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1톤의 독서
스가 아쓰코 지음, 김아름 옮김 / 에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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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평지나 분지도 아니고 봉우리도 아닌, 이탈리아 중세도시 오르비에토에서나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형을 우선 떠올려보자. 말하자면, 스가 아쓰코는 자신의 에세이로 그 누구도 쉽게 이르거나 침범할 수 없는 요새 같은 문학의 장소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는 영문학과 사회학을 거쳐 번역가, 연구자, 문장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십여 년 간의 유럽 체류가 만들어놓은 자장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펼쳐진다. 이 에세이 역시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해 생활을 꾸렸던 이탈리아 서점을 중심으로 맺었던 인연들,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먼 아침의 책들>(한뼘책방, 2019)이 책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 특유의 자전적 에세이를 보여주고 있다면, 이 책은 일종의 소품으로 좀 더 직접적인 서평에 가까운 형태의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뒤로 갈수록 책 그 자체에 몰입해들어가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스가 아쓰코라는 '문장가'의 진면목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랜 독서 생활과 문장에 대한 특유의 감식안을 바탕으로 갖게 된 유려한 문체는 읽는 이를 지그시 응시하는 느낌을 선사할 만큼 편안하게 느껴지고, 유럽문화에 대한 관심과 십여 년의 이탈리아 생활은 유럽과 일본을 넘나들며 책 이야기를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한국도 민주화 이후 해외 여행 전면 자유화가 되었지만,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에서 보여지는 코스모폴리턴 특유의 해박함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에세이는 흔치 않다. 자신이 다룰 수 있을 시기가 도래했을 때 에세이를 통해 문학의 세계로 들어선 사람이기에 가능한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독서가 스가 아쓰코의 문학적 고원으로 통하는 길을 터줄 수 있다면, 번역된 다른 책들은 분명 독자를 그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 역시 송태욱 선생이 번역한 <먼 아침의 책들>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섬‘이라는 장이 그렇다. 작가는 "섬들이 저마다 고유한 역할과 얼굴을 갖고 있다"라는 글머리로 시작해 무라노는 까마귀 섬, 부라노는 화려한 색채의 민가와 인종의 섬이라는 식으로 차례차례 정의 내린 후 다음과 같은 내적 성찰이 넘쳐나는 문장을 건넨다.
"섬은 또한 고독과 정숙의 장소, 적어도 그런 느낌을 기대받는 장소다. 스스로 나아가거나 혹은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모습을 감춰야 하는 인간은 같은 부류끼리 모여 특정 섬으로 향한다. 죽은 자는 산 미켈레로 향한다. (...) 죽은 자 옆에서 자기 몸의 격리를 요구하거나 요구받는다. 여기서 인종이란 수도사와 병자, 병사다." - P27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답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경쟁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각자 믿는 방향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로지 자신에게 충실한 그런 일들을 근본적으로 잊은 게 아닐까. - P166

직선적 시간이나 장소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선생님의 이야기 방식이 디테일로 가득 찬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디테일로 인해, 살아온 시대나 보아온 풍경, 더 나아가 교양의 수준이 확연히 다른 나조차 뒤처지지 않고 선생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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