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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다 - 뇌과학과 명상, 지성과 영성의 만남
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지음, 임영신 옮김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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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나를 넘다』, 임영신 옮김, 쌤앤파커스, 2017.
(오디오클립 한주한책 서평단 '시험안끝났다'입니다.)
"우리는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
『나를 넘다』를 읽었다. 뇌과학자 볼프와 불교 승려 마티유의 대담집이다. 재미있다. 이 책의 홍보문구는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다. 정말 말 그대로 지성(과학)과 영성(종교)의 만남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볼프와 마티유 두 사람은 인간의 의식, 무의식, 자유의지, 자아 등에 관해 서로의 견해를 풀어놓는다. 과학적 견해와 종교적 견해가 때론 일치하고 때론 충돌한다. 두 사람의 토론을 재밌게 구경하고, 가끔은 그 토론에 직접 참여해 나의 생각을 덧붙이며 책을 읽었다.
마티유는 문학적인 수사를 잘 활용한다. 그의 말은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가끔 그의 말이 너무 두루뭉술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럴 때 볼프는 마티유의 말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과학적 설명을 덧붙이며 때론 반론한다. 덕분에 혼란을 겪지 않고 글을 읽을 수 있다. 반대로 볼프의 말은 명확하지만 전문 용어(뇌과학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일반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럴 때 마티유는 볼프의 말을 문학적 은유로 풀어내어 설명하고 종교적 견해를 덧붙인다. 덕분에 어려운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죽이 잘 맞는 커플(?)이다.
1. 종교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오해의 여지가 있어 먼저 말하는데,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에서 조그맣게나마 '종교'를 비호하고 변호하고자 한다. 『나를 넘다』를 읽으며, 특히 그 안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제1장 「뇌가 명상을 만났을 때」를 읽으며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그려낸 작품이다. 과학과 종교를 모순된 대립항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좀 의아할 것이다. 과학과 종교가 만난다고? 음… 창조과학인가? 어떤 사람은, 이 책에 분명 종교적인 내용이 잔뜩 담겨 있음에도, 홍보 문구 들어간 '영성'이란 단어를 이상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나 뭐라나. 마치 이 책에 담긴 과학적인 내용 안에 '종교'의 개념을 섞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종교는 종교, 과학은 과학.
내 경험상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은 '종교' 혹은 '종교적'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종교적'이라는 말은 '미신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무논리'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듯하다. 특히나 종교의 대립항에 과학을 두고, '과학' 혹은 '과학적'이란 말을 신봉하면서 말이다. 마치 '과학적 판단'은 신뢰할 만하고 진리이며, 반대로 '종교적 판단'은 자기 고집이며 억측인 것 마냥 여기기도 한다. 종교가 가진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오로지 과학적 연구방법만을 타당한 설명 방식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종교에 대한 환멸'이다(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35쪽).
이러한 환멸이 나타나는 현상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과거 신앙이 누려왔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과거에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신의 말씀'이라든가 '신이 내려주신 시련' 쯤으로 해석하며 알 수 없는 상태로 두었다. 반면에 오늘날 과학은 그러한 상황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지배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제 바닷가의 어부들은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나가기 전에 안전을 도모하고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 신에게 풍어제를 올리거나 하지 않는다(오늘날 열리는 풍어제는 신앙하는 행위이기보다는 옛 문화를 유지하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안전 장비와 질 좋은 그물 등을 준비하며 과학적으로 신뢰할만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상 상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오늘날 신앙심을 바탕으로, '풍어제를 올리지 않으면 신이 진노하여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판단은 말 그대로 억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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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한 환멸이 나타나는 데 일부 종교계의 뻘짓(?)도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많이 샜으니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과학이 실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종교는 그런 실질적인 이득을 주지 못한다는 게 우리나라 많은 사람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인다. 『나를 넘다』에서 두 저자가 '명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볼프도 이러한 인식을 조금씩 보여준다.
[볼프] "이 문제에 관해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명상의 부작용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눈을 감도록 하고, 문제를 풀기보다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최상의 전략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33쪽)
명상이란 불교에서의 정신수련으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방식을 바꾸어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20쪽). 좀 더 구체적으로 명상이란 "우리의 주의력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맑게 깨어 있는 의식을 응시"하며 "산만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71쪽).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한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욕구, 불안 혹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이며 우리는 "이 고통과 하나"가 된다. 결국 "이 고통들은 우리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아" 우리를 산만하게 만든다(138쪽). 명상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볼프의 말은, 그러한 명상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고 완곡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를테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 는~ 행복합니다! 나~ 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 행복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현실은 변하지 않았는데 나의 정신을 수련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명상이란 결국 현실의 문제를 앞에 두고서 그저 "눈을 감도록"하는 일이 아닌가. 볼프는 이를 "명상의 부작용"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단연코, 이를 '오해'로 규정한다. 명상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종교적 성찰이다. 그리고 종교적 성찰은 분명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생각해보자. 현실의 어떤 문제는 때로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준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외부의 존재(문제)를 원망하며 그것을 고치거나 아예 없애려고 시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구조와 성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때 과학적 탐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빠뜨리는 과정이 하나 있다. 바로 '나는 왜 그것으로부터 고통을 느끼는가?'라고 성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이 바로 종교적 성찰이다.
