령성을 회피하고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민족에의 충실성, 민중에의 충실성, 계급에의 충실성, 당에의 충실성이 아니라 개인의 진정성에의 충실성은 그러나 모든 사회 윤리들을 규제하는 척도로 기능함으로써 민족, 민중, 계급 같은 동일성을 강제하는 시스템에 갇혀 있었던 자아를 자유의 이름 아래 카오스 상태로 방치하게 된다. 백낙청을 비판했던 황종연은 백낙청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로렌스적 삶에의 충실성을 폐기하거나 포기한다.

 

이렇게 하여 진정성이 로렌스적 의미의 삶에의 충실성으로 발전될 가능성은 차단된다. 1990년에 부상한 사회적 주체성의 새로운 덕성은 개인이라는 형틀에 따라 낱낱이 부서지고 파편화된다. 특이함(singularity)의 이름일 수 있는 진정성을 개인성(individuality)에 종속시킴으로써 진정성들의 공통성을 구축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된다.(카이로스, 38)

 

조정환에게 문제는 언제나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었다. 그에 따르면 황종연은 사회적 정상성의 영역에서 일탈하고 이탈하는 비루한 것들의 축제를 권력에 의해 허용된 일시적 균열과 난동으로 규정했고, 그것의 낭만적 미화를 거절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성과 진정성의 밀도를 의 척도로 설정했다. 조정환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인성에의 충실과 그것의 미학적 표현으로서의 진정성이라는 황종연의 두 기둥이 민중, 민족, 계급 같은 동일성에의 충실성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여러 동일성들에 개인의 진정성에의 충실이라는 또 하나의 동일성을 대립시키고 대치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일성들은 정치적으로는 대의를 미학적으로는 재현을, 달리 말해 리얼리즘의 주조음을 그 배면에 깔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예리하게 비판했었던 황종연이 개인의 진정성이라는 또 다른 동일성을 다른 동일성들에 단지 대치시키는 선에서 멈추고 말 때 그의 비평은 자신의 적들과 적대함으로써 공모하게 되며, 그렇게 적을 환대하게 될 때 동일성들의 연쇄적 자리바꿈은, 동일성들의 순번에 따른 주도권 나눠먹기는, 동일성들의 변증법적 합종과 연횡은, 줄여 말해 리얼리즘 에피스테메는 끝내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되뇌어야 하는 것은 저 로렌스/들뢰즈적 의 의미, 그것에의 충실성이다. 특이한 진정성들의 공통-되기, 그 창조적 내전의 실천인 것이다.

 

로렌스/조정환은 말한다. ‘의 관점이란 주체와 세계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시간의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고 또 성취하는 것이라고. 시간의 살아 있는 순간. 이 한 구절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로렌스가 말하는 살아 있는 의 시간, 삶시간, 그 잠재적 활력의 시간이야말로 조정환의 삶문학이 운행하는 터전이며 태반이기 때문이다. 삶문학은 삶시간의 지속을 위한 문학이며, 그런 한에서 시간의 화살을 뜻하는 카이로스의 문학이다. “그리스어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의 길이, 시간의 충족, 측정된 시간을 뜻함에 반해 카이로스(kairòs)는 시간의 순간, 시간의 도착, 사건 속의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위기 속에서의 선택과 결정을 함축한다.”(카이로스, 16) 크로노스는 축적하기 위해 분할한 시간이며, 분할하기 위해 측량가능하고 계산가능하게 변성된 시간이고, 산업자본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던 때의 시간이다. 그것은 재현의 시간, 착취의 시간, 소외의 시간, 죽음의 시간의 다른 말이다. 이와는 달리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시스템을 내리치는 파국의 시간이며, 파국과 신생의 동시적 사건이자 그것의 도래의 시간이다. ‘이라는 접두사들의 이행과 변이로 드러나고 있는 조정환의 활력의 비평은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이뤄진 의지적 결단들과 함께 숨 쉬며 그것들에 틈입하고 있다. 그 위기와 틈입의 시간 속에 각인된 결단의 순간들을 폭발 직전의 시간 속에서 다르게 지속하는 것. 그것이 수행해야할 남은 과제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간에 관한 비평으로, 카이로스를 위한 비평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는 것은 리얼리즘 에피스테메에 대한 비판의 근거였던 의 관점 곧 카이로스의 시간을 통해 산업자본주의에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다시 다르게 비판한다는 뜻이다. 이를 조정환의 조어법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에 대한 비판으로 압축된다.

 

2. 포섭을 찢는 카이로스

 

산업자본주의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공장에서의 노동시간 덕분이다. 공장에서 노동시간은 둘로 나뉜다. 임금을 지불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과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는 잉여노동시간. 시간을 그렇게 길이와 양으로 분리하는 것은 법과 권력의 척도적 힘의 비호와 보증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분리는 법이 숨은 채로 드러나는 한 방식이다. 길이와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시간의 시스템으로 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 산업자본주의의 포섭 전략이었다. , 형식적 포섭. 이는 시간이 공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훈육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시간의 공간화의 밑바탕에는 계산 가능한 시간에 근거해 가치를 산출하는 가치법칙과 위계화하고 구획하는 법에 근거한 권력법칙의 짜임이 있다. 이 짜임의 밀도와 강도와 속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시간이 그만큼 압축된다는 걸 뜻한다.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표상되는 경제적 기계화의 기술인 테일러주의 포드주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인 사회(민주)주의 케인즈주의와 결합하여 노동하는 시간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더 많은 잉여노동시간을 창출한다. , 실제적 포섭. 과학기술을 생산에 응용한 자본은 시간의 압축을 통한 착취의 성취를 공장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넘어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확장하려는 경향에 이끌린다. 공장 바깥에서 이뤄졌던, 그래서 전통적 가치법칙으로는 계산되지 않았던 협력적 의 여러 양상들인 가사, 보육, 치료, 연구, 교육, 놀이, 관광, 연예, 정보, 통신, 안전, 보험, 금융 등과 같은, 돌보고 나누고 아끼고 소통하고 인식하고 즐기는 직접적인 삶활력들을 비물질노동의 형태로 포섭하려는 것이다.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에 이어진 오늘날의 자본은 공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몸과 땀에만 눈독 들이는 것도 아니며, 노동자 없이 홀로 돌아가고 있는 자동화된 기계에만 군침 흘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지자본은 느낌과 표현을, 그것의 공감과 공유를, 감각과 인식과 판단과 의지에 의한 인지적 생명활동 전반을, 줄여 말해 그 자체를 겨냥한다. , 가상실효적 포섭(virtual subsumption).

 

공장에서 기계들이 그 스스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도 사실상 그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사회 전체이며, 모든 개인들이 통상적인 생산의 현장에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자신들을 연결접속하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접합접속함으로써 그것을 공리화하는 사회체에 결합되어 있는 한, 연구하거나 소통하거나 봉사하거나 혹은 소비하는 삶의 모든 과정들에서 그들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 기능한다. 이제 사회적 노동자가 가상실효적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다.[조정환,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5, 48.]

 

조정환의 가상실효적 포섭은 네그리의 총체적 포섭을 갱신하고 전진시킨 개념으로, 시간의 실제적 포섭이 사회체 전체에, 생명 전체에 전면적으로 관철되고 완성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것은, 지각, 정서, 지성, 상상의 힘이자 무엇보다도 행동의 힘인 을 포섭한다.”[조정환,인지자본주의, 갈무리, 2011, 285. 이하인지자본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조정환이 말하는 은 행동과 행위의 힘이자 능력이다. 그것은 구성능력/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과 겹친다. 그것은 삶활력/삶정치의 다른 말이며 이라는 접두사의 속엣말이다. ‘은 삶권력을 전복하는 힘이다. 풀어 말해 기존의 법이 부여하는 틀 안에서 힘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법을 보강하고 증대시키는 법들을 발의하고 입법하는 제정권력(pouvoir constitué)을 끝장내는 힘, 새로운 법과 다른 삶의 규준을 창출하는 힘이다. 인지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제헌적 활력은 노동시간에서 차지하는 잉여노동시간의 비중을 줄여 노동의 힘을 신장시키고 그 힘의 헤게모니를 확장시키려는 투쟁에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는다. 길이와 양으로 분할 가능한 공장에서의 노동시간 바깥에서 이뤄지는 비물질적 생산활동의 경향적 리드에 의해 전통적 가치법칙의 에피스테메가 교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조정환의 삶문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삶정치학은 합류한다.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의 교란은 문학에서의 리얼리즘 에피스테메의 교란 및 붕괴와 동시적이며, 한 배를 타고 함께 간다. 어디로 가는가. 그것의 끝으로, 죽음으로.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분할이 쉽지 않은 비물질적 생산이 역사적으로나 본성적으로 자본주의에 포획되기 어렵다고 했던 건 노트를 쓰고 있던 마르크스였다. 가치법칙의 붕괴가 의 해방과 새로운 사회의 조건이라고 했던 건 요강을 쓰던 마르크스였다. 자본은 가치법칙에 근거한 기존의 축적 전략으로는 쉬 관리하고 축적할 수 없는 힘들, 곧 자본의 축적의 한계를 초과해 접속하고 소통하는 비물질적 생산의 힘들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의 유연화로 자신의 숨통을 틔우고, 자신의 금융화로 명령으로서의 비물질적 화폐의 힘을 강화하며, 기술을 에테르화함으로써 공통의 소통과 공감을 상품화하고, 핵을 통한 공포의 감정적 전염과 확산을 통해 자신을 군사적이고 심리적으로 옹립한다.[소통의 상품화에 관한 적나라한 예, 다시 말해 오늘날의 생산 전반에 경향적 파급력을 미치고 있는 예로는 오늘날의 공장으로서의 SNS 같은 사회연결망서비스, 구글 같은 통합검색엔진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다중들의 흩어진 생각들, 느낌들, 활동들, 곧 인지적인 것들을 집중시키기 위한 알고리즘을 제작하고, 이어 그것을 지적재산권 특허권에 근거해 독점함으로써 착취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인지적인 것들로 이뤄진 광대하고 무한한 인지토지를 구축하고 그 토지의 독점을 통해 소통의 잉여가치’ ‘관계의 잉여가치’ ‘네트워크의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토지의 독점을 통한 이윤을 지대라고 한다. 인지토지의 독점을 통한 인지자본의 이윤은 지대로 전변하고 있다. 점자 사라져 가던 지대 개념이 오늘 그렇게 되살아나고 있다. 네그리/조정환이 지대에 대항하는 절대민주주의라는 테제를 내세우는 의지와 맥락이 그와 같다. 안토니오 네그리,지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조정환 옮김,아우또노마M7, 20103분학기, 17~22쪽 참조.] 인지자본의 이와 같은 사활을 건 삶권력적 축적의 전략은 경계를 넘어 흘러넘치고 있는 인지화되고 공통화된 생산적 힘들, 곧 공통적인 것의 활력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공통적인 것은 때들의 생산물이며 새로운 때들이 생성되는 터전인 집단적 이다.”(인지자본, 521) 앞서 은 제헌권력과 삶정치의 다른 말이라고 했다. 공통적인 것은 그런 삶정치적 활력이 생산한 새로운 때들’, 바로 저 카이로스의 시간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들을 생성시키는 터전이자 토양이다. 카이로스는 쏘아진 영원성의 화살이고, ‘영원은 잠재적 활력의 저수지이며, ‘란 영원의 한 동적 단면이다. 그런 때들의 공통적인 힘은 집계하고 집적하는 시스템의 크로노스적 시간을 내리치고 절단하는 단절들’ ‘틈들의 힘이다. 다중이 가진 힘이 바로 그것이다. “다중은 시간의 화살들, ‘때들이며 그 때들이다.”(인지자본, 289) 공통적인 것, 혹은 때들의 코뮨으로서의 다중은 잠재적인 것 속에서 생성되는 구성의 힘이자 제헌의 힘이며, 카이로스적 파국의 힘이다. 그 힘은 메시아적이다. 무슨 말인가. 튀니지에서 촉발된 아랍혁명이라는 일례, 또는 일즉다(一卽多)의 사례.

 

폭력을 오직 방어에만 제한하는 운동의 반폭력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이 운동에 높은 윤리성을 부여하면서 운동참여자들을 자유의 카라반(caraban)’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 카라반의 정동적 움직임이 메시아적 참여의지를 불러일으키면서 중심지도부 혹은 명확한 지도강령의 부재라는 조건 하에서도 운동을 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아랍혁명의 새로움이자 특징이며 21세기 혁명의 진화방향 중의 하나를 제시한다.[조정환,아랍혁명, 존엄의 카라반, 그리고 다중의 전지구적 대장정,오늘의문예비평81, 2011년 여름, 169.]

