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1- 노승(老僧)
꿈을 꾸는
이 고깃덩이 몸.
언젠가 깰,
언젠가는 반드시 깨야 할,
깨야만 할
긴 꿈속에서 헤매는
이 덧없는 몸을 힘겹게 채찍질하며
철 들 무렵부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질 때까지
용맹정진 하였으나
비천한 이 몸이 깨달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허망하게 흘러가
사라져버린
시간들만이 있을 뿐.
또 다시 나는 길을 잃었다.
이번 생에서,
또
다시.......길을 잃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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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2- 뱀파이어(Vampire)
잊었다.
잊어버렸다.
나는,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보통 인간들의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산 탓에
나는
많은 것들을
잊었고,
또한
그만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제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내 나이가 올해로 몇 살이 되었는지도,
덧없이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조차도,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단 하나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유일하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름다운 그 여인의 얼굴에
수줍게 피어나던
들꽃 같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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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3- 신(神)
나는
아무것도 없던
텅 빈
끝없는 어둠으로부터
강렬하게 터져 나온
거대한 불꽃과 함께
태어났다.
내가 눈을 떴을 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정지되어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고독의 화두(話頭)를
천천히
곱씹어 보다
깨달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나 홀로 존재함은
끝없는
무료함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잔인한 운명을
조금이라도 즐겨보기 위해
온갖 것들을 만들어내었다.
시간
공간
별들
생명체들
그것들의 형상은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것들의 의식 또한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 우주의
최초의 설계자
신.
나는 나와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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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4- 욕망
덧없는 꿈 속에서
스스로
미혹하여
끝없이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어리석음.
슬프도다,
아아, 인간이여.
슬프고 또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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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5- 종말의 여신
빛나는
내
붉은 드레스 자락
한번 펄럭이면
사라지네
하나의 우주가......
눈부시게 불타
정화되어
사라지네.
그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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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6- 건전지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나는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건전지에 불과했다.
살아 숨 쉰다는 착각에 빠진 채
온갖 번뇌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나의 안에서
뜨겁게 뿜어져 나오던
고통과 욕망의 에너지를 마시며
제 기운을 충전하는
온갖 악마와
온갖 신들의
건전지에 불과했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그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건전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또 독(毒)을 마시고
새로운 건전지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