보통 우리는 어떤 문제를 대하며 '그것은 왜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할까!' 원망하기는 해도 정작 '나는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느낄까?'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계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나는 왜?'라고 묻는 작업은 '나'를 중심에 두고 내면을 깊게 파고들면서 나와 외부(세상, 세계)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문제 해결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즉 문제 해결의 원동력을 내면에서 끌어내지 못한 채 그저 외부의 대상만을 원망하게 된다. 쉽게 말해 '남탓'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20쪽) 행복이나 고통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대상을 해석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의 정신'임을 잊어선 안 된다. 명상은 삶의 외부적인 조건들을 앞에 두고서 그저 "눈을 감도록"하는 일이 아니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정신수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러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신이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의지를,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샤를 페팽, 『실패의 미덕』, 74쪽)
이러한 기도는 명상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성찰이다.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란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파악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언제나 남탓만 하는 것을 넘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는 존재, 즉 '어른'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구절절 말했지만, 결국 결론은 이거다. '너무 종교를 미워하지 마세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과학적 탐구도 필요하고 종교적 성찰도 필요하니까. 사실 내가 맨 앞에서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세상에 종교가 없는 사람은 없다. 종교란 쉽게 말해서 우리의 믿음 체계다. 세상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제외하면 종교는 우리 각자의 내면에 반드시 있다. 나의 경우 단지 그것이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특정 종교'의 명칭으로 불리지 않을 뿐이다.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시노부교'라고 붙일 거다!
사실 『나를 넘다』의 두 저자는 과학과 종교를 모순된 대립항으로 설정한 사람들이 가질 의아함을 의식했는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서양의 과학과 불교 사이의 대화는 흔히 과학과 종교의 까다로운 논쟁으로 통하지만, 서구 사람들이 흔히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일종의 '정신과학'이며, 따라서 불교 승려(마티유)와 신경과학자(볼프)가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이다(11쪽).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며, 이 책에 충분히 담긴 종교적인 색채를 첫머리에서부터 애써 외면하려는 듯한 서술은 나로서는 조금 거슬린다. 종교가 그렇게 나쁜 게 아니라니께. 종교적 색채를 거부하지 말라고. 헤이~ 추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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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너모 미워하지 마세영 ㅠㅠ
2. 이 책이 어려운 이유
『나를 넘다』는 좀 읽기 어려운 책이다. '나만 읽기 어려운가?' 생각했는데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읽기에 어려움을 호소했다. 내 지식이 부족한 탓만은 아닌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추천의 글에서도 "마치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처럼" 읽기 까다로운 책이라고 한다(8쪽). 이 책은 특히 뇌과학 관련 지식이 없으면 더욱 읽기 어렵다. '대뇌섬(insula)'이라든가 '띠이랑(대상회) 피질'이라든가 듣도보도 못한 단어가 속속들이 나온다. 몇몇 단어들은 역자주를 붙여 설명해두었지만, 역시 모든 단어에 역자주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많은 뇌과학 용어는 독자가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책이 꼭 나쁜 책인 것만은 아니다. 찬찬히 공부하면서 읽을 수도 있으니까. 방금 말한 '어려운 단어'의 문제는 꼭 책의 '단점'이라고 지적할 만한 사항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어렵다.' 비단 단어의 문제만이 아닌 더 큰 문제가 원활한 독해를 방해한다. 이 책은 논지전개가 뒤죽박죽인 부분이 많다.
다음 내용을 보자.
[볼프]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 순간 이루어지는 여러 변화들이 이어진 하나의 흐름입니다. 뇌는 부단히 받아들인 신호들에 대한 반응으로, 가장 그럴듯한 혹은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나 해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해답으로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전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변화를 의식합니다. 따라서 뇌는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90~91쪽)
여기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나 해답"을 찾는다는 건, 우리의 뇌가 어떠한 상황에서 받아들인 신호를 바탕으로 그 상황을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해석한다는 뜻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행복이나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입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려보자. 지금 내가 인용한 볼프의 말은 이 문구를 뇌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의 마지막 줄을 읽으며 의문이 들었다. "뇌는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어떤 해석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왜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하지? 이 문장 바로 앞에 "우리는 이 변화를 의식합니다. 따라서…"라고 언급하기는 하는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이 의문의 해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한 이후에 나온다.