 

튀니지와 이집트의 다중들은 각종 총기류, 탱크, 전투기, 국영방송, 감옥 등으로 표상되는 지배집단의 압도적인 치안기계들을 상대로 화염병, 몽둥이, 부엌칼로 대응하면서, 수적 우세 속에서 SNS를 통한 소통과 협력, 함성, 긍지, 분노, 사랑의 키스와 꽃 같은 정동적인 무기로 응전했다. 그들의 잠재적이고 공통적인 활력은 지배집단의 곪은 신체를 파열하고 새로운 신체의 법을 구성하는 제헌적 살(chair), ‘공통의 살들이었고, 그 살은 쏘아진 카이로스의 살[]이었다. 그들은 제헌의 새살을 돋게 하는 질()의 연합, 질들의 공통체였다. 그 공통되기의 과정 속에서 공통적인 것은 메시아적인 것과 동시적이며, 한 배를 타고 함께 간다. 어디로 가는가. “삶 내재적 코뮤니즘의 시간으로”(인지자본, 294) 간다. 크로노스적 통합의 시간에 파국의 빗장을 내리지르고, 삶권력적 관리의 시간의 이음매를 거듭 탈구시키며 기쁘게 간다. 그것은 주권적 제정권력의 폭력을 정지시키는 메시아적 힘의 시간에 다름 아니다. “존재론적 네트워크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 없는 과정도 아니다. 심연의 경험이 야기한 심오함과 존재론적 몰입은 이번에는 신성에 대한 경험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비상사태를 통해 주체 구성으로 전화한다.”[네그리,욥의 노동, 박영기 옮김, 논밭출판사, 2011, 185. 이하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이 문장은 벤야민의 것이 아니라 네그리의 것이다. 그것은 네그리의 존재론, 정확히 말해 어떤 메시아적 존재론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존재론적 네트워크로서의 다중에 내장된 진정한 주권의 힘을 메시아적 경험에의 몰입을 거쳐 전화한 신성의 주체성에서 확증하고 있다(그리고 이는 네그리의 관점의 진화 속에서도 폐기되거나 포기되지 않는 어떤 주조저음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아랍혁명의 특이성에 관한 조정환의 문장들은 네그리가 말하는 비상사태의 선포, 바로 그 메시아적 경험과 몰입에 이은 주체재구성의 조건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셈인데, 지도부의 부재 혹은 위로부터 부과된 강령의 부재가 그것이다. 지배집단의 시선에서 중심적인 지도자와 조직이 없다는 것은 약함의 증거로 읽혔겠지만, 이미 그 약함은 메시아적 참여라는 절대적 힘의 근거였다. 약함의 메시아적 잠재성. 그러므로 지도자의 부재는 힘의 부재가 아니었는데,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공통의 순간들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조정환이 말하는 각자의 지도자 되기’ ‘순교자 되기의 시간은 제국의 3항 고리를 향해 날아가는 메시아적 시간의 카이로스에 다름 아니다. 그는 새살로 된 화살로서의 그들 다중에게서, 권리의 어떠한 양도도 없이 스스로 독재자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지도력의 빅뱅, 제국을 붕괴시킬 잠재성의 영토를 확인하고 그것의 지속을 기대한다. 이 기대는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 “그때그때의 삶시간의 완성과 장차 올 것의 열림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의 관점”(카이로스, 90). 조정환은 어디에 있는가. 두 개의 카이로스, 두 개의 시간 사이에 있다. 하나는 잠재력의 촉발들이 지속되는 삶시간의 순간적 완성이라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와 버린 것이 아니라 늘 장차 올 것으로서 도래하고 있는 메시아적 시간이다. 그 두 시간 사이에, 그 열림 안에 조정환은 있다. 두 시간의 열린 사이에서 그는 무얼 하는가. 두 가지 동시적인 과업을, 그래서 궁극에는 하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하나는 그가 늘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긴장 속에서 뒤의 시간이 앞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이끌게 함으로써 이미 구축된 자신의 자리를 허물고 다시 구축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쉬지 않는 이론적 분투와 유물론적 변신의 힘이 바로 그 사이의 열림에서 나온다. 언젠가 그는 시인 박영근을 읽으면서 실재적인 것(the real)을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실적인 것(the actual) 사이의 열린 긴장 속에서 탐구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런 한에서, 내게 그는 리얼리스트(real-ist). 리얼리즘 에피스테메와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의 강고한 결합을 폐()하기 위해 사선을 내리긋는 리얼리스트, 메시아적 실재주의자. 이 개념을 더 단련해야할 필요, 이 개념으로 더 수련해야 할 필요. 이 두 개의 필요와 마주한다.

 

3. 발생사와 메시아적 힘

 

민중은 메시아인가와 같은 민중신학의 급진적인 연혁과 주름을 가진 물음이 세속의 억압을 뚫고 나가는 힘으로서의 신학에 방점을 좀 더 세게 찍은 것이라면, 이 글이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은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 안에서 그것과 대항해 싸우며 그것의 너머로 넘어가는 초과와 이탈의 잠재적 활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양상 혹은 그 힘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것은 유물론적 변신으로 이어지는 주체구성의 경로와 방법의 탐구에 방점이 찍혀 있다. 메시아적인 것은 인지자본으로의 변형을 강제했던 인지노동의 생산력과 함께 간다. 그것은 인지적 소통의 증대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중의 공통되기의 잠재력과 접맥된 채로, 신성에의 몰입과 관계 맺고 있는 유물론적 비판의 의지, 지성, 미감 같은 메시아적 정동(affect)에 관한 탐구이다. 유일한 문제는 정동되는 능력이며 정동은 힘의 실행이라고 했던 건 들뢰즈였다. 정동이라는 기초 위에서 적은 파괴되어야 하지만 정동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고 했던 건 네그리였다. “메시아운동은 정상적인 사회적 사실이다. 특정 유형의 사회에 특유한 그 운동은 그 사회에 내재하는 논리로부터 나온다.”[페레이라 데 케이로즈,세계의 메시아운동메시아운동의 사회학, 이상률 옮김, 청아출판사, 1992, 33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회의 내재적 논리란 무엇이고 어떻게 운동하는가라는 질문이며, 그 질문이 놓인 배치의 전환과 이행의 수준이다.

 

인지자본주의의 가치법칙 비판에 대한 문제제기로 제출된마르크스주의 연구(2012년 봄호)의 몇몇 글들에 관해 말함으로써 더 나아가자. 그들의 비판, 곧 그들의 가치법칙 옹립론은제국을 둘러싼 논쟁의 차이 없는 반복이며, 그러므로 죽은 비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 죽은 비판은, 제국주의와 제국, 마르크스의 명제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 마르크스의 설명과 마르크스의 변화’,자본』과요강, 가치형태에 관한 규명적 인식론과 노동과정에 관한 주체 구성적 존재론’, 현실성과 잠재성 등등의 구도 속에서 앞의 것들에 매몰된 결과이며, 그렇게 매장된 터널 속에서 뒤의 것들을 바라보는 인지협착(tunnel vision)의 결과이다. 가치법칙에 관한 비판이인지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은 맞지만인지자본주의의 총체적 표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터널 속에서, 계급구성, 주권합성, 시간, 공간, 메트로폴리스, 지성, 정치적인 것, 윤리적인 것(그들은 왜 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다.) 등 가치법칙 비판과 관계 맺는 다양한 흐름들을, 그 흐름들 간의 대리보충하는 관계를, 가치법칙 비판이라는 단일한 목표에 따라 일괄적으로 차렷하지 않는 그 흐름들 각각의 고유성을 가치법칙 안으로 환원하고 회수하고 감금한다. 그들은 가치법칙으로 그 흐름들 모두를 대표하고 재현하고 대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정통도 전통도 아니다. 그것은 도그마이며 그런 한에서 폭력적이다. 앞서 가치법칙 에피스테메라고 했던 건 바로 그 도그마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환의 좌표는 위에 나열한 구도들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그 실재(the real) 속에서 뒤의 것들에 의해 이끌리며 거듭 수정되고 있다. 내게 그 수정은 차이를 생산하는 수정, 차이의 수정이다. 차이가 실재를 전진시킨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유산을 사산시키지 않는 방법이자 태도이다. 다중(multitude)은 바로 그런 태도(attitude)이며, 그런 태도에의 동참과 참여에 대한 호소이자 요청이며 서약이자 촉구이다.

 

자리의 구축과 재구축, 좌표의 설정과 재설정의 반복 속에서 차이가 생산되고 그 차이가 실재를 전진시킨다고 썼는데, 그때 그 차이란 마르크스의 유산에 관해 말하고 있는 데리다의 차이(différance, )’. 차이는 어떤 시간과 공간을 개시한다. “억제할 수 없는 차이 안에서 지금-여기가 펼쳐진다.”[자크 데리다,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76. 이하유령들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어떤 시공간이 어떻게 열리는가. “법 이전의, 의미 이전의 법의 폭력, 시간을 중지시키고, 탈구시키고, 이음매에서 빠지게 만들고, 자연적인 거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폭력, 이음매가 어긋나out of joint’ 있음.”(유령들, 76) 차이는 무엇보다 폭력인데, 기존의 법이 만든 의미의 체계, 기존의 법에 의해 자연화된 규약과 규준, 규범과 규칙을 찢고 깨는 폭력이다. 이음매의 연결을 통해 지속되는 법의 시간, 시스템의 시간이란 길이로 재현되고 양적으로 계산되도록 가공되고 재편된 시간, 이른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척도이며 그 척도의 힘을 옹립하는 정치적 사회적 합의의 시간들이다. 차이라는 폭력은 법의 시간의 연장을 중지시키고 시스템의 시간의 이음매를 탈구시켜 틈()을 내고 틈새를 벌리고 간극을 만든다. 차이라는 폭력은 집계하고 계측하는 법의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것을 정지시키고 단절시키는 힘인데, “그것이 지닌 단절의 힘이 제도나 헌법constitution, 법 자체를 생산한다.”(유령들, 76) 차이라는 폭력(Gewalt)은 합의된 합법의 시스템을 부수고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구성적 힘(Gewalt), 제헌적 힘이다. 그 힘, 중단의 힘은 메시아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메시아성은 지금 여기서 사태, 시간, 역사의 통상적인 경로를 중단시킨다. 그것은 타자성 및 정의에 대한 긍정과 분리될 수 없다.”[데리다,마르크스와 아들들,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진태원 한형식 옮김, , 2009, 215.]

 

차이라는 폭력, 그 메시아적 제헌의 힘은 카이로스의 제헌적/구성적 힘과 함께 간다. 조정환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틈과 단절이며 새로움의 구성인 ’”라고 표현할 때, 그것을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파열시키는 틈이자 미분의 힘(),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구성의 힘”(인지자본, 280, 294)으로 다시 설명할 때, 카이로스의 시간이 양으로 집적되는 통합적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의 연속을 정지시키는 제헌적 폭력의 시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적분의 시간에 파국을 도래시키는 미분의 힘이다. 잘려도 잘려도 새살로 다시 돋고 돋는 히드라의 힘, 양적 분할의 질긴 연장 속에서 끝내 분할되지 않고 남는 미세한 차이들의 초과하고 범람하는 힘. 그것이 미분의 힘이다. 그것은 절대적 독특성의 촉구/서두름이다.”(유령들, 77) 아랍혁명의 동력이었던 독특성들의 지도자-되기와 순교자-되기에서,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에서 메시아적 제헌의 힘을 본 조정환은 그들을 자유의 카라반(caravan)’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사막을 횡단하며 성지순례와 상업을 겸했던 카라반들의 여행에서 제국에서의 삶을 초과하는 다중의 대장정을 본다. 카라반은 자유(自由). 자기에게서 말미암는 한, 자유는 자기통치(self-government)이며 자기창조(autopoiesis)의 다른 말이다. 사막의 순례자들인 카라반은 사막의 메시아주의의 기회”(유령들, 72)를 놓치지 않는다. 사막에서의 신성의 경험이라는 절호의 비상사태 속에서 새로이 거듭난 그들, 제헌적 카이로스들, 때들. 조정환은 카이로스의 때들을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며 잠재성의 광대한 토지를 늘 새롭게 일구고 재구성한다는 뜻에서의 발생적 역사(Geschichte)’라고 말한다. 이는 달리 표현될 수 있다. 카이로스는 발생적 힘의 역사, 발생사 속에서 잠재성의 대지를 갈아 새로운 가치를 수확하는 노동의 시간이다. 발생사가 그렇게 노동하는 자로의 변신과 재구성의 순간에 맞닿은 것이며 그 순간의 최고도의 지속인 한에서, 발생사는 노동과 가치의 개념을 혁신한다. “가치는 메시아를 통해 노동으로 복귀한다.”(, 138) 이 문장은 네그리에 의한 가치법칙 에피스테메의 파열을 뜻한다. 메시아적 제헌의 시간에 깃든 카이로스의 노동은 가치법칙에 의해 측정될 수 없는 가치, 공통가치의 다른 말이다. 이와 같은 가치의 재발명, 가치의 역사적 이행 속에서 신성의 경험과 유물론적 입장은 혁명적 순간을 통해 합수한다. 메시아적 유물론자로서 말하는 네그리, 그의 문장들.

