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가스등 불꽃이 너울대지만 사실 실내를밝히는 용도가 아니다. 불빛 아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소환되는 녹회색 아치의 아름다움을 반히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포도주의 맛이 깊어지려면 많은 열이 필요해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용도가 아름다움을 부산물로 낳는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몸과 도구를 설명해왔던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하는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아니라,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향한 꿈이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 및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 서구 로고스의 체현인 (남성) 인간이 되지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 신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모두 키메라chimera로, 이론과 공정을 통해 합성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 곧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는 여기서 시작된다.
르귄은 거기에 "음악 하는 것"을 넣고 싶어했어요. 그런 거예요. 디스토피아나 유토피아 없이 하는 것이요. 르귄 식의 "언제나 집으로 오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