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RA 테라 :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 -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
리처드 험블린 지음, 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테라 : 광포한 지구, 인간의 도전>이라는 이름의 책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책은 말 그대로 광포한 지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소재는 다음과 같다.


 - 1755년 리스본 대지진

 - 1783년 유럽기상이변

 -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 1946년 하와이 힐로 쓰나미

 

지은이가 이 네가지 주제를 선택한 것은 '지구와 대기사이의 상호연관과 과정에 대한 많은 실마리를 제공했고, 각 사건이 과학적 이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선별되었다.' 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지진을 이야기할 때 많이 거론되는 사건이다. 본격적으로 지진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지진학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리스본은 가장 종교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으로 보던 신중심의 세계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또한 리스본 대지진 피해를 돕기 위해 유럽 각국의 원조가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당시 협력관계였던 영국의 원조가 컸고, 반대로 프랑스의 경우는 원조를 하지 않았지만 국제 원조의 시초가 된 사건이다. 이 뿐만 아니라 카르발류(폼발 후작)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지진피해 파악과 재건은 재난관리의 기틀을 닦았다.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가 대두되긴 하였지만 종교재판(개신교도 이에서 자유롭지 못한)등 종교의 힘이 여전히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때에 리스본 대지진은 본격적으로 신중심 사회가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1783년 유럽은 이상했다. 몇달씩 운무(짙은 안개)가 유럽전역을 뒤덮었고, 잦은 폭풍우와 낙뢰에 의한 피해가 지속되었다. 이 사건은 아이슬란드 화산 분화가 지속되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대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철학자 및 과학자들이 이런 현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신학적인 설명이 아닌 과학적인 설명을 시도하게 된다. 아직 언론이 제 모습을 갖추기 전이었지만 언론들은 대기 불안정 현상에 대해 특집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언론의 역할이 점차 커지게 된다.

이 때 유럽에 거주했던 벤자민 플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하게 된다. 파리의 한 집에서 피뢰침을 설치하려고 하자 종교적인 이유로 이웃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후에 공포정치로 유명한 로베르피에르가 이 사건의 변호를 맞게 된다. 기상이변을 더 이상 신의 섭리로 보지 않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인도네시아 순다해협에 있는 크라카타우 화산폭발은 역사상 최고의 폭발 화산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동인도회사 등 주변에 많은 상선들이 정박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이 화산폭발을 경험했다. 자바와 수마트라 섬에는 수십미터의 쓰나미가 닥쳤다.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은 최초로 세계적으로 연구된 화산폭발이다. 당시 발명된 전신기술의 발달로 화산에 대한 소식이 즉각 전세계로 타전되었고,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화산폭발의 심각성과 화산폭발로 인한 기상효과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46년 하와이 힐로 쓰나미는 태평양에 쓰나미 경보시스템이 만들어지게 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힐로 섬에 쓰나미가 닥쳐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 당시 미국의 비키니섬 원폭실험이 계획되어 있어 많은 과학자들이 하와이에 머물러 있었다. 해양학자들은 즉각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를 토대로 쓰나미 경보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왔다.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과학적인 대응책을 낸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재해의 힘은 과학을 무력화 시키곤 하고, 인간이 항상 재해관리에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지질학자들이 일본 동해에서 지진이 날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일본 동북부지역 지진해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예측했다고 해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앞으로 30년 이내에 지진이 날 확률~'이라는 식의 예측은 실제적인 경고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예측 후에 예측지점이 아닌 간사이 지역 고베에서 1990년대 초반 지진이 발생해 버려 과학자들의 예측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와이 경보시스템의 경우는 1946년 쓰나미 이후 효과적인 경보체계로 자리잡았지만 경보가 내려졌다고 항상 쓰나미가 닥친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경보에도 쓰나미가 오지 않자 사람들은 경보체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칠레 지진에 의해 힐로 지역은 다시 쓰나미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경험하게 된다.

 

재난관리가 오히려 퇴보되는 모습도 보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해 미국 남서부지역이 초토화되었지만 재해복구에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완전 복구가 되지 않았다. 재난관리를 시작하는데도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190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는 지진 발생 하루만에 연방정부에 의한 복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트리나 피해에 있어서는 100년 전 보다 못한 대비책을 보였다.

동남아시아 쓰나미의 경우 몇 몇 학자들에 의해 쓰나미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전달할만한 네트워크가 동남아시아에 없었다. 한쪽에서는 쓰나미가 발생해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해당지역은 정보가 전혀 없었다. 여기에는 이런 경보체계에 대한 비용도 관련이 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런 경보체계에 대한 예산을 아까워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제상황도 역할을 했을 테지만,

 

때로는 과학보다 경험이 앞서기도 한다. 쓰나미에 대해 원주민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일본의 격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바다가 갑자기 사라지면(멀어지면) 최대한 바다에서 멀리 도망가라는 옛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할로 쓰나미 당시 공사중이던 인부(원주민)들은 바다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경고했지만 문명인들(? 백인들)은 재미있는 광경이라며 오히려 바다를 보려고 했다.

개발관련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 동남아시아 쓰나미에 있어서도 방글라데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었다. 개발이 덜 되었기 때문에 맹그로브 숲과 산호숲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는 쓰나미의 완충작용을 했다. 개발의 한가운데 있던 휴양지들은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던 것과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통해 발전 해 왔지만 그것이 항상 발전만은 아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개발은 인간을 더 위험한 환경에 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점점 더 지질학적으로 위험한 곳에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다. 광포한 지구와 인간의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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