 

메시아는 두 번째 자연이다. [메시아는] 에너지를 생산 축적하는 기계이며, 에너지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에너지를 제1질료materia prima로 적용하는 기계이다. 그의 최초의 소진으로 인한 재들이 재탄생하는 힘이다. 강력한 혁신이다. 독창적이며, 모든 목적성 바깥에 있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존재와 물질성의 잉여이다. 이것이 메시아다. 그리고 세계의 척도는 늘 새롭게 창조된다.(, 195)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시민상태와 자연상태의 경계를 허물고 시민상태를 모조리 늑대들의 자연상태로 전변시키고 있다는 것은 독이면서 약이다.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는 어떤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늑대의 상태냐 새로운 시민상태로의 역전이냐가 그것이다. 네그리에게 메시아의 파루시아(parousia, 임재)는 그 어떤 권리도 양도하지 않는 절대적 민주주의로서의 새로운 자연, 두 번째 자연을 개시한다. 제헌적 메시아, 그 힘. 그것은 개념의 오랜 역사와 이력을 지닌 1질료와 관계한다. 존재의 변신가능성의 저장고이자 잠재성의 무한한 총체, 아리스토텔레스적 ()’으로서의 제1질료. 메시아적 힘을 유물론적 비판의 에너지로 변형시키기 위해 메시아의 임재의 순간은 제1질료로 불탄다. 그것은 연금술적이다. 타고 녹은 메시아의 임재의 순간은 재들로, 새로운 몸으로, 화살로, 카이로스로 재탄생한다. 네그리의 재는 데리다의 재와 겹친다. 차이라는 재. “재와 뒤섞여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대자의 탄각炭殼 속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일자Un 속에서는 그 유일성이 보장될 수 없는 차이”(유령들, 72). 네그리의 카이로스적 재들이 단일한 목적과 집계의 체계 바깥에 있는 혁신적 잉여이자 잔여이듯, 데리다의 차이는 메시아적인 것이 타고 녹은 뒤의 재들과 합성된 채로 절대적 동일성의 체계와 싸운다. 차이라는 폭력은 차이라는 재들의 일이다. 그것은 집중시키고 한데 모으는 시스템의 이음매를 내리쳐 탈궤시킨다. 지배자들의 눈알에 흩뿌려진 재들, ‘사막의 모래들. 그 미세한 알갱이들(微粉)이야말로 미분(微分)의 힘, 제헌적 힘의 다른 말이다. 시간들이 미쳐 날뛴다. 불타는 카이로스의 화살들이 가로지른다. 데리다의 어떤 선포. “시간이 탈구되고 이음매가 빠지고 벗어나고 탈궤되어 있고, 시간이 탈이 나고 쫓기다가 탈이 나고 뒤틀리고, 고장이 난 동시에 미쳐 있다.”(유령들, 50)

 

4. []의 유물론견신 또는 코라

 

조정환이 자율주의로의 선회 이전의 자신에 관해 쓴 한 문장.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였고, 잃은 것은 지금시간(Jetzt Zeit)이었다.”(카이로스, 424) 이 문장은 조정환의 과거와 오늘을 관통하면서 그의 비평의 전 궤적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비평의 존재론적 벡터를, 그 힘과 방향의 전모를 직감하게 한다. 조정환의 한 단어 지금시간은 앞서 썼던 발생사적 힘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내게 그것은 벤야민의 인장이 새겨진 단어로 보인다. “이 지금[Jetzt] 속에서 진리에는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다.”[발터 벤야민,아케이드 프로젝트 I,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1056.] 조정환이 아랍혁명의 메시아적 참여를 두고 종교의 권력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며 놀라워할 때, 그는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 없는 메시아성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하며, 조정환이 그들의 메시아적 참여가 세속적인 삶의 존엄과 행복을 요구한 것이었다고 말할 때, 그는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철학적 과제의 중요성을, 행복으로 정향된 세속적인 것의 질서와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 사이의 관계에 관한 탐구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파국과 몰락의 추구가 세계정치의 과제라고 했던 한에서, 벤야민의 한 단어 지금시간은 제헌적 파루시아의 시간이며, 발생적 힘의 시간이고, 타고 있는 재들의 떼이다. 그것은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 진리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 곁에 또 하나의 폭발을, 또 하나의 메시아적 사건을 가져다 놓자. 마르크스의 유산을 메시아적 단절과 폭발의 힘으로 상속 받으려 했던 자의 의지.

 

어떤 메시아적 극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곧 그 궁극적인 사건(직접적 단절, 미증유의 폭발, 때맞지 않게 일어나는 무한한 놀라움, 완수 없는 이질성)이 노동과 생산 및 모든 역사적 목적과 같은 어떤 피지스의 최종적인 종점을 매 순간 초과할 수 있는 어떤 에스카톤eskhaton이 존재하지 않는가?(유령들, 88)

 

메시아적 임재의 매 순간은 권력적 역사, 혹은 역사적 권력의 지속과 연장을 중지시키고 단절시킨다. 파루시아의 순간은 자본주의적 노동과 생산의 목적을, 곧 이윤의 집적을 끝낸다. 이윤이라는 노모스(nomos)는 자연의 신진대사의 최종적 종점과 도달점에 자신의 표지를 각인하고 서명함으로써, 자신을 아무 거리낄 것 없는 매끄러운 자연의 군주로 만든다. 하지만 그 군주는 자신이 했던 서명과 동시에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되며 이내 균열과 교란이 뒤따른다. 서명은 서명자의 부재를 전제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명의 현전은 부재의 필연성 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파루시아의 순간은 그 군주를, 이미 소실되고 있는 그 군주를 완전히 폐하고 그 군주의 자연에 종언을 고지한다. 그것은 종말론(eschatology)의 어원이면서 ’ ‘마지막을 뜻하는 에스카톤의 선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힘의 발생이며 돌발이다. 이 발생사적 힘은 해체의 정의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증여의 힘으로 드러난다. 해체는 선물로부터, 곧 법과 계산, 교역을 넘어서 정의를 사고해야할 필연성”(유령들, 69)에 이끌린다. 선물은 목적 없는 교환, 목적 바깥으로 나가는 교환의 한 형식이다. 그것은 이윤이라는 최종목적에 따라 편성된 자연의 인위성을 혁파하는 힘을 지시한다. “선물의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 타자에 대한 비-경제적인 탈-정립ex-position의 독특성으로서의 정의”(유령들, 60). 선물의 증여는 이윤의 체계에 의해 집계되지 않는 초과의 시간들이다. 그것은 통념적 경제의 순환의 이음매들을 어긋나게 하고 오작동하게 한다. 그래서 비-경제적이다. -경제적이라는 것은 집계하고 계산하는 힘에 의해 부과된 포지션을 이탈하는 특이한 힘을 가리킨다. 해체의 정의는 일단 그런 얼굴로 드러난다.

 

무언가를 주는 행위는 그 줌의 행위에 언제든 연루될 수 있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위계 형성에 눈뜨고 있어야 한다. 데리다의 증여는 받은 자가 아예 받지 않은 자가 될 수 있도록 주어야함을,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줄 수 있는 방법과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계의 울타리를 초과하는 일반경제적인 증여는 억압적인 경제, 팍팍한 살림살이를 강제하는 합법들의 연쇄망을 찢는다. 해체가 말하는 타자성은 독특성을, 독특성은 지금-여기를, 지금-여기는 차이를, 차이는 타자성을 그 조건으로 한다. 타자성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조건들의 연쇄적 맞물림. 그것이 해체의 정의가 해체불가능한 구조적 원리이다. 그런 한에서 독특성 없이는 타자성이 없고, 지금-여기 없이는 독특성이 없으며, 차이 없이는 차이가 개시하는 지금-여기가 없고, 증여를 통한 타자성의 환대 없이는 차이가 없다. 기존의 사태와 시간의 통상적 진행을 내리쳐 정지시키는 억제할 수 없는 차이의 메시아적 폭력, 제헌적 힘은 바로 이런 연쇄적 맞물림을 따라 수행된다. 그 속에서 타자성의 환대에 관여하는 증여는 교환의 경제, 이윤의 자연에 선포된 에스카톤의 순간이자 파루시아의 순간이다.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을 정의의 이름으로 복원하고 수리해야만 했던, 그래서 끝내 불의의 나락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태생적 운명을 저주했던 햄릿. 그의 바닥 모를 불행을 마주하면서 데리다는 운명적 저주에 맞서 처절한 고통을 무릅썼던 욥을 떠올린다. 그런 데리다 곁에서, 판단 기준의 실천적 전환이야말로 욥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했던 건 욥에 물든 이, 네그리였다.

 

네그리가 인용한 아퀴나스의 사랑은 늘 척도를 초과한다. ‘은 늘 척도를 초과한다고 썼던 건 조정환이었다. 아퀴나스의 자선(慈善)’. 그것은 신성과의 융합에 이어진 사랑의 행위이고 신의 명령에 근거하는 지고의 것이며 그런 한에서 정의와 주권의 문제에 걸린다. 자선은 창조의 힘에 참여하도록 만들기에 교환의 경제와 그것을 보존하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구조에 의해 측정되거나 계산되지 않는다. “힘이 권력에 맞설 때, 힘은 신적인 것이 된다. 힘은 삶의 원천이자, 자선의 넘침이다.”(, 145) 욥의 이야기를 메시아를 기다리는 은총과 예언의 담론으로 받아들이는 네그리에게 힘이 신적인 것이 된다는 말은 견신(visione, 見神)’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이 했던 말,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네그리는 경탄하며 그 말과 합성된다. 하느님을 제 눈으로 직접 만나는 욥의 견신의 순간은 하느님이 절대적 초월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분리되는 순간이고, 그런 한에서 그것은 하느님의 죽음의 순간과 다름없다. 그 절대의 죽음 속에서 욥은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고 제헌하고 구성하는 신성과 구원의 힘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죽음이라는 장치가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견신은 메시아의 죽음을 통한 주체의 재구성이며 재가 된 메시아의 탄각들 속에서 이뤄지는 주체의 활력의 급진화이다. 욥은 견신의 순간에 이어 곧바로 말한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43:6) 재 속에서의 회개는 통념적인 죄의 뉘우침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의 메시아적/유물론적 전회다. 네그리는 말한다.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장치는 바로 세계의 인간적 구성과 창조이다. 견신에 대한 유물론적 독해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존재론적 인간의 몰입이 지니는 창조적 계기를 포착하는 능력”(, 185)이라고. 이는 조정환이 구상하는 장치론, 다시 말해 인지적 포획장치로서의 자본에 대항하는 새로운 행동인과 새로운 생명장치의 구체적 양상이자 경로일 수 있다. 스피노자 독자로서의 조정환은 예언자들의 상상력을 다중의 상상력으로 끌어온다. 신의 법을 계시하기 위한 도구이며 그런 한에서 신의 정신과 동등한 예언자들의 상상력을 누구나가 예언자일 수 있다는 의미로 읽으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아랍혁명의 누구나가 지도자일 수 있음과 겹치는데, 다중의 상상력이 지니는 신성의 제헌적 힘이 군사장치와 의회장치라는 대의장치 일반의 구속력을 뚫고 나가는 새로운 행동인의 속성임을 암시한다.[조정환,<신학정치론>에서의 상상력과 표상, http://amelano.net/100102 참조.] 이런 사고 속에서 네그리가 말하는 견신의 유물론적 독해는 기왕의 법을 폐하고 다른 법을 제헌하는 힘의 계기들을, 곧 구성과 창조의 순간들을 신에의 존재론적 몰입 속에서 포착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지시한다. 그것은 공통적인 것을 공통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최근의 테제들로, 다시 말해 호헌과 제헌이 충돌하는 전장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를 재정복하기 위한 테제들로 예각화된다. “통제의 직선적 공간 속에서 사선을 긋기. 다이어그램에 사선을 대립시키기, 바둑판형에 간극을 대립시키기, 위치에 운동을 대립시키기, 정체성에 생성을 대립시키기, 단순한 자연에 무한한 문화적 다양성을 대립시키기, 기원의 참칭에 인공물을 대립시키기.”[네그리 외,인류의 공통적인 것을 발명하기, 다지연 불어세미나팀 옮김,아우또노마M7, 20103분학기, 16. 이 한 대목의 인용은인지자본주의, 426쪽에서의 재인용이기도 하다. 인용이면서 동시에 재인용이라는 것은 인지장치를 폐지하는 네그리의 사선(diagonal)’의 힘을 공통재로 어떤 인용의 연대를 상상하고 우발적인 마주침의 상태를 넘어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감옥에서 작성된욥의 노동서문(1988)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의 네그리가 말하는 사선(斜線)의 힘, 곧 인지장치의 알고리즘들을 향해 내리그어지는 폐절(廢絶)의 힘은 저 견신의 유물론적 힘과 함께 간다. 지금, 그 힘이 구성되는 장소를 다시 한 번 상상하게 된다. ‘발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장소일 뿐이라고 어떤 시인은 적었다. 발생사적 장소로서의 코라(khôra)가 바로 앞에 있다.

