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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평점 :
소녀가 실종되고, 사람이 죽고, 용의자와 경찰이 있으며, 범인이 있다.
실종된 소녀의 가족이 있고, 범인으로 지목된 소년의 가족이 있다.
토마스 쿡의 <붉은 낙엽>은 추리소설의 소재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문장과 사유는 장르를 넘어선다.
'의심' 이라는 흔한 감정을 가장 문학적인 언어들로, 가장 대중적인 장르의 틀을 가지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 기어코 강한 여운을 남기고 만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작가들은 카슨 매컬러스, 필립 로스, JCO 등이다. 문장들에서는 카슨 매컬러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뿐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숨 멈추고 읽게 하는 필력은 JCO,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의 여운,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는 필립 로스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의 줄리언 반스 까지도 떠올리게 한다.
완벽해 보이는 가족, 완벽한 줄 알았던 가족의 집 앞에는 붉은 낙엽을 떨구는 일본 단풍나무가 있다.
완벽한 가족인 줄 알았던 걸까, 완벽한 가족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줄 알았던 걸까.
역자는 심지어 후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독자께서 이 책을 읽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면..'
이 결말은 원하지 않는 결말이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법도 한데,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한 삶과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마음이 흔들흔들 하기는 하지만. 여튼, 만만치 않은 이야기다. 작가는 독자에게 굉장히 불친절한데, 그 불친절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번역 문장도 굉장히 수려하다. 그래서 더 원서도 읽어보고 싶다.
그날 아침나절에 모든 문제가 일거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비이성적인 희망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아무 근거도 없는 희망이었다. 나는 우리가 파멸에 직면하면 희망을 만들어내도록 설계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주위에 폭탄이 터지고 있는 도중에 평화를 희망한다. 우리는 종양이 더 커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며, 우리의 기도가 빈 공간에 하릴없이 흩어져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는 사랑이 사그러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무사할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화강암 절벽 앞에서 멈추는 순간에도 혹은 우리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쿠션이 우리를 받아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고통 없는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라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