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만이 그것의 걷잡을 수 없는 돌진을 멈춰 세운다. 왜냐하면,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삶은 예술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예술의 바깥 경계선이다. 삶과의 경계를 넘는 작품은 예술이기를 그만두고, 단순히 유사한것이 된다. 예술은 삶이 작품 속에서 멈춰서고 중단될 때, 삶이 매료당하고 그 ‘진실함’의 마법이 깨질 때 생긴다. 이 결정적인 개입(Intervention)을 벤야민은 비판적인 힘, 또는 진실의 힘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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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생동하게하고, 삶을 예술로 만든다는 아방가르드의 오래된 꿈은다큐멘터리 분야에서, 브뤼노 라투르가 사실(Faktum)과 물신(Fetisch)의 교차를 지칭했던 것과 같은, 반쯤 살아서움직이는 물신 아니면 ‘팩티쉬‘(Faktische, faitiches)이외의 뭔가를 생산해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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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방식으로 반영된다. 오직 ‘진정함‘의 담론만이 인종 청소와 절멸을 향한 광적인 충동을 작동시킨다.
왜냐하면 리얼리티와는 달리 진정함은 근본적으로 위협받기 때문이다. 신빙성(Authentizität)의 정치적 차원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담론이 얼마만큼 강하게 권력의 문제들과도 연결되는지를 깨닫는다. 그 권력은 ‘진정한 삶’을 실현시키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삶을 실현시키는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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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짜’ 삶은 원본이 없는 복제이다. 삶 자체는 아무리 해도 진짜일 뿐이다. 그것은 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의 복제로서 비로소 삶은 ‘진짜’가 될 수 있다. 오직 다큐멘터리 형식만이 진짜로서의 삶을 증언한다고 주장하고, 이점에서 픽션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런 ‘진짜’ 삶은 다큐멘터리의 묘사 속에서가 아니면 다른 어디서도 생겨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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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이 걷잡을 수 없는 도취는, 1970년대 페미니즘 비평가들에게는 대단히 수상쩍은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아일린 맥개리는 1975년, 다큐멘터리의 "있는 그대로의삶의 제시"는, 전형을 현실로, 때로는 현실을 전형으로 보여줌으로써, 소시민적-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지속시킨다고 썼다. 이 시기에 ‘있는 그대로의 삶’은 이데올로기 혐의를 받는다: ‘자연’이나 원형’이라고 제시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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