 

5. 메시아적 실재주의에 관하여 

 

자신을 치도록 명령한 신에 항거했던 욥의 고행과 고통. 그것 없이 욥의 견신은 불가능했다. 고통이 견신의 조건이다. 견신은 신에 대한 절대적 환대이다. 환대는 정의의 조건이다. 데리다는 고통과 절망 없이는, 다시 말해 장래에 장차 올 것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계산에 의해 절망의 계기들이 삭제된다면 희망은 팍팍하고 빡빡한 프로그램의 일환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약속하는 환대와 정의는 국가의 법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메시아주의와 함께 간다. 계산되고 예측될 수 없으므로 믿기 어렵고, 불안하고, 가망 없으며, 그런 한에서 약한 메시아주의와 함께.

 

사람들은 이러한 절대적 환대의 약속을, 지극히 불가능하고 그 빈곤함 때문에 지극히 신뢰하기 어려운 어떤 경험에, 지극히 불안하고 취약하고 황폐화된 어떤 유사 메시아주의, 항상 전제되어 있는 어떤 메시아주의, 유사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실체 없는 유물론가망 없는 메시아주의를 위한 코라의 유물론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어떤 메시아주의에 일임하고 싶어 할 것이다.(유령들, 324)

 

개념의 오랜 이력을 지닌 코라. 그것은 애초에 형이상의 이데아에 가시적인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이데아와 현상계를 매개하는 텅 빈 고리로 설정된 것이며, 이후 역동적인 생성의 장, 잠재성의 리듬 등으로 전용되었다. 데리다에게 코라는 차이. 차이가 그렇듯, 코라도 새로운 시공간을 개시하며 통상적인 사태와 시간의 이음매를 탈구시키고 중단시키는 메시아적 제헌의 힘이다. 코라의 유물론과 합성하는 어떤 약한 메시아주의. 견신의 유물론이 네그리의 메시아적 유물론을 압축하는 주요 술어였듯, 코라의 유물론은 데리다의 그것을 압축한다. 코라에서 자기조직화를 통해 변모하던 사람들의 활력과 잠재성의 긍정적 발현을 보았던 건 데리다를 추모하며 강연하던 철학자 이정우였다. 그런데 데리다의 차이는 기쁜 만남으로서의 들뢰즈의 리좀과 같지 않다.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메시아적 힘으로서의 차이/코라가 무엇보다 메시아적 주저또는 메시아적 근심같은 술어들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심과 주저를 통념적인 것으로, 곧 활력의 감소와 슬픔에의 침잠으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데리다에게 그 메시아적 근심과 주저는 무엇보다 더 현실주의적이며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적 주저는 어떠한 결정이나 긍정, 책임도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이것은 그것들에게 그것들의 기초 조건을 선사해 준다.”(유령들, 327) 앞서 제헌적 힘으로서의 카이로스의 시간은 무엇보다 위기 속에서의 결정과 선택을 함축한다고 했었다.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적 주저와 도래할 것에 관한 근심은 제헌적 힘의 결정과 책임성을 반감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기초 조건을 선물한다. 메시아적 주저와 근심 위에서 제헌의 힘은 폭발한다. 데리다는 차이/코라의 제헌적 힘을, 스스로가 메시아적 극단성이라고 했었던 어떤 극한까지 실험하고 밀고나가면서도 동시에 그 메시아적 힘이 극한의 한계에 이르러 어떻게 파쇄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 한계 지점에서 어떻게 질적이고 전면적인 전환의 계기들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재정의하고 재설계하려 한다. 기존의 법을 폐하고 새로운 법을 설립하는 메시아적 힘은 절대적이지만, 그것은 예측불가능하기에 쉬 믿을 수 없고 불안하며 가망 없는 약함 속에서만 절대적이다. 어떤 약한 메시아적 힘.

 

데리다는 공간과 시간의 가상화를 촉진하고 있는 원격기술의 발달이 현존과 그것의 표상을, 실시간과 지연된 시간을, 현실과 그 모상을 분리할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원격기술에 의해 우리 시대가 탈장소화(dis-location)되고 있고, 거기가 메시아적인 것이 진동하는 장소이며, 그런 사실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다른 가능성을, 이른바 도래할 민주주의에 관한 사고를 강제한다고 쓴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생산에의 응용을, 그런 응용의 현대적 판본으로서의 자본의 인지화를, 다중의 대장정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서의 메트로폴리스를 하나로 꿰어 사고하고 있는 데리다의 방식이다. 시공간의 가상화와 탈장소화는 인지자본의 공장인 메트로폴리스의 일반적 특질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장차 올 것으로서의 절대적 민주주의에 관해 사고하도록 한다. 탈장소화되고 인지화되고 있는 메트로폴리스를 재정복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네그리의 입장이기도 했다. 욥의 견신이 욥의 고통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네그리는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적 유물론의 힘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potenza은 고통 가운데서 만들어진다. 그 힘은 비-존재의 힘이자, 공동체의 힘이다. 힘은 이런 경로를 따라 주어지는 이행의 시간이자, 존재론적 변형의 시간이다. () 힘과 고통은 삶의 상보적 차원들이다. 이런 이유로, 힘과 고통은 공동체와 구원에로의 길을 연다.”(, 172) 햄릿의 고난에서 시작된 코라의 유물론과 욥의 비참에서 시작된 견신의 유물론은 도래할 것의 예측 불가능함에 따른 불안과 고통, 거듭된 좌초와 실패를 공통의 지반으로 삼고 있다. 네그리에게 힘은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다. 고통과 힘은 함께 증폭하고 함께 가중된다. 힘과 고통의 상호추동적인 공정을 통해 주체의 변신은 시작된다. 그 공정을 수행하는 이들은 비-존재이며, 그런 한에서 경계 위에서의 삶이며, 유령들이다. 그 공정은 구원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주체구성의 공정으로서의 파루시아. 그 임재의 시간 속에 코라와 욥은 함께 있다. 욥이라는 코라, 코라의 욥. 이렇게 썼지만 욥은 코라를, 코라는 욥을 부정했다. 무슨 말인가.

 

네그리는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변화하는 존재론적 요소를 포착하고서도 초월론적인 연속체의 시간 속에 매몰됨으로써 결국 존재론적 발견을 부적합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존재론을 무효로 만든 변화를 인정하고서도 왜 존재론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지를 따져 물으면서, 네그리의 존재론이 모든 것을 거대한 질서 속으로 집어넣을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고 재비판한다.[데리다, 네그리 외,마르크스주의와 해체중 네그리유령의 미소, 34, 데리다마르크스의 아들들, 234쪽 참조.] 나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코라의 유물론이 개시한 시간은 초월론적 연속체를 보증함으로써 존재론적 변신의 계기와 요소를 부당하게 폐기했던가. 과연 견신의 유물론은 모든 것을 억압의 질서 안으로 유폐하는 거대한 존재론적 감옥에 불과했던가. 욥과 햄릿의 이 대결은 홈 패인 입장의 재생산이므로 생산적이지 않다. 이 대결은 단지 결렬의 확인일 뿐이므로,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김이 좀 빠지는 대결이다. 비판이 선물이 되고 자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들의 결렬 앞으로 또는 그들의 주소 앞으로 배송될(혹은 수취인불명으로 반송될, 하지만 반송될 땐 이미 받을 주소가 변경되었을) 나의 선물은 이런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 기왕의 제정권력을 내리치며 종언을 선포하는 제헌의 힘에 관해 조정환은 이렇게 쓴다. “제헌하는 능력의 운동형식은 제정된 권력의 운동형식과는 다르다. 제정권력에게 승리와 패배는 뚜렷한 경계를 갖지만 제헌권력에게 그 양자는 서로 뒤섞이며 때로는 상승작용한다.”[조정환,공통도시, 갈무리, 2010, 26.] 이는 광주라는 도시 속에서 구성되었던 제헌권력에 대한 분석 중 한 대목이다. 내게 차이와 견신은 메시아적 제헌권력을 공통의 토양으로 서로 연합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제정권력과는 달리 승리와 패배의 선명한 구획을 동력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승리와 패배의 시간들은 뒤섞이며 서로를 강화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난국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동시에 혼재하는 시간, 가능한 이유와 불가능한 이유가 동일해지는 시간. 그 곤혹스런 난국의 시간이 메시아적 제헌권력의 동력이다. 조정환의 한 대목은 대립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신을 최대치로 밀어붙여갈 때 어떻게 적대적인 다른 하나와 긴밀하게 관계 맺게 되는지에 대해, 곧 해체적 오염의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한에서 조정환의 문장은 데리다적이다. 네그리와 맞서고 있는 데리다는 데리다적이지 않다. 이는 다시 한 번 조정환의 자리에 관해 사고하게 한다. 앞서 조정환은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긴장으로서의 실재적인 것(the real) 안에 있다고 했다. 풀어 말해, 현실성으로 드러나는 삶시간의 순간적 완성과 장차 올 것/도래할 것으로서의 잠재성 사이의 긴장 속에 조정환은 있다. 현재성이 메시아적 잠재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끌리는 과정에서 조정환의 자리와 좌표는 늘 구축과 재구축, 설정과 재설정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생산한다고 했다. 조정환은 실재주의(real-ism)에 관해, 정확하게는 메시아적 실재주의에 관해 사고하도록 한다. 그 개념이 최고도로 추상된 채로 드러나고 있는 한 대목. “‘발생적 역사속에서 사고할 때 우리는 근대 속에서 그것을 규정하고 근대와의 대항을 통해 근대를 밀어붙이며 궁극적으로는 근대의 시간을 넘어서 나아가는 탈근대성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조정환,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상허학보19, 2007, 161.] 말을 바꿔, 제국이라는 현실성과 다중이라는 잠재성 사이. 그 사이에서의 긴장 속에서 도래하고 있는 메시아적 제헌권력으로서의 다중에 의해 제국의 조종이 울려 퍼진다. 제국의 시간 너머는 다시 또 하나의 현실성으로 되며, 그 속에서 그것을 규정하고 그것과 싸우면서 그 너머로 나아가는 메시아적 잠재력은 다시 또 도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적 힘은 매번 그렇게 도래할 뿐이지 결코 도래의 완료나 완성이 아니다. 누차에 걸쳐 도래할 뿐인, 그래서 늘 아직 오지 않은 미-(-)의 시간이 메시아적 힘의 자리다. 내겐 그것이 발생사이며, 발생사의 주름이다. 발생사는 잔여와 잉여를 남긴 채로 메시아적 실재주의로 거듭 번역될 수 있는 잠재적 힘의 지속 시간이다. ‘이라는 접두사를 붙인 카이로스의 비평, 조정환의 삶비평은 바로 그 메시아적 실재주의 안에서 그것과 싸우며 그 싸움을 통해 그것을 밀어붙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 너머로 전진하며 이행하고 있다.

 

 



 
 
여울마당 2012-05-20 13:26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둘러봅니다. 잘 읽고 잘 보고 잘 느끼고 갑니다. 글들 더 찾아 봐야겠네요. 건필하세요.

2012-05-21 16:53   URL
감사합니다. 여울마당님께서도 지금 하시는 공부가 더 잘 되길 바랍니다.

2012-05-21 19:28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2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 4. 17.

 

백무산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를 목적 없이 손에 들었다가, 시 하나를 거듭 읽으며 곱씹는다. 의미와 리듬이 머리속을 맴돈다. 속으로는 죽이면서도 겉으로는 살리는 척하는 숨은 적(敵), 적들. 혹은 숨은 신, 숨은 적그리스도. 이런 개념 섞인 내 어줍잖은 말들 모두를 온통 압도하는 구체성의 시였다. 감사하고, 부끄럽다. 전문을 인용해 놓는다. 언젠가 다시 이 시를 인용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때도 오늘처럼 부끄러울 것이다. 아마 끝내 그럴 것이다.      

