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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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리스본은 지리상 발견의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스페인과 더불어 15,16세기 활발한 해외 탐험을 통해 교역로를 확보하고 신대륙의 많은 나라를 정복했다. 신대륙(브라질)에서 발견된 금광은 리스본을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리스본은 또한 가장 강력한 카톨릭 국가의 하나였다. 막대한 부로 로마 교황청의 최대 후원자였으며 유럽내 가장 독실한 카톨릭국가였다. 이는 제2차 십자군 원정당시 이슬람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데 리스본의 종교재판소는 많은 이들을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화형에 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1755년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 불리던 만성절이었다. 리스본의 모든 이들이 미사를 보려던 시점 땅은 크게 요동쳤다. 저 멀리 스코틀랜드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큰 지진은 90분 후 세차례의 큰 해일로 리스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처음 지진이 나고 사람들은 지진에서 안전해 보인 해안가로 몰려들었는데 이후 닥친 해일을 피할 수 없었다. 리스본의 모든 것들은 무너졌고 왕조차 지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들은 리스본의 타락을 이야기했고 신의 징벌이라 외치며 회개를 강요했다. 무너져 버린 왕궁탓에 천막으로 된 임시처소에 머문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수도를 옮겨야 된다는 이 부터 회개를 이야기하는 성직자들 틈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때 한 카르발류라는 대신이 왕을 알현했다 그는 왕에게 " 죽은자를 묻고 산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었다. 카르발류는 곧 왕의 전권을 뒤에 엎고 지진 현장에 나타난다.

 

그는 곧 병력을 동원하고 피난한 건장한 남자들을 소집해 시신을 수습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는 전염병의 창궐을 막게 된 것이다. 이 후 무너진 리스본 재건에 나선다. 평민출신에서 리스본 도시 건설 최고 책임자가 된 마이아의 제안으로 수직으로 반듯한 도로, 대칭적인 건물, 거대한 광장으로 리스본을 재설계했다. 4층 높이의 건물과 넓은 도로를 확보하는데 주안점을 둔 리스본 재건계획은 곧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산다. 집으로 평민들과 차별을 두어야만 했던 귀족들은 건축의 통일성속에 전복적인 평등사상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런 여러 이유로 리스본 재건계획은 더디어 갔지만 계몽주의를 실현하고자 한 카르발류의 독재덕에 리스본은 새로운 세계를 맞게 된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리스본의 아름다운 도시미학은 바로 이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르발류는 곧 지진의 피해를 조사하게 되는데 지금의 시각으로야 아주 단순한 질문이지만 지진이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지진의 피해는 어떤지, 그리고 지진에 의해 어떤 구축물들이 피해를 입었는지와 인명피해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여기에는 종교적인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리스본의 재건 과정까지 살펴봤을 때 카르발류는 근대 재난관리의 장을 열었다.

 

사실 이 리스본 대지진은 단순히 지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유럽의 지성들에게도 큰 사건이었고, 유럽인들에게도 큰 일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에 지진이 발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대도시가 지진에 의해 폐허가 된 것은 유럽에서는 처음 있는 일었다.  상식적이었던 유럽의 철학자들 눈에 신의 징벌이라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았다. 당시 리스본은 종교적인 도시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와의 갈등이 있었긴 하였지만 철학자들이 보기에 신의 징벌이 될만한 도시들은 따로 있었다. 즉시 볼테르는 그이 낙관주의 철학을 버렸고 루소 또한 지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영국의 지질학자들은 지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 당시 낙관적 계몽주의는 인간이 얼마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냐며 이성과 신학의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리스본 대지진으로 이런 낙관적 계몽주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성인의 축제일에 일어난 이러한 사건은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져왔다. 바로 볼테르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개신교는 리스본 대지진을 카톨릭이 가지고 있던 무자비한 종교재판소와 종교적 차이에 의한 신의 징벌이라고 봤다는 점에서 카톨릭과 다름 없었다. 칼뱅파를 위시한 개신교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이런 비판에 앞장섰는데 근본적으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런 종교적인 문제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남아시아를 휩쓸었던 쓰나미에 이슬람은 그들이 코란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비기독교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해서 미국의 목사들은 신의 징벌임을 강조했다. 이번 일본 동북부지역의 지진에 대해서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들 또한 신의 징벌 운운하는 모습을 보면 1755년과 지금의 종교가 과연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하다.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 신의 징벌이라는 무지한 논리를 편 반면 영국성공회는 자연재해 보다 매일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오히려 더 놀랍다며 이런 광신도적인 접근에 우려를 표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접근을 보였다.

 

인간은 아직도 지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직 지진에 대한 완벽한 이론도 없다. 하지만 리스본 대지진 이후 더디지만 지진 연구의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 단순히 지진에 대해서만 알아간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라는 인간에 대한 이성에 대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 뒤에 리스본 대지진을 통해 신중심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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