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를 보여주마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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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다 평점을 매기는 기준이 다 다를 것인데, 나는 A-B-C 중에 두 가지 이상 충족되면 점수를 높게 주려는 편이다. 가령 스토리는 별로지만 가독성과 전달 메시지가 좋다거나, 가독성은 꽝이지만 소재가 신선하고 작가의 철학이 돋보인다거나 이런 거. 장점이 최소 두 가지 이상은 돼야 좋게 봐준다. 그런데 애매한 작품들도 은근히 많다. 이 작품도 그러한데, 컨셉은 괜찮았지만 스토리를 잘 살렸다고 하긴 애매하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메인 사건보단 캐릭터의 과거 내용이 더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그 개인사들이 캐릭터 설정에만 의미가 있고, 현재 사건과는 하나도 관련 없다고 느껴진다. 내용들이 따로 놀고 있는 작품이지만 그럭저럭 봐줄만했는데, 점수를 높게 주자니 뭔가 내키지 않고, 낮게 주자니 수고 많이 한 작가에게 미안함이 든다. 나는 선택 장애가 없는데도 이럴 땐 장애가 오곤 한다.


한 변호사가 실종되었다. 실종사건 후로 익명의 발신자가 이상한 이메일을 변호사에게 주기적으로 발신해온다. 그러다가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동영상이 메일로 왔고, 수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변호사는 사체로 발견된다. 이후 한 시사평론가도 실종되었는데 이 사람도 익명의 유저가 이상한 글을 그의 블로그에 주기적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앞의 똑같은 동영상이 블로그에 올라왔고 그도 죽음을 맞이한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두 피해자가 과거 ‘샛별회 사건‘과 연관된 인물임을 알아낸다. 그 당시 공안기관은 샛별회를 반정부 세력으로 정의했고, 그중 핵심 인물들을 구속하고 폭행했다. 실종 변호사는 그 사건의 담당 검사였고, 평론가는 담당 기자였다. 기자가 검사를 꼬드겨 샛별회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붙잡혀 고문당하고 생을 마감했다. 경찰들은 샛별회 사건으로 죽은 자들의 2세들이 복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추가 살인을 막아야 하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보이질 않는 범인들. 그들의 복수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살해 방법을 소설로 만들어 출판도 하고,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까지 만들었다? 신선한 돌 아이 발상인데 그걸 그대로 경찰에게 알리다니, 대체 얼마나 자신 있는 범인인가 싶었다. 대작의 느낌이 올랑말랑 하고 있는데 점점 옆길로 빠진다. 검사와 경찰과 범죄학자가 수사하다 말고 자꾸 과거 회상으로 빠진다. 나쁜 건 아닌데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검사의 가정사 내용이 훨씬 재미있다는 거다. 부모가 죽은 뒤로 작은집 사람들 손에 길러지면서 온갖 멸시를 받고 자란 검사와, 죽기 전에 비밀을 털어놓는 작은아버지. 가뜩이나 사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는데, 가족들까지 본인을 흔들고 찔러대니 미칠 지경이다. 그토록 모질게 굴어놓고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는 작은집 사람들을 보다 보니 이거 이거 전형적인 한국의 막장드라마 냄새가 난다. 이 내용이 더 흥미진진해서 메인 스토리는 갈수록 텐션이 떨어지고, 범인들은 코빼기도 비추질 않으니 긴박함에 비해 속도감은 퍽퍽 줄어든다. 이런 마이너스 요소들이 작품성을 무너뜨리는 느낌이 들었다. 쩝.


과거와 현재에서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고 수사에 팁을 주는 플롯은 시리즈 소설에서나 볼 법한 구성과 기교인데, 그걸 한 작품으로 압축하려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리고 딱히 연결고리도 없어서 붕 뜬 구간도 많았다. 무엇보다 용의자들의 시점이 없는 게 가장 답답했고 끝내는 사건을 미결로 종료했을 때 작가님이 지쳤나 싶을 정도로 허탄했다. 이렇게 불편한 진실은 또 한번 침묵당했다. 어쩌면 작가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왕 사회 고발을 하겠다면 이보다 더 강력하게 다뤘어도 좋았겠다. 살인은 잘못된 것이지만 어쩐지 정당한 복수 같아서 범인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경찰들은 지난날의 과오를 숨기려 무던히도 애를 쓰고, 범인들은 역사의 진실을 늦게라도 밝히고 형벌하고자 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법이 곧 정의‘라는 말이 싫어진다. 그러면서도 내가 불리할 때는 법대로 하자는 말부터 나온다. 인간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그 기분을 이 책에서는 여러 번 느끼게 한다.


나는 스토리의 힘은 캐릭터에게 있다고 늘상 말하는데 이 작품은 좋은 캐릭터들을 가지고도 스토리가 부실했다. 잘 만든 인물들을 사건에 적절히 버무려주어야 했는데 각자의 에피소드가 되어버려 무의미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나저나 범인들이 말하는 ‘코뿔소‘는 대체 무엇인가. 뿔이 부러져도 다시 자라나는 코뿔소는 뿔의 방향대로만 나아간다고 설명이 나오는데, 그걸 2세들의 성격 및 가치관과 일치하게 본다는 건 어딘가 좀 억지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잠자코 있으련다. 최근 휴일 동안 먹고 놀기 바빠서 책에 집중을 못했더니 리뷰가 엉망이네. 나름 꾸준히 독서생활을 하는데도 잠깐 해이해졌다고 이 모양이니 원. 유튜브로 코뿔소나 구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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