 

 

 

 

 

 

 

 

 

 

 

 

 

 

 

 

적은 나의 구원이오

 

내가 어떻게 사는가 묻네

이 높은 곳에서 무얼 먹고 어떻게 사는가 묻네

나는 적을 먹고 사네

적이 와서 밥을 떠먹여주니까

적이 와서 이부자리를 깔아주고 발 뻗고 자게 하니까

적이 날뛰어야 성이 고고하고 높고 튼튼해지니까

 

적이 없으면 외롭고 쓸쓸해진다는 걸

시소 저편이 사라지면 이쪽이 홀랑 뒤집어진다는 걸

적이 없으면 성을 허물어 포르노 상영관을 만들 거란 걸

적이 사라지면 아름다운 무기를 녹여

경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적이 총을 버리면 나는 백수가 된다는 걸

적이 사라지면 위대한 신의 정의가 부엌칼이 된다는 걸

적이 사라지면 조국의 위대한 영광을

벼룩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는 걸

하나의 적을 격침하고 두개의 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적이 없으면 허수아비를 세우고 선지라도 칠해야 한다는 걸

적이 없으면 빌빌 기던 아랫것들도 고개를 쳐들 거라는 걸

적이 없으면 영웅도 도살장의 칼잡이가 될 뿐이라는 걸

 

그래서 기도를 좆빠지게 해야 한다는 걸

적을 달라고 사탄을 내려달라고 적을 만들 지혜를 달라고

적이 없으면 복음은 개소리가 될 뿐이라는 걸

저 불신의 거리에 돼지 피를 은총으로 뿌려대어야 한다는 걸

적은 나의 포도나무요

나의 구원이라는 걸

 



 
 
많은물소리 2012-05-01 10:38   댓글달기 | URL
복도훈 씨의 소개로 이 소중한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일반독자로서 정치신학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백무산의 시를 보면서 저 역시 감사하고도 부끄럽습니다.
2년 전에 제가 써 보았던 '차이'라는 시를(저는 시인이 아닙니다)옮김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덕분에 정치신학적 글들과 정보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차이'


콩이 한 알 한 알
그 콩알만한 부르심 접두에 꺼므 ‘흑’한 거뭇을
호명해 두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지점이 남아 있다면
작대기 구멍 찌르듯 콩알, 흑 콩알
나의 시편에서도, 선이란 선
직선들의 점증으로 심드렁한 선, 몇 길이 선분들은
거칠게 긁어 덧칠을 부과함으로 다른 모든 길이들을 깨우고 춤추게 하는
그러한 혈소 지점을 주목하고 싶다
물위에도 거무스레한 신비의 버들 그늘을 드리워
살찐 물고기가 제 등살을 숨기게 하고
땅위의 사람들은 제 권태를 풀고 스스로 일어나는 노래를 부르게 하라
순백의 꿈이 더 이상 선명하고 아름다운 돋을새김으로 일렁일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얼마간의 어두움을 본능처럼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두움 그 자체를 칙칙하게
편애 한다기 보다는 채색의 환희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만큼도 검은 그늘을 사랑하여 그를 백 년 손님처럼 내실에 소중히
붙들어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에두르지 않고 핵심을 대놓고 말해 놓자면 사실,
차이와 리듬이야말로 생을 구원하는 보물인 것을

이변을 자생시키는 행복한 왕들의 맨손체조
나는 오늘도 그 명암 차의 그네를 누르며
회색점 이하를 기웃 거린다

2012-05-03 00:08   URL
"억제할 수 없는 차이(差移) 안에서 지금-여기가 펼쳐진다." 우연찮게도 이 한 문장이 맑은물소리님의 시를 읽는 지금 제 눈앞에 있었습니다. 시를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이 블로그에 있는 글들은 저 혼자만 봐야 하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미미하나마 정보들이라도 제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사 드려야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2012. 3. 29.

 

바디우, <사도 바울>, 75~6쪽. 바디우의 파솔리니를 읽으면서 브뉘엘을 생각한다. 그의 <절멸의 천사>가 특히 그렇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하나로 두 이름의 시니피앙만으로도 이 문제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해야 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만큼 바울의 산문이 부단한 현재성을 더 잘 조명해주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코뮌주의와, 또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성스러움의 문제는 투사(鬪士)의 문제와 교차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파솔리니는 바울을 현재 세계에 옮겨놓은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지만 상세한 시나리오는 남아 있으며, 불어로 번역되어 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파솔리니의 목표는 바울의 발언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그를 동시대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바울이 가진 내재적 현실성에 대한 확신을 극히 직접적이고도 격렬한 방식으로 복원하려 했다. 문제는 바울을 바로 여기, 오늘, 우리 사이에, 온전한 육체적 실존을 갖고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관객들에게 명백히 말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말을 건네는 것은 우리 사회를 향해서이며, 그가 눈물짓고, 위협하고, 용서하고, 공격하며, 부드럽게 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이다. 즉 픽션 속에서이긴 하지만 바울이 우리의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설교, 그가 부딪힌 난관과 실패들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 파솔리니에게 바울은 사회적 불평등, 제국주의, 노예 제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려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파괴에 대한 성스러운 의지가 있었다. 구상으로 그치고 만 영화 속에서 바울은 분명히 실패하며 그러한 실패는 공적(公的)이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세계의 진리를 선언하는데, 그것도 거의 2,000년 전에 말했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용어로 그렇게 한다. / 파솔리니의 주장은 삼중적이다. 1. 항상 우연의 청천벽력 같은 분출, 사건, 순수한 만남이 성스러움의 기원에 있으므로 바울은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게다가 오늘날 비록 입문의 계기가 되는 만남의 내용은 다양할 수 있어도 성인의 형상은 필요하다. 2. 만일 우리가 바울을 그의 모든 발언들과 함께 우리 시대로 이식시킨다면 우리는 그의 발언들이 범죄적이고 타락했지만 로마 제국보다 무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능수능란하고 완강한 실제 사회와 맞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바울의 발언은 시간과 관계 없이 정당하다. / 중심 주제는 현실성과 성스러움 사이의 관계 안에 위치한다. 역사 세계가 신비, 추상(화), 순수한 질문 속으로 사라지려는 경향이 나타날 때마다 신적인(성스러움의) 세계가 인간들 사이에 사건을 통해 내려와 구체화되어 작용한다. (...)"    

 

 

 

 

 

 

 

 

 

 

 

 



 
 
 

 

2012. 3. 12.

 

이번 봄호 <자음과모음>에 싣게 된 글을 옮겨 놓는다. 어떤 글은 언제나 다른 어떤 글들 위에 실리거나 싣거나 하는 것 같다. 나의 경우에 비평은, 특히나 비평에 대한 비평은 더욱 그런 것 같다. 구성되고 결렬될 수 있는 다른 비평 없인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으며, 나아갈 수 없었다. 그 한 치 앞을 비춰줬던 다른 비평들은 언제나 나보다 더 크고도 깊었다. 그걸 잘 안다. 알면서도 건너다 본 나의 흐린 한 치 앞을 여기 이렇게 드러내 놓는다. 그건 용기라고 쓰고 싶은데 만용일 수 있으며, 충만이라고 쓰고 싶은데 결핍일 수 있고, 대화라고 쓰고 싶은데 독백일 수 있다. 그걸 모르지 않는다. 모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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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치신학

 

   1. 어떤 존재-신학에 맞서

 

지금 사랑에 관하여 비평한다는 것은 반복해서 짓눌러오는 어떤 하중들을 견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하중은 나열될 수 있을 만큼 많고 또 크다. 주제로서의 사랑은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이 그렇고, 오래됐음에도 늘 새것이라는 게 그렇고, 그러므로 사랑은 재발명되야 한다는 한 시인의 말이 그렇다. 더불어 사랑을 비평했던 기왕의 이름들과 그 파장이 또한 그렇다. 무엇보다 내 사랑은 못나고 섬뜩한 구석이 있는데 글이 그 사실을 알게 모르게 치장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아름답고 올바른 사랑을 함께 누릴 수 있을까. 버릇의 지속과 습관의 관성 속에서 사랑을 구원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사랑에 대한 비평의 시선이 매번 공동체의 문제와 긴밀히 결합하는 순간들에 관해 질문하려 한다. 이 질문의 밑바닥에 놓인 것이 정치신학적인 사고의 여러 파편들일 것이다. 앞질러 예컨대, ‘인류의 종언의 날에 (...)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라고 했던 건 김수영이었다(사랑의 변주곡, 1967). 그를 인용하면서, 또는 그에 공감하면서 그 사랑을 변주하기 위해 골몰했던 평론가들이 있었고, 신형철은 그 중 하나이다. 아니, 그는 그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범람하고 초과한다. 무엇보다 내게 그의 비평은 신학과 문학의 관계 속에서, 또는 신적인 것시적인 것의 연관 속에서 빛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 문장을 보라. “유물론이 왜 형이상학으로 깊어지지 않는지, 변혁론이 왜 구원에 대한 사유로 급진화되지 않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구원될 수 있는가, 신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 ‘신적인 것과 대결하면서 시적인 것이 뜨거워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118. 이하 느낌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비참한 삶에 무신경한 신을 겨냥해 예리한 날을 돋운 시인 신경림을 읽고 난 뒤의 문장이다. 대결이란 상대와 동등한 자격을 가졌다고 전제할 때만이 성립한다는 것. 그러므로 신적인 것과 대결할 때 시적인 것은 신적인 것과 동일한 높이로 고양될 수 있다는 것. ‘뜨거워질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고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형철에게 뜨거워진 시는 무책임한 신과 싸우는 시이자 세계의 고통과 투쟁하는 형이상학에 다름 아니었다. 벌겋게 달궈진 시라는 무기, 쟁투의 어떤 열도(熱度). 그는 시적인 것이 를 향해 끝까지 치솟아 오를 때 아래에서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드문 믿음은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듭 읽으며 속으로 되뇌었던 문장은 따로 있다. “신과의 대화는 우리 시대 큰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 준엄하게 신을 기소(起訴)하는 법정에 한국 시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습니다.”(느낌, 118) 신형철이 시인의 다음 시를 기다리는 까닭은 신을 준엄하게 기소하는 시, 신과 싸우는 시를 다시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은 기소의 대상이다. 그리고 신을 법정에 세우는 일은 이 시대 큰 어른들의 몫이다.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다음이다. 그에게 신 아닌 것은 기소의 대상이 아니다. 당연히 신이 아닌 눈앞의 작품을 기소하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니다. “작품의 허물을 기소하거나 시간이라는 판관과 경쟁하는 일이 내 몫일 수 없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 기소와 선고를 위한 문장을 쓰고 나면 나는 거의 고통스럽다.”(느낌, 13~14) 이 문장을 쓸 때 일어나는 두 개의 분리. 하나, 기소의 대상인 것과 아닌 것의 분리. , 기소하는 자의 몫과 기소하지 않는 자의 몫의 분리. 그는 보이지 않는 신은 판결의 대상으로 지정한 데 반해, 매번 마주하는 작가와 작품은 판결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기소의 대상은 신에 묶어놓았고 판관의 일은 어른들의 몫으로 돌려놓았다. 신 아닌 것은 기소의 대상이 아니고 유일한 기소의 대상인 신은 이른바 대가의 몫이니, 이제 신형철은 그 어떤 대상도 기소하지 않아도 된다. 이른바 따뜻한 공감의 비평으로 알려진 그의 글쓰기는 기소와 비판의 몫을 거절하는 저 두 개의 분리에 근거해 있다. 손에 피 묻히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꼬집고 비꼬려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기소의 몫을 체계적으로 거절하는 비평의 존재론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아가 그런 비평의 힘과 의지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또 하나의 당파성에 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형철은 기소할 때 고통에 허덕인다고 진심을 다해 토로했다. 이 진정어린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게 그것은 그의 한 문장을 인용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내 글은 내 실존의 필연이니 앞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도리 없이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나마 가슴이 아프도록 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느낌, 14) 그에게 기소할 수 없음은 어쩔 도리가 없는 불가피한 것이다. 실존의 필연이다. 고통 속을 헤매는 것은 징그럽고 진저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형철 자신이 말하는 소설적인 것이란 그런 실존의 필연성을, 그 심연의 불가피함을 깨고 흔드는 것이질 않았던가. “‘소설적인 것이란 (...) 쾌락원칙의 기율 안에 엎드려 있는 우리를 가격하면서 쾌락원칙의 피안을 넘나드는 실존의 심연을 열어젖힌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5. 이하 몰락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열어젖혀질 수 있는 실존의 심연과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실존의 필연. 기소를 거절하는 신형철의 실존은 필연이므로 결코 깨져나가지 않는다. 그런 한에서 쾌락과 고통 사이를 넘나들도록 충격하는 소설적인 것은 분명 신형철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그가 몸으로 견디고 있는 말은 아니다. 기소와 선고를 거절하는 실존의 필연성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곧 자신의 재능이 허락한 일을 잘하고 싶다는 것은 문제적이다. “재능은 필연성을 자신의 알리바이로 내세우는 데 익숙하지만, 그것은 결국 우연조차 포섭하려는 권력의지의 한 부분이 아닐까?”[김영민, 사랑, 그 환상의 물매, 마음산책, 2004, 70. 이하 물매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철학자 김영민의 이 한 대목을 움켜잡고 내가 빼들게 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신형철이 말하는 실존의 필연은 그 필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탈적 우연들과 사건들을 장악하고 무릎 꿇리는 권력의 운행과 얼마나 가깝고 또 먼가. “우연을 필연성으로 조탁해내는 언술적 세공술은, 예술이나 정치권력 같은 신화 이후의 신화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물매, 70)이라는 한 문장을 곱씹을 때, 더는 창작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찬사를 받았던 신형철의 비평예술은 권력적 신화와 얼마나 멀고 또 가까운가.

