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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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제국중의 하나이고 지중해 전체를 손에 넣었던 나라임에도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역사속에서 홀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대표적인 오스만역사가인 도널드 쿼터트의 이 책 '오스만제국사'를 보면 본인도 오스만제국사를 강의할만한 개설서가 없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오스만 역사가 이렇게 홀대받는 것은 아마도 서양사, 동양사로 구분되는 역사 구분속에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는 중동의 역사는 어느 쪽에도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게다가 상당기간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무슬림의 기억을 유럽은 지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스만제국이 번영하고, 문명화가 더디었던 16~18세기에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모범이었다. 안정된 정치체계 및 효율적인 국가관리를 본받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커피, 튤립 등 문화생활과 천연두 접종과 같은 획기적인 의학적 혜택을 모두 오스만제국에서 얻어왔다. 현재의 군악대 미국 미식축가 경기시 고적대 등의 문화역시 오스만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유럽과 오스만의 상황이 역전이 되고 나서 서구 유럽은 오스만을 야만스럽고 방탕한 존재로 왜곡하였다. 그러한 인식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동서양사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오스만제국은 서아나톨리아 지방에서 1300년대에 모습을 갖추며 다른 투르크 국가들과의 경쟁을 거치면서 점차 터키지역의 패권을 차지한다. 마호메드 2세기 제위시절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비로소 터기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비잔틴제국을 1453년에 정복하긴 했지만 사실 비잔틴은 1200년 초 부터 그 힘을 갖지 못했고, 콘스탄티노플 역시 제대로된 수도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1024년의 제4차 십자군전쟁당시 십자군에 의한 약탈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는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제4차 십자군원정은 이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비잔틴제국에 대한 침략이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계속적으로 영토를 넓혀가며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1450년대 오스만 제국의 영토

 

지중해 전반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당시 주변지역에 강한 제국이 없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정복한 국가와 가신의 관계를 맺으며 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속국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 오히려 오스만제국에 편입되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 뿐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가 함께 공존하여 상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인재를 활용하기에도 유리했다. (오스만정부의 이슬람법은 강제로 개종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함께 데브시르메라는 소년 공납제도 있었다. 농촌의 사내아이 중 훌륭한 아이들을 선발해 수도 혹은 중심도시에서 교육을 받게 해 이들이 오스만제국의 행정을 관장하거나 군대의 핵심인재가 되었다. 데브시르메라는 제도를 통해 훌륭한 인재들이 등용되는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런 오스만제국은 1683년 합스부르크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이후 유럽과 지중해의 패권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1683년의 패전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이후로 오스만 제국은 예전만큼 강성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유럽세계가 절대왕정기를 거쳐 중앙집권화되면서 국력이 급작스럽게 강력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오스만제국은 뒤쳐진 국가체계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전쟁에서의 방어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전처럼 쉽게 함락할 수 있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공격에 엄청난 전비가 소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역시 오스만제국의 힘을 약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이후 오스만제국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국제정세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흑해 대부분의 권리를 상실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불안을 느낀 서구 유럽의 개입으로 러시아에 빼앗긴 땅의 상당부분이 독립 혹은 나눠먹기식 분리가 시행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 세계제1차대전시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던 오스만제국은 전후 거의 대부분의 땅을 잃어버린다. 승전국인 영국은 이라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을 얻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차지했다. 그리고 1922년 오스만제국은 터키 공화국이 된다.

 

오스만제국과 더불어 생각해 볼 몇가지가 있다.

오스만제국이 힘이 최고조에 달한 16세기 말 17세기 초 오히려 오스만제국의 경제적 중요성은 감소하는데 이는 서유럽의 신대륙 정복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지중해 중심의 경제가 오스만제국이 지중해의 패권을 가져가면서 대서양으로 경제의 축이 옮기는 자극이 되었다.

 

최근에 있었던 코소보학살과 관련하여 배경이 되기도 한다. (원인이 아니라) 17세기~18세기에 있었던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와의 전쟁과정에서 세르비아 정교회신도들은 코소보를 떠나 보스니아 동부로 이주하고, 그 자리에 알바니아인들이 들어서게 된다. 민족적 갈등의 배경이 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쿼터트의 오스만제국사에서는 논란이 될만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1915~6년에 수도 이스탄불에서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이다. (최소 50만) 이에 대해 저자는 비단 오스만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님을 주장한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아메리카, 유럽에서 그러한 국가에 의한 탄압이 부지기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굉장히 악화되었음을 반증한다고 설명한다.

 

후기의 오스만제국의 통치방식은 그다지 반갑지 않지만 서양의 역사를 바꾼 오스만제국과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동양과 서양의 가교역할을 한 오스만제국은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스만제국의 중요성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스만 제국을 연구하고, 그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야 하는 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그 역사의 거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관용적인 통치 모범 때문이다. ... 오스만제국은 수세기 동안 피지배자들을 크게 압박하지 않고 통치해왔다. 오스만 정치 체제에서는 위정자들과 군사령관들이 피지배자들의 종교활동을 - 순니파, 시아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카톨릭 등 어떤 형태의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이는간에- 보호하도록 규정해놓았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경전의 사람들',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슬람의 관용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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