[볼프] "따라서 뇌는 이처럼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얻어진 결과에 대해 언제 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92쪽)
즉, 얻어진 결과(해석작업의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평가하고 그 해석작업을 '그만두기 위해서' 우리는 과정과 결과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생각에 빠질 테니까. 무한히 사고회로에 갇히지 않고 어느 순간 '생각을 다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을 파악해야 한다. 생각을 다 했다는 건 "갑작스러운 전개"에 따른 깨달음으로, 이 깨달음 이후 우리는 만족감(긍정적인 상태)을 느낀다. "유레카!"라는 깨달음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여기서 "활성화"라는 단어는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나온 "활동"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확인해야 한다.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의 구분은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두 단어가 같은 의미라는 근거는? 바로 내가 인용한 부분의 첫 번째 문장에 나온다.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은 즉, '뇌의 활동이란 신경세포의 활성화'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설명이 구구절절했는데, 본 내용이 어렵다 보니 이 설명도 좀 난해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볼프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뇌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신경세포밖에 없다
2) 뇌는 진행 중인 해석작업의 바탕이 되는 활동과, 결과 그 자체에 부합하는 활동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참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한 후)
3) 뇌는 이처럼 서로 다른 활성화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평가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한다.
4)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숙고작업을 멈추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독자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2번 문장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려면 4번 문장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4번 문장은 바로 앞에 있는 3번 문장을 설명해준다. 사실 2번 문장과 3번 문장은 같은 말이다. 따라서 4번 문장은 3번 문장을 설명하지만 동시에 2번도 설명해준다. 2번 문장과 3번 문장 사이에 '한참 그 결과의 예시를 설명'해서 두 문장이 서로 같다는 게 바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번을 전제로 생각하면 2번과 3번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지럽지 않은가? 독자는 순서대로 1번 2번 그리고 3번 4번 문장을 읽는데,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책을 순차적으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며, 여기저기 왔다갔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되돌아갔다가 해야 한다. 말하는 개념 자체도 쉽지만은 않은데 하필이면 내용 전개도 이렇게 뒤죽박죽이니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이렇게 뒤죽박죽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대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한 사람이 일관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지 못한다. 독자는 '두 사람'의 대화 흐름을 따라가며 책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독자는 이 책의 내용을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나 명상이란 걸 딱히 해본 경험도 없고 뇌과학 지식도 별로 없는 나에게는 더욱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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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다 어지러워
뒤죽박죽 전개는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도 나타난다.
[볼프]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해답에 도달한 것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하는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과 동시성일 것입니다." (94쪽)
혹시 이 문장이 바로 이해가 되는지?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읽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기본적으로 한 문장에 관형어(-있는, -하는 -적인)가 너무 많아 어지럽다. 게다가 논지 전개도 뒤죽박죽이니 혼란이 증가한다.
이 문장은 여러 문장이 섞여 복합적으로 구성되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해답에 도달한다.
2) 이를 평가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3) (이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는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일관성과 동시성이다.
볼프의 말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의 1번과 3번에 둘 다 "일관성"이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1번의 "일관성"과 3번의 "일관성"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앞서 한 문장으로 묶인 것에서 "일관성"에 관한 부분만 추려보면 이렇다.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고 (…) 이상적인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이다.' 마치 순환논증의 오류인 것처럼 보인다. '일관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는 조건이 바로 이 일관성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볼프의 말을 이해하려면 "일관성"을 키워드로 1번과 3번을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2번이 들어와서 이 둘을 구분해버리니 혼란이 온다.
우리는 앞에서, 뇌는 해석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즉 뇌는 서로 다른 활성화 상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위의 1번 문장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결국, 일관성(그리고 동시성) 있는 상태란 활성화 상태의 일종이고, 우리의 뇌는 이를 해석작업의 '결과'로 구분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되어 '긍정적이라는 평가'에 따라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유레카!"의 희열을 안겨준다.
정리하자면, 처음에 본 하나의 문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1) (뇌가) 전체적으로 일관성(그리고 동시성) 있는 상태를 감지하면 해답(해석작업의 결과)에 도달한다.
3) (일관성·동시성 있는) 상태를 조건으로 하여 평가시스템이 활성화된다.
2) 활성화된 평가시스템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상한다.
문장 번호를 잘 보자. 독자는 한 문장을 1번 2번 3번 순서로 읽는데, 논지를 이해하려면 1번 3번 2번 순서로 파악해야 한다. 한 문장을 순서대로 읽으면 이해가 안 되고, 한 번 읽었다가 되돌아가서 또다시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어지럽다. 이러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이렇게 한 문장에서도 뒤죽박죽이 나타나는 원인은 번역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는 우리말 어순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다. 원서를 파악하지 못해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아마도 이 책의 옮긴이는 두 저자의 대화를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직역투로) 옮기려 한 듯하다. 외국어 문장의 논지 전개 순서는 우리말 문장과는 사뭇 다를 수 있는데, 옮긴이가 이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의역하지는 않은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운 책이 꼭 나쁜 책은 아니다. 매끄럽지 못한 논지 전개라고 해도, 여러 번 곱씹어서 읽으면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으… 사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그냥저냥 넘어가면서 책을 읽는데, 이렇게 서평을 쓰면서 하나하나 분석하는 작업을 하니 너무 힘들다.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로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수고로운 과정이다. 물론 그런 만큼, 이 책을 다 읽어냈을 때 보상은 확실하다. 영성의 맑은 공기와 지성의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가끔은 이런 어려운 책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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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높은 산에도 올라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