 

질문을 전진시키자. 또는 원점으로 되돌리자. ‘실존의 필연이라는 말은 그 필연성에 기대어 흔들림 없는 자기의 동일성을 아끼고 지킨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다. 그것은 돌발하는 여러 의지들의 사회적 관계 속에 자기를 선명히 각인해 넣는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나의 인장(印章)을 분명히 찍어넣기”, 몰락, 7). 그런 필연의 자기앞에서 우연적 돌발의 힘은 거듭 엎어지고 저지되며 봉쇄된다. 신형철은 그렇게 늘 이긴다. 기소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언제나 이기는 자기. 그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필연이라는 철옹성 위에 구축된 자기라는 군주를 알현한다는 것이고,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의 밑바닥에서 결코 죽지 않고 빳빳해져가는 자기라는 성기를 쥐고 흔든다는 것이며, 독립적이고 근원적인 유래로부터 체험되는 자기라는 안락의 원천에 몸을 담근다는 것이고, 어느덧 신적인 것에 육박한 자기라는 신성(神性)에 탐닉의 경배를 바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신형철의 자기 사랑은 일종의 존재--(Onto-Theo-Logie)’이다. 그것은 자기를 절대적 기원으로서의 신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므로 신형철의 존재-신학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선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신적인 것과 대결하면서 시적인 것은 뜨거워질 수 있다. 앞서 이 문장은 신형철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턴 나의 문장이다. 비평은 존재-신학적 묵계와 합의의 밑자리를 기소하면서 거기로 파국과 신생의 동시성을 도래시키는 메시아적인 것으로 타올라야 한다. 타오르는 비평, []에서 다시 타는 비평. 쟁투의 다른 열도.

 

2. 사랑, 다가오는 통치

 

신형철의 비평에서 감전(感電)의 능력”(느낌, 205)은 핵심적인 용어 중 하나다. 그것은 무엇이건 기어코느낄 수 있는 능력, 공감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능력”(몰락, 348, 523)과도 다르지 않다. 포개진 네 개의 능력. 감전-느낌-공감-사랑의 능력. 이 능력들을 공유하는 이들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가 바로 느낌의 공동체. 감전의 능력이라는 용어가 제출되는 맥락은 하대(下待)하는 문장으로 시인 릴케를 부정하는 과정에서였다. 중요한 것은 릴케가 부정될 때 그의 말테의 수기 다음 한 문장이 단지 전시되는 데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창문이 열린 방 안에서 죽은 사람 곁에, 그리고 치미는 흐느낌 곁에 있어 보았어야 한다.’ 내게 릴케의 이 문장은 요구하는 문장이고 전복하는 문장이다. 자신을 인용하고선 전시하는 데 그쳤던 인용자 신형철을 향해 강력히 요구하는 문장, 그런 인용자의 의도를 뒤엎고 그 폐부를 찌르는 예리한 문장. 이 문장은 무엇이건느낄 수 있는 차별 없는 공감의 능력에 대해, 눈앞의 특정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신형철은 용산의 비참에 관한 자신의 글을 예로 들어, 릴케의 문장을 전시하지 않았으며 공감의 능력에 기대어 눈앞의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 응답했었다고 말할 것이다. 치명적인 시, 용산이 바로 그 글이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가장 긴급하기에 가장 공격적이고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을 노출한다.

 

사랑의 능력으로 신형철은 용산의 불길 속에서 시적인 것의 내밀한 현현을 본다. 용산에 관한 MBC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오갔던 경찰 무전 교신 한 대목. 신형철은 그 두 개의 육성을 문장으로 써서 옮겼다. 그러므로 그건 육성은 육성인데, 씌어진 육성이다. 그렇게 문장이 된 목소리의 의미를 문법, 대구, 각운 등을 통해 시를 읽듯 읽는다. 그는 그 문장들에서 시를 봤다.”(느낌, 164) 이 문장은 신형철이 왜 문학평론가인지를 선연하게 드러내는, 그 자신의 존재 증명과도 같은 한 문장, “기어코 어디서든 시적인 것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을 비평할 것”(몰락, 16)이라는 한 대목과 맞닿아 있다. 나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 육성들에서마저 시를 보아도 되는가. 다시 물어, ‘기어코 어디서든시를 찾아내고 비평할 것이라는 그 의지가 승리할 때 폐기되고 마는 것은 무엇인가.

 

시너에 붙은 불은 물대포로는 안 된다는 급박한 육성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신형철은 꺼지지 않는 그 불길 속에서 결코 그들의 저항이 진화되지 않을 것”(느낌, 165)임을 본다. 하지만 불굴의 저항이라는, 그가 불길 속에서 느꼈던 그 시적인 것으로는 결코 그들의 죽음을 온전히 지시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니 지시하지 못하는 걸 넘어, 신형철이 감각한 그 시는 그들의 죽음 위를 올라타고 군림한다. 무슨 말인가. 쉬 말할 수 없는 그들의 결단, 그 죽음에의 결심에 대해 무릅쓰고 상상한 끝에 말하면 이렇다. 몸에 옮겨 붙은 죽음의 불길 속에서, 과연 그들은 굴하지 않는 저항적 의지로 결연한 최후를 맞았을까. 그 불길 속에서 이 땅의 고통당하는 자들에 의해 자신의 저항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면면히 이어질 거라 확신하며 죽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아마도 인연의 끝이었며 이별이었고 단절이고 고통이고 회한이었을 것이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마저 기어코시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신형철의 의지가 발굴한 그 시는 신형철 자신이 찾고 싶었던 걸 찾은 것이므로 끝내 그들의 죽음을 향한 진정한 애도에 실패하고 있다는 증좌이다. 그들의 죽음은 비평의 의지가 일방적으로 관철되고 투사되는 대상이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의 죽음은 비평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타는 몸의 불길에서 시를 볼 때, 그들의 죽음은 그 불길에서 시를 보는 자, 그렇게 시를 느끼는 자, 그 느낌의 내밀한 초대에 온몸을 내맡기는 자들에 의해 사유화되고 독점된다. 그런 느낌의 공유에 기초한 공동체는 그렇게 독점적이기에 입법적이고 입법적이기에 끝내 착취적이다. 죽음의 소유권마저도 독점하려는 이들을 향해 죽음의 주인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던 이는 다카하시 테츠야였다. 죽음을 사유화하는 시라면 그 시는 파괴되어야 한다. “모든 사유화(私有化)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동시에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나의 죽음이 나의 것이기를 요구[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15. 이하 공동체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해야 한다고 썼던 건 블랑쇼였다. 그가 말하는 연인들의 공동체는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전면적이고 전폭적으로 기소한다. 그것은 어떤 주권의 문제를 둘러싸고 거듭 드러난다.

 

는 극단의 비천함으로, 에게 걸맞은 자로 만들 단 하나의 수치의 경험으로 끌어내려져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악의 최고 주권 또는 더 이상 나눌 수도 없고 영예조차 박탈당한 최고 주권이 있다. 거기에 경멸 받음으로 드러나는 최고 주권, 삶 또는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하락의 길에 놓인 최고 주권이 있으리라.(공동체, 46)

 

<가자 가자, 신군>에 등장한 오쿠자키 겐조는 부끄러움을 느끼는일본인의 상징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무치[無恥]를 드러냄으로써 사이좋은 동료인 자들의 공감을 타파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전후 일본 사회의 서로 친함의 공감을 거절한다는 점에서 마치 음화(陰畵)처럼 무치를 통해서 유지되는 공감의 공동체를 부상시켰다.[사카이 나오키, 일본/영상/미국: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 최정옥 옮김, 그린비, 2008, 259. 이하 일본/미국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인용들 중 아랫것은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를 부제로 달고 있는 사카이 나오키의 저작에서 뽑은 것이다. 이 한 대목은 블랑쇼의 문장들을 읽는 방편이면서 동시에 신형철의 공감의 능력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도록 이끈다. 블랑쇼는 무얼 말하려는가.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수치의 경험을 통해 끌어내려질 때다. 수치와 비천함은 통한다. 바로 그 수치로 끌어내려지는 건 하락의 길이라는 구절과 잇닿아 있다. ‘수치(羞恥)’가 핵심이다. 수치를 느끼는 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합의된 폭력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자들이 구성한 무치의 연합을 고발하며, 후안무치한 그 낯 두꺼운 공감의 공동체를 부정한다. 수치를 느끼는 자는 왜 끌어내려지는가. 그 또한 무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미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황제가 부과한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둘러싸고 부끄러움이라는 감각 자체를 제거했던 전후 무치의 공동체는 고발되는 즉시 고발한 자를 함께 끌고 내려간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수치를 느낄 수도, 함부로 고발할 수도 없게 된다. 그렇게 사이좋은 동료의 세계는 안락 속에서 지속된다. 블랑쇼는 고통과 죽음을 부과하는 시스템의 구조 자체를 끝장내기 위해 수치의 선택을 통한 자발적인 하락의 길을 걷는 중이다. 그렇게 끝장내는 바로 그 하락의 길에 최고 주권이 있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그 주권이 바로 그 길 위에 있다. 그 하락의 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이 걸어가도록 강제하는 어떤 운명적 악(). 그 비극적 하락의 길 걷기가 바로 몰락이며, 몰락의 주권적 힘이다. 신형철은 쓴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몰락, 5) 블랑쇼의 몰락은 급진적인 윤리학과 결합될 수 있는 주권적 사고의 실험으로 정향되어 있다. 신형철의 몰락도 윤리를 말한다. 하지만 기소를 거절하는 신형철의 비평에는 내리치는 주권에 대한 사고가 체계적으로 마멸되어 있다. 용산의 죽음을 사유화하는 시, 내밀한 공감과 사랑의 능력으로 발굴했던 그 시는 진정한 주권의 시일 수 없다. 사랑의 능력은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느낌, 9; 몰락, 348), 그 사유화하는 신비의 장막을 걷어치우는 힘이어야 한다. 사랑의 능력은 시스템을 폐지하는 주권적 힘, ‘다가오는 통치로 고양되어야 한다. “연인들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를 붕괴시키는 데에 있다.”(공동체, 78)

 

다시 돌아가자. 블랑쇼적인 몰락의 길 위에 있는 최고 주권은 왜 더 이상 나눌 수도 없고, 영예도 박탈되며, 경멸받는가. 그가 사고하는 공동체는 어떤 생산적 가치도 목적으로 삼지 않”(공동체, 26)기 때문이다. 생산에 따른 통념적 이윤을 거절함으로써 생산-분배의 권력구조를 기각하는 주권의 선포. 파멸하는 권력의 눈에 그 선포는 나눌 것이 없기에 경멸될 뿐이다. 그 선포의 시간을 예증하는 ‘685월의 거리아무 계획 없이,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는 일종의 -행동[非爲]’의 시공간이었다. 대의된 권력이 주도적으로 수립한 생산의 계획을 거절함으로써 시스템에 의해 수여되고 할당되는 모든 영예들을 전면적으로 박탈하는 주권. 685월이라는 파국의 도래 속에서 구별 없이 처음 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했던 열림. 그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마치 이미 사랑받았던 자와 같았다.”(공동체, 51) 처음 만났지만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연인들의 공동체.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걸었던 거리는 어디인가. 그들은 시스템의 합의에 따라 부과된 죽음을 마주하면서 수치를 경험한 국외자이자 이방인이다. 그들이 걸었던 그 길은 끌어내려지는 길, 하락의 길 바로 그 위였다. 그들은 몰락하는 자들이었고, 몰락함으로써 죽음에의 책임성이라는 급진적 윤리의 주권을 선고할 수 있게 된 자들이었다. 블랑쇼는 이렇게 적었다. “일종의 메시아주의가 그 현전의 자율성과 무위를 선포한다.”(공동체, 56) 거리 위를 거니는 연인들의 힘, 바로 그 사랑의 힘은 시스템을 내리치는 신적인 힘, 메시아적 힘과 그렇게 결합한다.

 

3. 고통의 증여, 사랑의 파송(派送)

 

두 개의 사랑. 감전, 느낌, 공감, 사랑의 능력과 주권적/메시아적인 것으로서의 사랑의 능력. 물음을 이동시키자. 또는 이행시키자. 두 사랑이 거하는 자리는 어디인가. 감전으로 시작하는 사랑의 자리는 안쪽이다. 주권으로 시작하는 사랑의 자리는 바깥이다. 두 사랑 모두 내밀함사건열림에 관하여 말한다. 하지만 두 사랑이 말하는 몰락의 경험이 같지 않았던 것처럼, 내밀함의 사건 또한 같지 않다. 신형철의 문장들, 거듭 다시 돌아와 읽어야 할 한 페이지.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느낌, 9; 몰락, 348)

 

신형철에게 사랑은 짧은 순간의 드문 사건이다.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것은 은밀한 초대”(몰락, 361)에 대한 내밀한 내맡김이다. 미묘하고 은밀한, 그래서 암약(暗躍)’이라고 표현되는 느낌의 공유. 초대(招待)’라는 것에 관해 좀 더 생각하게 된다. 초대는 부르고 기다리는 것이다. 초대하는 자는 바깥으로 나가라고 일갈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좋은 낯으로 손짓한다. 초대는 안쪽으로 입장하길 청한다. 신형철에게 사랑의 능력이란 어떤 특정한 느낌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능력”(몰락, 348)이다. 그것은 느낌의 세계 으로 들어갈 수있는 능력이며, 입장이후 서로는 공유된 느낌의 세계 안에서만난다. 그렇게 안으로 입장할 수 있는 이들이 사랑하는 이들이며 그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초대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속박하고 얽어매며() 차단하고 막고 방어한다(). 초대는 바깥을 청해 안으로 들인다. 그것은 분명 매혹이되 미혹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매혹이다. 초대는 외부를 내부화한다. 안으로 들어온 바깥을 단속하고 관리한다. 그런 한에서 초대는 치안이다. 초대는 안쪽에 만들어진 표상을 들어온 바깥쪽에게 세계로서 부과한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라고 했던 건 히틀러였다. 그 표상을 거절하는 이들은 초대한 자에 의해 언제나 배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초대한 자는 누구인가? 입법자(立法者). 법의 설계자다. 법 안으로 초대받은 자들이 끝내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법의 문 밖에서 기다리다 죽는 상황을 연출했던 건 카프카였다. 초대는 적대다. 초대는 적대의 아름다운 기술이다. 그런 초대를 사랑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그런 초대를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꼽는 신형철은 법의 설계를 인가한다. ‘싸우는 형이상학과 싸우고 있는 투항하는 형이상학을 수락한다. 그렇게 인가하고 수락했음에도 그의 자리는 어디인가. 법의 문 밖이다. 인가하고 수락했기 때문에 끝내 법의 문 밖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느낌, 208)는 신형철의 말은 옳되 빈말이다. 이렇게 다시 써야만 한다.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

 

법과의 싸움은 바깥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과정이다. “지배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영역인 바깥은 권위 단일성 내면성에 대립하기를 요구한다.”(공동체, 24) 그 바깥은 쟁투의 현장이다. 적대적인 힘들이 서로 맞부딪는 시공간이다. 그것은 안으로 초대된 기적적인 교류의 현장이 아니다. “독특한 내밀성이었던 바깥법을 파기한다”(공동체, 31). 바깥의 내밀성을 신형철이 말하는 은밀한 초대와 같은 것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것은 죽음의 대속(代贖)”(공동체, 26), 그 급진적 윤리의 최고 주권을 선포하도록 충격하는 힘의 표현이지 바깥을 안으로 포획하기 위한 지배의 고혹적인 기술로서의 은밀함이 아니다. 바깥은 법의 설계자들이 수행하는 모든 명명(命名)을 초월한다. 그 바깥에는 실존을 빛나게 하고 법열(extase, 脫自態)을 통해 실존을 노예적 굴종의 형태로부터 해방시키는 시간이 간직”(공동체, 35)되어 있다. 여기에다 사카이의 한 문장을 덧대어 읽어 보자. 사카이는 블랑쇼와 용접된다. “여기 예시되고 있는 것은 (...) 인종 민족 국민과 같은 폐쇄구역으로 분리된 사람들과 공재화하려는 탈자적(脫自的) 노력,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노력이다.”(일본/미국, 299) ‘탈자적 노력이란 자기 바깥으로의 나감이고 이탈이다.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이들은 시스템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는다. 통치불가능해지고 계산불가능해진 그들에 의해 법의 명명은 정지한다. 그 탈자의 과정 속에서 노예의 굴종적 삶을 알아서 선택케 하는 시스템은 정지를 선고받는다. 사카이가 인용한 공재성(共在性)같은 시간을 함께 사는 일이다. 그것은 같이-있음의 가능성”(공동체, 36)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앞서 말한 수치에 이어 바깥, 탈자, 공재성까지 내게 블랑쇼와 사카이는 서로 용접된 채로 개념의 연대를 맺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신학 또한 바깥이라는 개념의 칼을 틀어쥐고서 저들이 구성한 기소의 연합에 뛰어들고 있다.

 

초대란 좋은 낯빛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 초대에 내밀하게 응할 때 초대한 자와 초대에 응한 자는 동일한 세계 안에 함께 거주하게 된다. 반면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 세계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 신비. 가라타니가 따르는 모세의 신이 기소하는 게 바로 그 신비인 한에서, 가라타니의 신학은 신비의 장막을 찢는 유물론적 신학이다. “모세의 신을 가지고 오면, 신들이나 혹은 어떤 신비적인 것에 호소하려는 사고가 모두 부정되어버리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한 유물론이 됩니다.”[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4, 257. 이하 세계종교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그가 말하는 모세의 신은 안으로 초대하지 않는다. 그 신은 엄중한 얼굴을 하고서 사람들을 향해 고지한다. “‘공동체에서 나가라라고 이른바 사막에 머물라라고”. 그 신은 약속의 땅은 가나안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속의 땅은 사막이다. 사막은 어디인가. 유대의 저 광야이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 황야는 현실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세계종교, 259)이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함께 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초대/구속하는 모든 공동체들의 이 아니라 바깥에서 사는 삶이다. 그 바깥이 모세의 신이 약속한 땅이다. 바깥을 약속하는 신과 계약을 맺은 자들, 항상 사라져가는 사람들”(세계종교, 261)에 의해 내부화하는 치안의 공동체들에는 폐절(廢絶)의 순간이 고지된다. 그때 그 공동체들은 사막으로, 또 바깥으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통고하는 이들을 희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화해의 고향을 위해 고향을 잃은 자들과 함께 고향이 없는 자들이 된[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 이신건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0, 245. 이하 제목과 쪽수만 표시.] 사람들이라고 했던 건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었다. 그 또한 사막에서 사랑의 힘의 근거를 본다. 그의 사랑은 파국을 도래시키는 힘이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promissio)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파송(missio)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성령 안에서 자신을 비워서 몸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안쪽바깥쪽이 될 것이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희망의 신학, 246) 강렬한 선포이다. 집계하고 포획하고 내부화함으로써 몸집을 불리는 모든 구조들이 파국의 도래의 약속, 시스템을 향한 사랑의 파송/내리침에 의해 전면적으로 되돌려지는 시간. 모든 안쪽이 온통 바깥쪽이 되는 시간, 그 임박함.

 

신과 대결함으로써 더욱 뜨거워지는 시적인 것이란 신형철에게 느낌의 공동체안으로 입장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은 은밀한 초대에 응할 수 있는 능력과 포개져 있다. 그는 쓴다. “시적인 것은 서정적인 것보다 크다. 서정적인 것의 여집합에서 새로운 것이 솟아오른다.”(몰락, 366) 이렇게 말해야 한다. 사막은 느낌의 공동체보다 크다. 느낌의 공동체의 여집합에서 새로운 당파성이 솟아오른다. 벤야민은 당파에 가담할 수 없는 자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신형철이 침묵하지 않고 비평을 하는 한, 그는 현재 당파에 가담 중이다. 싸우는 벤야민과 공감하는 고바야시 히데오를 동시에 인용한 그가 그 둘 모두를 감당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하지만 이내 고바야시의 입장에 섰을 때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때, 끝내 보편성이나 객관성에 대한 야망이 많지 않다”(몰락, 7)고 말하는 바로 그때, 신형철의 당파성은 은폐된다. 아니 잠류하거나 복류한다. 기소하는 문장을 쓸 때 고통스럽다는 그 실존의 문제는 운명적 필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코 당파에의 가담과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모세의 신과 계약했던 바깥의 사람들, ‘항상 사라져가는그들이 신형철의 당파성을 기소하는 중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적대의 구도가 자꾸만 가려지는 이때, 필요한 것은 연합과 공동체의 구성을 외치는 당위들의 남발이 아니라 적대하는 당파성을 인정하고 회복하고 표출하는 방법과 태도에 관한 사고의 실험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른바 정치적인 것의 밑바탕이 되어야함을 촉구하고 강제하는 것이다.

 

사막이라는 바깥에 살면서, 다시 말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은 무얼 하는가. 가라타니는 말한다. “상업을 하는 것입니다. 즉 사막을 건넌다는 것은 바로 상업적인 행위입니다. (...) ‘교통인 것입니다.”(세계종교, 260) 자본-내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를 끊은 힘으로 원시공동체의 호혜적 증여를 높은 차원에서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가라타니의 처방전 밑바닥에는 신과의 약속에 의해 보증 받는 사막이라는 지평이 깔려 있다. 그런 사막과 바깥에서의 증여상업적 행위라는 말의 뜻이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이뤄지는 그 상업의 행위, ‘교통의 행위야말로 치안의 공동체들을 끝내는 힘이다. 이 증여와 교통의 고지하는 힘에 관해 블랑쇼는 가라타니와 함께, 가라타니처럼 말한다. “본질적인 것은 가나안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주는 사막을 목표로 하고, 이제 진정한 약속의 땅은 사막으로의 다가감이다. 진정한 거처의 조건이 결핍된 이 영역에, 알 수 없는 격리 가운데, (...) 종말에 다가갈 수 있는 (...) 떠돎의 가능성 그 자체가 남아 있다.”[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0, 98~99. 이하 제목과 쪽수만 표시.] 항상 사라져가는 그들이 폐쇄적 공동체들 사이에서 서로 증여하고 교통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이라는 선물이 그것이다. 가나안이라는 치안의 땅이 아닌 사막으로의 이주에 관하여, 그 떠돎의 의미에 관하여 말했던 블랑쇼는 이렇게 적었다. “너 대신 나 스스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면서, 너와 나 너머에서 이 선물을 받으면서.”(공동체, 23). 죽음과 고통이라는 어떤 선물, 고통의 순수증여. “선물 또는 비움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결국 아무 줄 것도 없고 아무 희생할 것도 없기에 선물을 주고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다.”(공동체, 33) 블랑쇼의 공동체는 고통의 증여의 공동체, 고통을 교통시키는 공동체이다. 고통의 증여는 사막이라는 바깥에서의 떠돎 속에서, 그 행려(行旅)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들 행려의 사람들이 시스템에 종언을 선고하고 파국을 도래시킨다. 고통, 그 신학적 유물론의 정동(情動). 증여, 그 신학적 유물론의 어떤 운동.

 

4. 신학적 유물론의 진리공정

 

느낌의 공동체는 문학적 공동체로 드러난다. 신형철에 의해, 혹은 그와 함께 서로 감전되는 시인과 독자의 만남은 이렇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느낌의 세계에서 날아오는 매혹적인 초대장이다. 사랑이 발생하는 순간이 이와 다르지 않다. 초대를 수락하는 순간 시인과 독자는 같은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반면 그 느낌의 세계에 입장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의 시는 열리지 않는다.”(몰락, 348) 시인과 독자 사이를 오가는 특별하고 특정한 느낌의 초대장. 그것을 받고 은밀하게 공감하는 능력에서 사랑은 발생한다. 사랑은 그들 시인과 독자와 비평가를 같은 세계안에 거주하도록 한다. 신형철의 독서론이 그의 사랑론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초대다. 초대에 불응하는 이들은 감전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며, ‘같은 세계의 바깥에 놓이는 자들이고, 궁극적으론 사랑의 능력을 망각한 자들이다. 초대는 내밀한 미감(美感)의 신비한 교류로 안과 밖을 아름답게 가른다. 이것이 “‘익명적 중얼거림’(들뢰즈)의 아름다운 연쇄”(몰락, 363)라는 한 구절의 실질이다. 초대에 감전될 때 시에서 우리는 4인칭 단수의 노래를 듣(몰락, 358)게 됨으로써 1인칭이라는 동일성의 해체를 경험하고, “‘비인칭적 개별성’(들뢰즈)의 선언”(몰락, 362)에 다다른다. 헌데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신형철의 비인칭적 익명성을 기각하는 익명성이 블랑쇼의 익명성이다. 그것은 또 다른 문학적 공동체의 메시아적 주권성에 관하여 다시-다르게 말하도록 이끈다.

 

블랑쇼에게 독서란 작품을 작품 자체로, 그 익명의 현전으로, 있는 그대로의 격렬한 비인칭의 긍정으로 돌려주기 위해 작가를 무효화시키는 놀이이다.”(문학의 공간, 282) 작가를 무효화시킨다는 것은 독서행위에 들어 있는 작가와 독자의 일방적 관계를 부순다는 거다. 또는 작품 안에 박아놓은 작가의 권위적 인장을 도려낸다는 거다. 작가의 이름과 절대적 인칭이 제거된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텍스트. 그것은 작가가 관장하는 단일한 의미를 꺾고 뒤트는 독자들의 즐거운 난장이 된다. 하나의 긴장이 된다. 블랑쇼의 독서론이 그의 사랑론이다. 그의 사랑은 격렬한 비인칭의 긍정 속에서, 그 익명의 난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사건적 사랑. 그런데 그 사랑은 재능이다. 타자의 재난을 마주하고 앓을 수 있는 재능. 치안의 공동체들 바깥에서 재난의 고통을 증여하는 재능, 사막 위의 재능. 그것은 다음과 같은 재능을 배격한다. “피카소에게, 자신의 재능을 제외한 모든 것그의 연인들을 포함한 세상의 전부은 순수한 도구였다. 피카소라는 형상(eidos)은 모든 힐레(hyle, 질료)를 제 뜻대로 주물할 수 있는 자기특권자이며 입법자였고 (...) 그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짓이기듯이, 세상과 이웃을 그의 예술 속으로 짓이겨 넣었다.”(물매, 115) 짓이기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자기 입법의 붕괴를 견디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개인 주체로서가 아니라 익명적 비인칭적 박애의 움직임에 참여한 시위자로서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요구”(공동체, 53)이다. 군림하며 명명하는 자들이 부과한 모든 이름을 이탈하고 범람하는 힘. 그것이 익명적 비인칭적 박애의 운동이다. 사랑은 박애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심장 또는 법.”(공동체, 49) 재난 속으로 뛰어든 익명적비인칭적 사랑은 할당된 기능들, 의무들, 배당된 권리들, 영애들을, 줄여 말해 모든 이름들의 인장을 폐기하고 절단한다. 익명적 사랑의 힘은 윤리적이고, 윤리적이기에 주권적이다. 새로운 법이 사랑의 심장에 의해 선포된다. 그때 익명의 공동체는 신의 보증으로 다시 모든 것의 소유자가 된다.”(공동체, 33) 익명, 메시아적 힘의 다른 말.

 

익명적 사랑은 시스템 안에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고 길들일 수 없는 끈질긴 불안”(희망의 신학, 348), 싸그리 태우는 불의 폭풍을 은닉한다. “이 지금(Jetzt) 속에서 진리에는 폭발 직전의 시간이 장전된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I,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5, 1056.] 그러므로 사랑의 진리는 공이를 때리기 직전(直前)’의 총이다. 때리기 바로 직전이지 이미 때린 것은 아직-아니. 벤야민의 동시대인프란츠 로젠츠바이크는 구원의 별속에다 이렇게 적었다. “만일 그때에 아직-아니가 모든 구원의 조화에 새겨진다면, 당분간은 바로 현재의 순간이 종말을, 가까이 근접한 것이 우주적인 것과 지고의 것을 대표한다는 사실만을 찾을 수 있다. 인간과 세계의 완전하며 속죄적인 유대적 결합은, 이웃과 언제나 항상 충분히 가까우며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시작된다.”[케네스 레이너드 외, 이웃, 정혁현 옮김, 2010, 도서출판b, 38쪽에서 재인용.] 내 바로 곁에서 나를 압도하는 이웃의 짓누르는 하중은 실로 두렵고도 두렵다. 그런 이웃들과 함께 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위기와 불안이 폭발하고 끝난 뒤, 위기가 해소되고 불안이 잦아든 뒤의 평온한 사건이 아니다. 구원은 그런 사후적 시간 속에 있질 않다. 구원은 언제나 항상, ‘아직 아닌이라는 위기의 시간 속의 사건이다. 구원은 바로 직전의 시간이지 화해와 완성과 조화의 시간이 아니다. 구원은 구원의 조화와 합의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메시아적 구원은 그 자신의 도래를, 그 사후적 조화의 사태를 거절한다. 메시아적인 힘의 도래는 그래서 언제나 미래(-)’. 그것은 늘 아직오지 아니한다. 아직 아닌, 그래서 늘 바로 직전인 시간 속에서 파국은 매번 도래한다. 구원은 들어 올려져(携擧) 쉬게 되는 삶(休居)이 아니다. 구원은 나날의 일이다. 사랑은 구원의 일이다. 이제까지 썼던 구원이라는 단어를 주권으로, ‘주권의 선포로 바꿔 읽자. 그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19:19)는 말씀은 발사되기 직전의 총탄이 된다. 사랑이 총탄이 될 바로 그때, 복음(福音)은 법의 설계자들을 내리치는 주권적 로고스(말씀)로 된다. 그것은 어떤 공정(工程)에 다름 아니다. 신학적 유물론의 진리공정.

 

익명적 사랑이 합의된 조화 속에 끝없는 위기와 폭발의 계기를 장착하는 주권적인 것이었듯, “표현을 갖지 않는 것은 이의제기(틈입)를 통해 조화의 그러한 흔들림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벤야민, 괴테의 친화력,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1, 170. 이하 친화력으로 줄이고 쪽수만 표시.] 표현을 갖지 않는 것이란 무엇인가. 벤야민은 사랑에 관한 괴테의 소설 친화력을 읽으면서, 스쳐 지나기 십상인 소설 속 조그만 액자 이야기(별난 이웃 아이들)의 파괴력에 주목한다. 그 액자 안의 짧은 사랑이야기가 화해와 조화로 귀결되는 소설 전체의 사랑이야기를 조목조목 붕괴시키고 있다는 것. 주인 같은 소설 속에 노예의 자리를 얻어 틈입한 그 액자 이야기가 주인의 소설을 끝장내고 소설의 주인이 되는 이의제기의 순간. 표현을 갖지 않는 것이란 바로 그 전복의 순간을 가리킨다. 표현을 갖지 않는 것은 본질과 미적 가상의 혼합을 저지하는 비판적 힘(Gewalt)이다. 그리고 그 힘 안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힘, 다시 말해 현실 세계의 언어를 규정하는 진정한 것이 가진 숭고한 힘은 모든 아름다운 가상이 은폐하는 거짓 총체성절대적 총체성을 박살”(친화력, 170)낸다. 그 힘은 이른바 정치의 미학화를 끝낸다. 그리고 그 힘은 어떤 신학의 지평 안에 놓여 있다. 액자 속에 들어 있는 젊은 연인의 사랑에 관한 벤야민의 문장들.

 

신과의 유화 속에서그와 관련된모든 것을 무로 되돌려버린 다음 유화한 신의 얼굴 앞에서 비로소 무로 돌아간 것들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신과의 진정한 유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에의 도약은 두 연인이각각 신 앞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유화를 위해 몸을 던지는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유화에 대한 각오 속에서만 비로소 두 사람은 화해하고 서로를 얻을 수 있다.(친화력, 178쪽)

 

위의 문장들은 진정한 유화에 따르는 모든 파괴적인 것”(친화력, 178)이라는 한 구절로 오롯이 흘러든다. 신과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 권하고() 서로 응하는() 유화 속에서만 모든 것들은 무()로 되돌려지는 파국을 맞고 동시에 다시금 되살아나는 신생을 경험한다. 액자 속의 젊은 연인은 신과의 유화에 대한 각오 속에서 사랑을 위한 죽음으로의 도약을 감행한다. 벤야민에게 법의 폭력에 관한 비판이 폭력에 관한 역사철학으로 드러나듯, “모든 미는 계시와 마찬가지로 역사철학적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친화력, 201) 거짓 화해를 말하고 사랑을 장사지내는 소설 전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액자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사랑을 위한 죽음으로의 도약이라는 키에르케고어적 사랑에 기댄 것이면서, 동시에 신과의 진정한 유화에 따르는 파괴적인 단절과 정지로서의 역사철학적 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법을 파괴하는 메시아적 힘에 맞닿은 것이기도 하다. 벤야민에게 사랑의 힘이란 그렇게 미학과 신학과 역사철학이 흘러드는 합수머리. 그 안으로 윤리가 흘러드는 수로를 확장하기 위해 벤야민의 이의제기비약불사(不死)’에 블랑쇼의 이의제기비약불사를 용접할 수 있다. 이 두 사유의 이질적 질감은 내게는 어떤 공통의 의지와 지향 안으로 자꾸만 용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블랑쇼는 이렇게 적었다. “결핍이란 모든 형태의 일반적이고 안일한 초월성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이다. (...) 결핍은 이의제기를 요청한다.”(공동체, 22)

 

타자의 이의제기는 타자에 대해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나로 하여금 위기와 흔들림의 끝없는 지속 안에 있기를, 끝내 비움과 하락과 몰락의 길 위에 있기를 요구한다. 그 요구를 감당했던 이들이 685월의 연인들이었고,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시스템의 붕괴였다. 블랑쇼는 사랑의 윤리적/주권적 힘을 선포하는 그들을 두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자 불사의 존재”(공동체, 13)라고 썼다. 사랑은 죽음을 막을 수 없지만 죽음의 한계를 돌파하고 초월하는 힘이라는 것. 불사의 연인, “불멸의 주권. “여기서 사랑은 비약을 통해 최고로 높은 정신성에 이르기 위한 변증법적 방법으로 제시된다.”(공동체, 73) 이 문장은 신과의 유화에 대한 각오 속에서 남편의 죽음을 대속하기 위해 도약했던 신화 속 알케스티스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 도약하고 비약하는 사랑은 죽음의 한계를 뚫고 새로운 삶을 열어젖힌다. 그때 사랑은 불사의 능력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개시이다. 괴테의 액자 속에서 신에게로 도약하고 있는 젊은 연인의 축복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의 비약은 우리가 모든 죽은 자들을 위해 품고 있는 구원에 대한 희망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 희망이야말로 결코 지상에서 존재의 불로 타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불사() 신화의 유일한 권리이다.”(친화력, 212) 일상을 파열하며 돌발하는 옛사람들의 피와 고통에 대한 각성의 순간을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것. 과거의 고통을 오늘의 고통과 용접함으로써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나날의 일, 역사적 유물론의 과제. 이 과제를 수행하는 자들이 신과의 진정한 유화를 위한 각오 속에서 수행하는 뜨거운 도약. 과거로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Tigersprung)’이란 바로 그 신학적 유물론의 도약을 가리킨다. 그것은 메시아적 힘에 의한 구원과 희망의 내실에 다름 아니다. 희망은 불사의 주권적 힘이다. 그런 한에서 희망은 불사의 당파성이다. “오직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희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친화력, 213) 이 최후의 문장은 타오르는 불사의 불꽃 속에서, 꺼지지 않는 재[] 속에서 매번 다시 경험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는 저 합수머리 쪽을 되돌아본다. 그러면서 정치학과 윤리학과 미학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느낌, 19)는 말에 관해 더 생각한다. 그 세 가지가 한 몸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한 몸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고 들을 수 없다. 말했음에도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하면서도 말해질 수 없는 것. 이 글은 지금까지 파국을 도래시키는 메시아적인 힘 안에서 그 한 몸의 삶에 관해 말하기 위해 싸웠다. 아니 싸우려고 애썼다. 지금 노곤해진 방점은 말했다에 찍히지 않고 싸웠다에 찍힌다. 아니 싸웠다에 찍히지 않고 애썼다에 힘없이 찍힌다.

 

 

 



 
 
 

 

2011. 3. 9.

 

블로흐의 레닌: "Ubi Lenin, ibi Jerusalem."

 

레닌이 있는 곳에 예루살렘이 있다.

 

레닌의 정치, 레닌의 신학. 다시 말해,

 

공이가 레닌이라는 탄환을 때리기 바로 직전(直前). 그 시간 속.

 

 

 

 

 



 
 
2012-03-11 04:58   댓글달기 | URL
위의 한 문장을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건네받은 한 문장에다 겹치고 또 포갠다. 어떤 촉발의 감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